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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연구 2] : 누가 이웃인가? (눅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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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비유

얼마 전 포항에 있는 선린병원에 설교할 일이 있어 갔다가 병원 명패를 보니 병원 이름이 영어로 ‘Good Samaritan Hospital’이었습니다. 그제야 ‘선린’(善隣)이라는 병원이름이 ‘착한 이웃,’ 즉 선한 사마리아인을 뜻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4복음서 가운데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신약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널리 알려진 제목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지난 주 ‘씨 뿌려진 땅의 비유’처럼 제목이 잘 못된 것은 아닙니다. 분명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워낙 이 비유를 많이 듣다보니 ‘사마리아 사람’ 하면 자동적으로 ‘선한’이라는 말이 떠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이 당시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니, 당혹스러울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질문을 던진 율법사와 비유를 듣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케이오 펀치를 한 방 날린 셈입니다. 당시 이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은 정말 뒷골이 띵하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토록 충격적이었을까? 지금부터 차근차근 그 까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오늘 이야기는 한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25절). ‘율법사’란 유대교의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전문가인데 그가 제자와 무리들 사이에 섞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은 그냥 ‘질문했다’고 하지 않고 ‘예수를 시험(test)하여’라고 표현합니다. 이 율법사가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라는 사람이 말씀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래 무슨 소리 하나 전문가 입장에서 들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왔던 것입니다. 혹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조사관 자격으로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혹시 율법을 잘 못 해석하거나 수상한 소리를 하면 즉각 한 방 먹일 태세를 하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테스트하는 질문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25절을 보면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얼핏 보면 나도 영생을 얻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어있는 좋은 질문 같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 속에는 이 율법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입니다. 이 율법사는 율법에 정통한 전문가답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즉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업적을 쌓아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영생은 무엇을 행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인데 이 율법사는 율법학자답게 율법적인 사고로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주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당연히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응, 영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해야 받을 수 있어”라고 명쾌하게 대답을 해줘야 마땅할 텐데 주님은 되려 율법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26절을 보세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 주님은 이 사람이 율법 전문가임을 아셨고 이 사람이 자신을 테스트하려는 의도도 이미 아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종종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율법사들이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매우 어렵고 곤란한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주님은 역으로 그들에게 더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 보기 좋게 되받아치곤 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질문을 한 율법사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데 이것은 율법사가 자신이 율법을 제일 잘 아는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점을 역으로 찌른 것입니다. “좋다, 그러면 너는 율법 전문가니까 율법에는 뭐라고 써있냐? 너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배웠고 읽었느냐?” 그러자 율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거야 제 전문이지요. 율법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레 19:18).” 구약에 보면 수백 수천 개의 율법조항이 나오는데 이 방대한 조항을 딱 열 개로 요약해 놓은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또 이 십계명도 전반부의 4개의 계명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요, 후반부의 여섯 개는 나와 이웃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므로 이 십계명 또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 전문가인 이 율법사가 이 정도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보란 듯이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고 이웃을 진짜 사랑하는 것이 영생 얻는 방법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얼마나 간단한 대답입니까? 그러나 이 너무나도 간단해 보이는 대답에서 주님은 너무도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너 참 잘 아는구나! 하지만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는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가 뭡니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율법학자들이 몰라서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의 전문가로서 율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자기 지위를 지키는 데만 급급해서 외식하는 자가 되고, 오히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 뜻을 어기고, 이웃을 고통스럽게 옥죄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이 율법사를 향해 날카롭게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너 참 잘 아는구나. 그런데 이 사람아 왜 아는 대로 실천을 안 하는 거냐?” 참으로 간단한 말이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 같은 지적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율법사 좀 보십시오. 주님의 그 지적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또 한 번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율법사는 정말 구제불능입니다. 전형적인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주님의 참 뜻은 알아듣지 못하고 되려 자기만 자꾸 나타내고 과시하려 듭니다. 지금 율법 전문가로서 자신 있게 예수님을 테스트해보려고 했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지면서 오히려 주님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 같으니까 이제 이 두 계명 중 이웃이라는 주제로 슬며시 대화 주제를 바꾸면서 다시 주도권을 빼앗아 보려는 것입니다. 흔히 교만하고 언제나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야만 주인공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율법사의 이런 의도를 성경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이 율법사가 지금 누가 자기 이웃인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사는 이미 자기가 답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께 물은 것입니다. 왜 학교에서 잘난 체 하는 아이들 보면 자기가 답을 아는 질문을 선생님에게 하지 않습니까? 정말 닭살 돋는 아이들이지요. 지금 이 율법사가 이 닭살 돋는 행동을 하고 있는데 이 질문 속에는 사실 우리말 성경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이 질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율법사의 질문에서 사용된 ‘이웃’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플레시온’인데 이 단어는 그냥 평범한 이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 말은 매우 좁은 의미에서 나의 ‘동족,’ 즉 유대인, 혹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정치․종교적 동지’ 등을 뜻하는 낱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에 의하면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 혹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나와 뜻이 다른 사람은 당연히 내 이웃이 아닙니다. 아무나 다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배타적인 뜻이 숨어있는 낱말이지요. 그러니 지금 이 율법사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하고 질문할 때는 이미 자기 스스로 답을 가지고 물은 것이라고 했는데 그 답은 이것입니다. “그야 당연히 같은 유대인, 같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만 내 이웃이 될 수 있지!” 이 대답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주님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 모두가 다 동의하는 대답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이 비유가 정말 충격적이라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만, 유대교를 믿는 사람만 내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율법사와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폭탄과 같은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 폭탄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 선한 사마리아인이 진짜 이웃이다!” 이 말씀이 충격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방금 말씀 드린 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방인은 내 이웃이 될 수 없다는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율법사, 제자들,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만, 유대교 신자만 네 이웃이라고? 웃기지 마라. 진짜 이웃은 사마리아인이다.”

