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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길에 행하게 하소서 (시 119: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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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편은 시편 가운데서 가장 긴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율법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결정적인 요소"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인은 박해와 억압으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자기의 삶에 큰 힘과 위로를 주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중 오늘 읽어 드린 33절 이하에 보면,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소서"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바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그 문학적 형태, 그것을 기록한 동기 등을 공부하는 단계와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그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내지는 신학 혹은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깨달은 말씀이 오늘 내게 무엇을 행하라고 하시는지를 듣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런 기도와 아울러 "내 마음이 주의 교훈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주의 길을 걸어 생명을 얻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기보다는 탐욕으로 치닫기 쉽고, 우리의 눈은 그 말씀의 길을 찾기보다는 헛된 것을 보기 쉽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먼저 드려야할 기도는, '탐욕으로 치닫는 내 마음이 주님의 말씀에 몰두하게 하시고, 헛된 것을 좇던 나의 눈이 주님의 길에 고정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탐욕을 좇던 데서 말씀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의 삶은 한 마디로 욕망을 좇은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삶의 모양은 여러 가지이지만 결국은 다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삶의 목적은 자신의 욕망의 성취를 통한 행복의 추구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삶의 목적이 그렇기 때문에 자고 깨면 생각하는 것이 그 욕망을 성취시키는데 필요한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입니다. 이를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뛰어 다닙니다. 재물이 없을 때는 재물을 얻기 위하여 뛰고, 조금 여유 있게 살게 되면 여가를 즐겁게 지내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혹은 좀더 품위 있는 삶을 추구하는데 그 시간을 모두 써버립니다.
이런 일반적인 삶에서 벗어나 좀더 의미 있는 삶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는 철학을 공부하기도 하고 남을 위한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삶에 근원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이며, 위로부터 오는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스스로 보람을 찾고 안정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삶은 결국 자기와 자기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자리, 더 나아가 세계와 전 우주적인 역사를 생각하는 데까지 그의 삶의 관심을 넓혀 나가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란 이 땅의 행복이고, 그것은 자기 욕망의 성취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에 결국 우리의 마음과 눈은 탐욕을 좇을 수밖에 없고, 우리의 눈은 헛된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의 삶은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즉 자신만을 위하여 살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대단히 큰 것입니다. 기껏해야 자기와 자기의 가족만을 생각하던 데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데로의 변화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되고 행복한 삶을 살까만 생각하던 내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벌레 같은 천한 존재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존재로 바뀌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나의 짧은 삶만을 생각하던 데서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생각할 줄 아는 자리까지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너무 크고 갑작스러운 것이기에 우리가 그 사실을 얼른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노예로 생활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곳을 탈출하여 나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자 그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거기에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대로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만 몰두하여야 함에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좇고 있고, 우리의 눈은 여전히 헛된 것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교회에 나오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의 욕망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극히 이기적인 것이어서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새 천년에 하나님께 '탐욕을 좇던 우리의 마음이 주의 말씀에 집중하게 하소서'라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의 문제에만 매어 달려 있던 데서 벗어나 이제는 주님의 역사와 그 세계를 바라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의 문제에 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이제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며, 신령한 은혜와 영적인 능력을 구하며,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성경을 펼치고 읽으며, 묵상하며, 그 말씀 속에 담긴 뜻을 찾아내어 그것을 내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펼치고 읽으면서 생각은 다른데 가 있기 쉬운데 내 마음이 주의 말씀에 집중되도록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지만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시키기 위한 훈련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펼치고 읽는 순간만은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기에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탐욕을 좇던 내 마음이 새 천년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르치소서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공부해야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까지 나갈 수 있을까요? 이 시인은 먼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언제까지든지 그것을 지키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만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책이기 때문에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 성경의 각각의 책들이 언제 쓰여졌으며, 누가 썼으며, 어떻게 보존되어 왔는지, 그리고 그 책들이 쓰여지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어떠했는지, 또 그 책의 문학형태는 어떤 것인지 등을 공부할 때 올바르게 그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그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의 우주관이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서를 읽기 위해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유다 나라의 역사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가지 복음서가 있는데 각각 쓰여진 상황과 그 책을 읽는 대상이 달랐는데, 그것을 알아야 그 복음서들의 기록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도 마찬가지로 그 편지를 보낸 교회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은 그 말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모른 채 성경을 읽는 것은 그 말씀을 잘못 해석하기 쉽고 문자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이런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간단한 주석과 이런 역사적 배경을 함께 담은 성경책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도움이 됩니다. 또 구약성서개론 혹은 신약성서개론 같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에 그런 책을 통해서 공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길은 교회에 함께 모여서 하는 성경공부 시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의 생활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할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수요성서연구 시간에 현재 마태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6월경 <케리그마>라는 새로운 교재로 성서연구반을 운영하게 될 것입니다.

