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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동하는 신앙 (행 1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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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는 온 세계가 또 한 번 충격으로 휩싸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몇 년 전 미국의 부의 상징인 뉴욕 무역센타 건물을 강타한 엄청난 테러 사건 이후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도 있었고 이번에는 영국의 런던에서 폭탄 테러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알 카에다 측에서 자기들이 한 일이라고 발표한 것과 함께 십자군을 향한 테러는 계속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라크에 파병한 나라들에 대한 공격을 구체화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언젠가는 테러가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갖게 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문화전쟁, 종교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인 것이 분명합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신앙에 대해서“신앙은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그 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있다 하더라도 믿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서 아무 두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혀 우리에게 놓여진 상황이 말씀대로 행동하기에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라는 말씀이 주는 위안이 큰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복음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에는 희한한 능력이 있는데, 진리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사자같이 담대하여지고(잠28:1),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요8:3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용기를 얻었으며 그 말씀 속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을 찌르기도 하시고 깨닫기도 하십니다. 눅 5:1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할 때 베드로는 밝은 한 낮에도 고기를 잡은 것이 많아 자신의 배 뿐만 아니라 친구의 배도 가득하게 채우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말씀을 의지할 때 채워지는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숫자

예전 우리 학창시절 때는 잉크를 가방에 넣어 다녔는데 때로는 그 잉크병이 넘어져 가방을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책도 물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모나미 볼펜이라는 것이 나왔는데 얼마나 유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잉크도 잘 흘러나오는 것이 참으로 긴요했습니다. 하여튼 모나미 볼펜 한 자루만 있으면 수업준비는 형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나미 볼펜에 15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던 것 기억나십니까? 요즈음도 보시면 153이라는 숫자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 숫자에 대한 유래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그 회사의 사장님이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요21장에 나타나는 내용인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갈릴리에서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갈릴리로 갔는데 몇 날이 지나도 주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려 간다고 했고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섰지만 그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뭍에서 외치는 소리가 잡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그들의 대답은 '잡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하는 자가 누구였는지 몰랐지만 하도 실망되었던 때라 무심결에 그대로 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엄청난 고기가 그물에 들어 왔습니다. 손끝에 느껴지는 묵직한 것은 전율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그 때에 한 제자가 예수님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 잡은 고기의 그물을 끌어다가 헤아려 보니 153마리였습니다. 그러니까 153이라는 숫자는 불순종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숫자, 기념의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나미 볼펜을 만들면서 153이라는 숫자를 넣었고,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면서 만들었고 결과는 문구류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아마 많은 돈도 벌었을 겁니다.

말씀을 믿고 의지하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마음에 평안이 넘칩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생각하여 보시면 평안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승리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면 어떤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가진 복음을 담대히 그리고 힘 있게 증거해야 합니다.

체념이라는 병

현대인이 앓고 있는 여러 가지 병 가운데 하나는 "체념"이라는 병입니다. 스스로 체념하고 포기함으로써 현대인은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체념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우리 시대가 처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전반에 걸쳐서 어떠한 한계점과 위기의 상황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가운데는 제 정신으로 살기 보다는 차라리 체념과 포기를 통해 모든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앉은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받은 삶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부모님이나 가족들 또한 그가 앉은뱅이라는 사실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서기 위해서 온갖 노력도 기울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고 점점 더 절망과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지속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모든 소망을 포기하였을 때 오는 아픔에는 체념이 가장 좋은 치료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루스드라의 앉은뱅이에게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앉은뱅이가 똑바로 일어서고, 뛰어다니는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이적을 가능케 한 것은 앉은뱅이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주저앉은 우리를 박차고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여는 열쇠입니다. 이 믿음은 복음을 들을 때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이적을 보고 그들을 신으로 모시려 하자 두 사도는 옷을 찢으며 그들을 제지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헤롯 왕을 신처럼 높였을 때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취함으로 죽게 된 일을 기억합니다(12:22~23).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 16:18). 사람을 섬기는 일은 “헛된 일”입니다.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을 높이는 삶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도 앉은뱅이는 한 번도 걸어 본 일이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점은 똑같았지만, 이 사람은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설교를 들으러 온 것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을 만나 그의 설교를 들었고, 사도 바울은 설교를 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 그 사람을 세워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주목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던 사도 바울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자기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앉은뱅이의 눈과 바울의 눈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전기가 서로 부딪치는 것 같고, 용광로에 쇠가 들어가는 것 같은 경험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도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주목하였다"고 했고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고 말했습니다. 주목하여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눈과 눈이 마주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말씀은 말씀으로 끝나버리고 능력은 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능력이 되는 순간 바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설교 도중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건이 기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목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주목해서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보게 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보았다