둘째는 좀 더 충격적인 뜻입니다. “이방인 혹은 너희가 그토록 멸시하는 사마리아인도 얼마든지 좋은(선한) 이웃이 될 수 있다.” 한술 더 떠서 주님은 37절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너도 사마리아인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마리아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유대인이 볼 때 사마리아인은 절대 내 이웃이 될 수 없을뿐더러 더욱이 ‘선하거나 좋은’ 이웃은 절대 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나아가 사마리아인을 본받는다는 것은 정말 얼토당토않은 소리입니다. 사마리아인이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뒤 북 왕국 땅에 이주해온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입니다. 따라서 선민의식이 강하고 지극히 배타적인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을 경멸하며 개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사마리아인이 내 이웃이 될 수 있고, 어떻게 선할 수 있고, 어떻게 그들을 본받으라는 말입니까?

자비를 베푼 자이니이다

이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들어가 봅시다. 이 비유는 우리가 워낙 잘 아는 이야기라 내용을 되풀이해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비유에 보면 몇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한번 정리해 봅시다. 중요한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 같은 부류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강도 만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로 현재 어려움을 당하고 있고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강도는 어떤 부류입니까? 30절에 보면 이 강도들은 이 사람이 가진 것을 다 빼앗고 옷까지 벗긴 후에 때려 거의 죽게 만듭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진짜 죽이려고 했나 봅니다. 오늘날도 돈을 위해서라면, 내 생계나 출세를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남을 짓밟는 강도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와는 다른 경우지만 여관주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의 돈을 받고 환자를 돌보아 줍니다. 잘 못 한 일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강도처럼 죄를 짓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내 이익은 확실하게 챙긴 사람입니다. 받은 만큼 해주고 절대 손해 볼 일은 안 합니다. 강도나 여관주인은 행동은 달랐지만 돈 중심적인 사람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의무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제사장 의무기간에는 집에 못 가니 가족도 빨리 보고 싶고 빨리 집에 돌아가 쉬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삐 여리고로 가다가 이 장면을 보고 그 자리를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사건이 일어난 반대편 길로 피해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왜일까요? 어떤 분들은 자기도 강도떼를 만날까봐 겁나서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었다고 판단하여 율법에서 제사장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진다는 규정(레 21:1~3) 때문에 다가가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이 사람의 생사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고 피해간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도 아닌 모든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종교지도자인 제사장이기 때문에 더 책임이 큽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들은 직접 남을 해친 것이 아니므로 죄가 없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나쁜 짓도 안 했고 남에게 피해도 안 줬다”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은 남을 돕거나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귀찮은 일, 복잡한 일은 ‘피해’ 지나갑니다. 요즈음 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이런 내용의 플래카드를 종종 봅니다. “몇 월 며칠 어디서 난 교통사고의 목격자를 찾습니다. 증인이 되어주는 분에게는 후하게 사례합니다.” 그러나 그 플래카드는 꽤 오랫동안 붙어 있습니다. 목격자가 없어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목격을 하고도 증인을 안 서주는 사람이 많아서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증인이 되면 경찰서에서 시도 때도 없이 와라 가라 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혹 내 증언으로 불이익을 당할 사람의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어쩌면 너무 바쁜 비즈니스가 있어서, 빨리 출근해야 되어서, 아니면 예배 시간에 늦어서 그냥 ‘지나’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증인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할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어찌 이렇게 ‘피해’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귀찮고 힘들어 피해 가는 분들의 모습은 마치 사건의 현장을 피해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연상케 합니다. 과연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하실까요? 여러분, 죄라는 것은 말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도 죄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도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인이나 도적질처럼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만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귀찮아서, 힘들어서, 손해 볼까봐 안 하는 것도 이에 못지않은 큰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류는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온갖 차별과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자연히 그 마음속에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증오심이나 어떤 편견도 없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해줍니다. 게다가 본문에서 그는 여행 중이었다고 말하지만 하는 행동을 볼 때 일반적인 관광이 아니라 직업적인 여행, 즉 비즈니스 여행 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쁜 사람입니다. 시간은 금이요 강도나 여관주인 못지않게 이 사람에게 돈이 참 소중합니다. 그런데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응급조처를 한 후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 이 환자를 돌보다가 떠나갈 때도 거의 2주간의 숙박비에 해당되는 두 데나리온이라는 큰돈을 맡기고 갑니다. 시간을 희생하고, 돈을 희생하고, 나귀와 기름과 포도주를 희생하고, 온갖 정성과 관심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자, 이쯤 되면 답은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마친 주님이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의 되겠느냐?” 그러면 율법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당연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37절에 보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절대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운 선한 이웃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 할 수 없어서, 차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이렇게 빙 둘러 대답한 것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 ‘한심하도록 완고한’ 율법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역시 짤막한 말씀이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씀입니다.