깨닫게 하소서

다음으로 이 시인은 그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내가 주의 법을 살펴보면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지키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처음에 그 역사적 배경과 상황 그리고 문학적 구성 등을 공부하는 것은 그 본문에 담긴 메시지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 본문이 무슨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려고 하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 깊게 읽는 까닭은 그 본문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본문은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만 어떤 부분에서는 얼른 그 뜻을 알기 어려워서 한참 앞뒤를 읽고 그 말씀이 쓰여진 상황을 검토하면서 연구를 한 뒤에라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시편 23편 같은 경우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그것은 이해하기 쉽고 그 내용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같은 경우 여러 가지 복잡한 제사 제도와 율법들이 적혀 있어 우리가 얼른 그 레위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어떤 것은 쉽게 이해가 가는가 하면 어떤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가령 천국은 마치 밭에 심은 겨자씨와 같아서 싹이 나서 자라 나무가 되면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겨자씨가 천국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큰 나무가 천국이라는 것인지, 또 그 천국의 어떤 성격을 말씀하는 것인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복음서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탄생과 그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 않고는 제대로 그 메시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문이 바로 신학입니다. 목사는 바로 이런 신학을 공부하여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는 주로 성경 본문에 나타난 메시지를 바르게 찾아내고 해석하여 오늘의 상황에 맞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선포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목사들이 신학을 올바로 공부하여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 강단의 문제는 제대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목사들이 상당수 점령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성숙하기 위하여서는 신학교육의 질이 보다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항상 말씀을 상고하므로 설교가 제대로 된 설교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평신도들은 귀에 듣기 좋은 설교만을 선호하지, 그 설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를 않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자기 문제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역사 전체를 생각할 때에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며,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선포하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문자에 집착한 나머지 그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본래의 메시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하나님께로 향하기보다 자신에게 향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감동의 물결에 휩싸이게 만들 것입니다.

행하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이 시인은 주의 말씀의 길에 행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키셔서, 주의 계명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기쁨을 누릴 길은 이 길뿐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아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그것은 대체로 성경공부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의 최종적인 목적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의 계명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중요한 것은 실천 없는 깨달음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그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깨달은 말씀, 터득한 진리를 따라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결국 그 믿음은 헛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변화가 없는 것은 공부에서 배운 말씀대로 저들의 삶이 변화되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는 단순한 지식을 얻는데 그쳐서는 안되고 배운 진리를 자기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할 때 성경공부의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주제를 "말씀따라 이루는 새 천년"이라고 하였는데, 말씀따라 무엇을 이룬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따라 우리 삶의 변화를 이룩한다는 뜻입니다. 새 천년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며, 그 진리를 따라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의 말씀의 길에 행하게 하소서" ―이것이 금년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이 되시기 바랍니다. 욕망을 좇아 행하던 길에서 돌이켜 이제는 주의 말씀에 주목하면서 그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길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화려한 물질문명에 매혹되어 정신을 잃고 바라보던 데서 돌이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의 계명들에 주목하십시오. 그래서 그 말씀들이 이끄시는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문제에만 집착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지 못하였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이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역사를 통찰하면서 그 크신 역사와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면서 찬송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말씀따라 새 천년을 이룰 때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복이 우리의 삶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경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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