9절에 보면 바울이 주목하여 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에게서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의 설교를 듣는 순간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부딪쳐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설교를 들었지만 특별히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은 바울의 설교에 빨려들었고, 복음의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심겨졌습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이 그 속에 씨로 뿌려질 때 생긴다

내가 노력하고 애쓴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운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라 믿음의 씨가 뿌려져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여자라도 혼자서는 아기를 낳을 수가 없고 남자로부터 생명의 씨앗이 여자의 몸에 들어올 때 임신을 하게 됩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임신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기 생각으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 방법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수십 년을 기다린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그 속에 씨로 뿌려질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절대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 속에 뿌려지고 내가 그것을 접하게 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안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흘려들으면 아무리 들어도 믿음이 안 생깁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뿌려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그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다 보면 어떤 분은 너무 열심히 쳐다보고 말씀을 듣기 때문에 "저분은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받아먹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빨래 줄에 앉은 제비새끼가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들이려고 기를 쓰며 입을 벌리는 것과도 같이, 입을 딱 벌리고 받아먹는 모습의 심령들을 봅니다. 거기에 분명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고 백% 받아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기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니 걸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네 발로 일어서라" 는 한 마디에 벌떡 일어섭니다. 자기가 앉은뱅이였던 사실을 다 잊어버렸고 생전 걸어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부터 잊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같은 자기 부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완전한 자기부정은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지나 자기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부정은 말씀을 긍정하게 될 때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자기를 부정케 했습니다. 자기 과거의 경험, 구제불능이었다는 자기의 주제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능력으로 변화는 믿음

믿음이 자라면 어떻게 됩니까? 능력으로 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립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며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있지만 전혀 그의 삶에 능력이 안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믿음의 전부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바울의 설교를 짧은 시간 동안 들었지만 그 말씀이 그 사람 속에서 능력이 되고, 믿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화산이 다시 살아난 활화산처럼 그 속에서 뭔가 모를 힘이 솟아나고 있는 것을 지금 사도 바울이 목격을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에 보면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입니다. 그 말씀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그 생명이 내 속으로 들어오게 되어 어두움을 없애고 슬픔과 염려와 근심을 없애 버립니다. 에너지가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육체까지도 변화시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의 육체를 새롭게 만드는 기적을 실제로 일으켰습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사람은 변화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변화가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는 그런 능력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극작가 오혜령 씨는 어려서부터 많은 병을 가져서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자그마치 가지고 있는 병이 14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드디어 죽을 날이 가까웠습니다. 의사가 3개월밖에 못 산다고 해서 그는 남은 3개월의 삶을 하루하루 달력에 체크해 가며 날을 지나는데, 고통이 이루 말할 길 없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왜 나만? 왜 나만?"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을 했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추구해 왔는데, 왜 나를 향해 매를 드십니까? 진짜 살아 계십니까? 말해 주십시오. 이 고통 중에 나에게 말해 주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죽음의 순간 앞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답니다.

글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통증은 24시간 단발마로 다가왔고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고 싶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달력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 나갔다. 예정된 죽음의 날짜인 6월26일에 빗금이 쳐진지 며칠이 더 지나고 있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 되었다. 어느 날 정신이 몽롱해 지기 시작했다. 눈물로 간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아롱거렸다. 그 때 어디선가 나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꼈다. 순간 방안에 나뒹굴어졌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과 죽음을 깊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동안 살아계신 하나님께 도전해 온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으며 기도했다.“당신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이 병도 저를 구원하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이 아니겠습니까?”순간 지난날의 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며칠 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죄를 회개했다. 육체적인 암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적인 암이 치료받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절실함으로 죄를 적었다. 며칠간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내릴 때까지 전 인생을 회개하며 기도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온 몸에 오한이 덮쳐왔다. 그녀는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않았다. 어깨에 복숭아 씨만한 멍울도 사라져 버렸다. 복수로 차올랐던 배는 꺼져 있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개입이었다.