우선 이 말은 “너도 이 사마리아인처럼 좋은 이웃이 되라”는 뜻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이웃사랑, 지식으로만 율법으로만 끝나는 이웃사랑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임을 가르친 것입니다.

둘째로 이 말은 “너도 사마리아인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말은 유대인이며 스스로 율법의 전문가라 자부한 율법사에게 대단히 자존심 상하고 충격적인 말입니다. 게다가 앞서도 말한 것처럼 율법사는 이미 내 이웃이 누구라고 규정하고 물은 것인데, 내 이웃은 당시 모든 유대인이 생각했듯이 오직 유대인 동족이나 같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만 이웃이 될 수 있는데 어떻게 주님은 이 사마리아인을 이웃이라고 하며 한 술 더 떠서 이 천한 사마리아인을 본받으라고까지 말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이런 생각을 하는 율법사와 제자들과 유대인 모두에게 한 방 날리십니다. “너희는 이웃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동족?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너희와 친한 사람들? 아니다. 혈통이나 종교나 친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꺼이 나의 소중한 것을 내놓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다”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율법사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의도로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애초에 율법사는 주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의 자격조건을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누가 내 이웃이 될 만하다고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찾기보다 네가 먼저 적극적으로 남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명령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가 아닌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까지가 내 이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와 친한 사람?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사람이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내 이웃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은 ‘No’라고 말할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적어도 이 정도 자격은 갖춰야 내 이웃이라고 할 수 있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우리가 “이런 사람은 절대 내 이웃이 아니야,” “나는 이런 사람과 상종 안 해,” 심지어 “나는 온 인류를 다 사랑하지만 이 아무개만은 사랑할 수 없어”(교회 안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라고 말할 때,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선입견이나 편견,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온 인류를 다 사랑하기는 쉬워도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기보다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나’라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 뿐 아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도 ‘사람’ 중심, ‘생명’ 중심 아닌 ‘비즈니스’ 중심, ‘돈’ 중심, ‘나’ 중심적 사고가 팽배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 비유에 등장하는 율법사나 제사장, 레위인, 여관주인, 심지어 강도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충격적인 교훈을 주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선입견이나 고집이나 편견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선입견과 편견과 고집을 다 넘어서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표가 무엇입니까? 모든 바쁜 일들과 큰 물질을 희생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한 생명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고 돕는 일입니다. 폭넓고도 또한 지극히 구체적인 이웃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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