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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치 혀의 중요성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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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말(언어)에 중요성에 대해서 야고보 선생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치 혀의 중요성
지난 국민의 정부 시절 여권의 핵심 실세였던 한 인사는 “정치인이 조심해야 할 세가지”를 강조하면서 이 세 가지는 바로 “말조심, 돈 조심, 술 조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조심”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칼에는 두개의 날이 있지만 사람의 입에는 백 개의 날이 있는 것”처럼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정치인들의 세치 혀가 국민을 편안하게 할 수도 짜증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세치 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올드보이”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영화의 주인공 최민식씨는 이유도 모른 채 15년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지만 나중에 가서야 그 원인이 세치 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고등학교 때 했던 한 마디 말이 결국 어떤 사람을 죽음에 이르도록 했는데 주인공은 그 잘못을 알고서 스스로 혀를 잘라 용서를 구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치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 선생님도 세치 혀를 배의 키와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는 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작은 키입니다.
여러분 큰 불이 되어 많은 나무들을 태우는 것은 작은 불씨를 다스리지 못해서 결국 큰 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세치 혀를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의 배가 산으로 갈 수 있고, 또 우리의 모든 인생을 한순간에 다 태워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늘 혀를 잘 다스려야지 마음을 굳게 먹고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우리의 혀를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에서 야고보 선생님도 혀를 길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혀를 깨물고, 또 각고의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말의 실수를 합니다. 잘 안됩니다. 그래서 말의 실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훈련해도 잘 안됩니다. 그러나 또 말씀을 들으면서 각오하고 또 훈련하고 또 혀
를 다스려야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자주 듣는데 어떤 목사님이 이러한 예화를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이 얼마 전 지하철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인천행 전철을 타고 가는데 신도림 역쯤 왔을 때 어떤 아저씨가 가방을 들고 올라왔습니다. “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면서 아저씨는 좋은 물건을 하나 소개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프라스틱 머리에 솔이 달린 것을 가지고 와서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왔겠습니까? 팔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한개 200원씩 다섯 개가 한 세트입니다. 얼마이겠습니까? 천원입니다. 뒷면에 영어가 있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썼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했다는 뜻입니다. 수출 잘됐을까요? 망했습니다. 여기서 몇 개나 팔 수 있을 가요? 궁금하시죠? 나도 궁금합니다. 잠시 후 알려 드리겠습니다.”하면 칫솔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4개 팔았습니다. 아저씨가 다시 말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4천원 벌었습니다. 내가 실망했을까요? 예 실망했습니다. 내가 그렇다고 포기하겠습니까? 다음 칸 갑니다.” 그리곤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노력하려고 해도 우리의 혀를 완전히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칸에서는 더 잘 팔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리를 옮긴 아저씨처럼 우리가 말씀을 듣고 또 도전하면 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 말은 인격입니다.
저는 제 아들 진성이에게 늘 말합니다. “아들아 말은 인격이란다.” 그렇습니다. 말은 인격입니다.
여러분 “말”을 늘려 발음하면 “마~알”이 됩니다.
“마알”이란 마음의 알갱이란 뜻인데 결국 마음의 알갱이들이 나타는 것이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하는 말을 통해서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일수록 허풍쟁이들이 많고, 수다를 잘 떠는 사람은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고, 또 험하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단순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저의 설교에 대해서 저희 누님이 권면해 주시더라고요. “설교는 참 좋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가끔 설교 속에 단어를 너무 저급하고 유치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단어를 들으면 왠지 목사님이 가벼워 보이고 설교의 무게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늘 설교하면서 언어 사용에 신경을 좀 씁니다. 물론 언어 사용을 고급스럽게 사용했다고 인격이 고명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가 한 샘에서 두 샘물이 나올 수 없듯이 단물이니까 단물을 내고, 쓴물이니까 쓴물을 내듯이 인격에 따라 사람들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은 곧 인격이다.” 명심해야 될 줄 믿습니다.

말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옛날에는 “개 조심”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차 조심해라”라는 말을 자녀들에게 자주합니다. 그런데 “말조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 한마디에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인생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수요일 마다 신명기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왜 40년을 광야에서 지내야만 했습니까? 그들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씨앗이 되어서 결국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받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7-28)

그들이 입술로 “우리가 못 들어가리라”라고 부정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 혀의 권세대로 못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수 있다고 고백하므로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말로인하여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지혜의 성경 잠언에 말에 많은 말씀이 있는데 그중에 잠언 18장 21절의 말씀을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운명을 탓하기 전에 먼저 말부터 고쳐야 합니다.
사람은 말하는 순간에 이미 자기최면에 빠져 신념화 되어 태도부터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태도는 습관을 습관은 결국 인생을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여러분 말하지 전에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말합니다. 때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한번 더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싸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실된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조리 있게 말을 해도 진실이 없는 말은 이미 죽은 언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천 마디 생명 없는 말보다도 진실한 한 마디가 훨씬 큰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이는 말보다는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을 보시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약 3:9)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또한 같은 입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하는 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두 신하에게 한 가지씩 중요한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과 가장 선한 것을 찾아서 가져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두 신하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닌 후에 상자 하나씩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먼저 가장 좋은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은 신하의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다름 아닌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어서 가장 악한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은 신하의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도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왕 앞에서 두 신하는 혀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또는 가장 악한 것이라고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두 신하의 이야기를 다 들어본 왕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사람의 혀요, 가장 선한 것도 역시 사람의 혀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혀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도, 가장 악한 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을 욕하고 비방하고 헐뜯는 부정적인 언어를 말한다면 혀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형제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언어를 말한다면 혀는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0장 4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여러분 학자의 혀를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왜요? 학자 같은 지혜로운 말로 어려운 사람을 격려하고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정다운 말 한 마디로 연약한 지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복된 입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축복의 그 한마디가 축복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한마디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은 인격입니다. 말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한번 더 생각하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진실된 말을 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찬양하는 혀가 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이 덕 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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