그 후로부터 오혜령 씨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중심으로 살았던 인생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져 가기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고통만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작정을 합니다. `덤으로 얻은 인생, 소외된 자를 위해 살아야겠다.` 그래서 그녀는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병은 계속해서 죽음을 연습하게 하고 있습니다.“관상 대동맥 경련증이란 희귀병으로 매일 한번 호흡과 맥박이 멎는 가사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깨어나면 간절히 기도한다. 당신이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다시 살 것입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건강해졌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때에 병중에서도 어려움 중에서도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닌 나와 함께 하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고 고전15장1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경력이 많고 직분이 있다 해도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쉽게 잘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내 몸, 내 삶의 상황에 고통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옳으시고 이 옳으신 일을 잘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혜령 씨의 말처럼 과거 나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없이 살았습니다. 내 성경지식, 신앙경력, 나의 바른 판단, 이것만이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옳지 않은데, 옳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하나님만이 옳으신 하나님인줄 믿으시고 나의 나쁜 상황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부지간에도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그것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에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 지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창조적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첫 번째는 사도 바울이 주목해서 보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사람 속에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바울이 발견했다는 사실이고, 세 번째로 그 믿음을 발견한 사도바울이 "네 발로 일어서라"하고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불타는 믿음, 자기를 구원할 만한 믿음, 앉은뱅이 된 자기를 일으켜 세울만한 믿음이 이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사도 바울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네 발로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했을 때 앉은뱅이가 뛰어 걷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병자들에게처럼 오늘 이 앉은뱅이도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역사를 위하여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 혼자 이루어 가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과 함께 일하시기를 좋아하시고,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우리 교회를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고,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고, 우리의 전도와 봉사와 헌신이 열매 맺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충분히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서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제 발로 일어서려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다닌 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제 발로 서서 다니며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려 하지 않고, 늘 남에게 의지하려 하고 남에게 기대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그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주고 부담을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어리고 약할 때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륜이 쌓여서 이제는 남을 도와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젖먹이처럼 남을 의지하려고만 한다면, 거기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기적을 일으키실 여지를 찾기란 힘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네 발로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서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바울처럼, 자기발로 바로 일어나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했던 그 사람처럼, 오늘 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바로 걷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들었고 구원 얻는 믿음이 있었다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설교는 흥미나 호기심으로 혹은 새로운 지식을 위해 듣는 공부가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함께 역사하심으로 큰 능력과 권능이 나타납니다. 인생의 변화를 일으키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앉은뱅이에게서 발견했습니다. 마펫 박사는 하나님의 말씀은 양약과 같기 때문에 이 말씀을 먹는 자 안에서 생명이 되살아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약한 부분을 강하게 하고, 부족한 부분을 넉넉하게 합니다. 앉은뱅이는 말씀을 듣는 순간 믿음이 생기고, 이 믿음이 새 힘을 얻는 데까지 자랐습니다. 마치 대열에서 이탈한 양이 목자에게서 위로를 받고 다시 힘을 얻어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이 앉은뱅이는 약한 다리에 새 힘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를 발견하고 영안으로 본 바울은 그를 향하여 일어서서 걸으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응답

앉은뱅이는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생각하거나 기대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중 그 말씀과 자기 자신을 일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기에 일어서라는 말씀과 함께 그는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행동은 자기 자신도 이웃도 기대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이들이 놀라고 그 자신도 감격과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양식을 먹는 것처럼 받아먹어야 합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건강한 사람에게는 꿀같이 달고, 같은 설교라도 병든 신앙인에게는 전혀 맛이 없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구원 얻는 믿음에 이르시는 모든 성도와 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에 나오고 헌금을 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신앙의 진수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이 우리의 삶속에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분의 뜻을 좆아서 살려고 하는 우리의 삶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그것은 행위로 아름답게 꽃피워져야 하는 것이란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참된 신앙, 그 신앙이 율법을 지키는 좁은 안목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정의와 사랑과 겸손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살아있는 신앙, 행동하는 그런 신앙을 가지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신앙은 바로 그런 신앙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은 박하와 회양과 근채의 십일조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과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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