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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휴식 (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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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휴가를 떠나시는 분들이 꽤 많이 계신 듯싶습니다. 학생 성도들은 방학을 맞이하여 한국을 방문한다든지, 아니며 미국 내에 다른 곳에 계신 부모님이나 친지들을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조만간 휴가를 떠나시려고 계획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귀한 휴식의 기간을 보내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이 쉰다는 의미의 “휴식”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생각해 봄으로 우리의 쉼의 의미와 자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휴식을 잘못 보냄으로 진정한 휴식의 의미와 맛을 빼앗기게 되면, 휴식을 통한 귀한 유익을 놓쳐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나는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그래서 또 일하는 것의 의미와 보람도 느낀다. 하지만, 쉰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그래서 쉬고 나서도 ‘정말 보람되게 잘 쉬었다’는 기분을 가진 적이 별로 없다.” 상당히 공감이 가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쉰다는 것에 대한 성서적인 이해를 먼저 간직하고, 우리의 휴식을 거기에 준하도록 한다면, 쉰다는 의미를 바르게 발견하고, 그래서 진정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간직할 수 있게 되리라고 봅니다.

이러한 휴식에 대해서 살펴봄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창조와 안식의 관계입니다. 창조는 일하며 노동하는 시간이라면, 안식은 문자 그대로 일을 마치고 쉬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종교 특히 고대 바벨론의 신화에 보면, 구약 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의 신이 천지를 창조한 신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또 불교에서도 구약 성경에서와 비슷한 창조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일반 종교에서도 대부분 자기들의 신을 “창조의 신이다”,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창조의 신이 아니라면 믿을 가치가 없다고 흔히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강조하지만, 자기들의 신이 “쉬셨다”, 즉 신의 안식에 대해 강조하는 종교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들의 신이 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신화도 있습니다. 고대 바벨론의 신화에서는 신들이 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 신화의 목적은 “신들이 쉬고 있는 동안에, 인간들은 뼈 빠지게 일하는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안식”, 즉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안식의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쉬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만물더러 “모두들 다 쉬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아주 독특한 모습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고대 바벨론의 창조신의 이야기를 보면, 창조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창조에 가담했던 수많은 신들이 그들의 최고의 신인 마르둑(Marduk)이라는 신의 50가지 훌륭한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창조 사건이 끝난 다음,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휴식의 내용을 특별히 구별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창조 기사에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안식의 문제가 독립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귀중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안식은 이미 천지 창조가 끝난 다음에, 있어진 또 하나의 사건으로서 이 창조의 완성과 하나님의 휴식은 각각 독립된 하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어느 한 편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성을 유지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안식에 대해서 중요하고 의미를 두어야 하는 이유는 창 2:3에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1) 복되게 하셨고, (2) 거룩하게 하셨고, (3) 하나님 당신 스스로가 안식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에 대해 복이란 가치를 선사하셨고, 거룩하게 구별하심으로 의미를 부여해 주셨으며, 하나님 스스로 쉬심으로 안식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쉼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으며, 거룩한 존재로 구별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을 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그 하나님께서 친히 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휴식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1. 하나님은 안식일에 복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힘써 만드신 모든 창조물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제 7일에 또한 복을 주셔서 온전히 하나님의 복 가운데 우리 인간이 거하도록 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일하는 동안 뿐 아니라, 쉬는 것까지도 복에 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하는 데에는 가치를 부여하지만, 쉬는 데에는 그러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쉬는 것을 오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할 때보다도 휴식할 때 타락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휴식을 하나님께서 쉬신 모습으로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쉬신 것처럼 우리도 쉰다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모든 노동과 자연과 그리고 모든 날들의 일들에 담겨진 복을 정녕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 이 쉰다는 것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쉰다는 하나님의 복을 등한시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쉰다는 것 또한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쉰다는 사실을, 하루를 특별히 정하여 만드시고, 이 날을 하나님께서 복 주셨다는 의미에서, 이날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모든 것의 절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휴식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흔히들 휴식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람은 계속해서 일할 수 없으므로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휴식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고, 단지 새로운 노동을 하기위한 힘을 얻기 위한, 즉 새로운 활력을 얻어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휴식에 대한 이해는 고대 그리스(Greece)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라는 사람이 생각해 낸 휴식의 개념입니다. 즉, 헬라 사상에서의 휴식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휴식에 대한 이해는 우리 성경에서 말하는 휴식에 대한 이해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수고로부터 벗어나 사람의 기진한 힘을 회복시켜 앞으로 해야 할 노동을 위해 힘을 축적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안식일은 생명을 위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엿새 동안의 평일을 위해 있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엿새 동안의 평일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생활 가운데 잠시 쉬는 막간이 아니라, 생활의 절정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함으로 얻은 복에 대한 복의 날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서에서 제시하는 휴식에 대한 기본적 이해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을 구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아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의미와 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에게 복을 주시고 또 안식일에도 복을 주셨지만, 거룩하게 하신 것은 모든 창조물에게도 해 주신 것이 아니라, 특별히 안식일에만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시간은 6일 동안의 일하는 창조와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쉬는 안식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고적으로 이 “안식일” 말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출 19:1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나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이란 다른 창조의 시간, 곧 일하는 엿새와는 달리 거룩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안식일을 가리켜 “시간 속의 지성소”라고 표현합니다. 지성소(Holy of Holies)란 성전의 한 구석에 있는 곳입니다. 성전이란 말 자체가 거룩한 장소라는 뜻인데, 이 지성소는 이러한 거룩한 성전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단 한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이유는 이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다는 표시인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 있는 가장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도 마치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안식일을 이스라엘의 신부로 묘사하면서 안식일을 맞이하는 것을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즉, 안식일은 신부요 사람은 신랑으로, 휴식이란 신부와 더불어 갖는 신랑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신부로 묘사하는 것은 안식일이라는 그러한 시간이라는 의미보다는, 안식일이라는 그 시간 속에 담긴 휴식이라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안식일이란 시간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휴식이란, 공간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허비하며 오염시키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만나는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은 거룩한 날인 것입니다. 이 거룩한 날을 오늘날 사람들은 쉬지 않음으로, 또 쉰다 해도 잘못 쉬는 모습으로 이러한 거룩함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는 노동의 시간보다 쉬는 시간, 즉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쉬어야 할 시간에 노동을 중지하고 쉬지 않으면 그것은 안식의 시간을 오염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에 대한 위반은 극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출 31: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을 더럽힌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겨지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의 정신을 바르게 간직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대해 가르치신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막 2:27).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의 말씀에 위배되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중요성에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에 대해서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금할 정도로 안식일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대해 민감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보고, 이는 안식일에 금한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바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28). 이러한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과 자세는 안식일의 정신을 바르고, 더욱 분명히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몸소 쉬셨습니다.
우리에게 쉬라고 명령하신 분이 친히 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과 함께 쉬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안식에 대한 두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쉬어도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처럼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논다는 것입니다. 논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즐겁게 먹고 마시는 자리는 잔치자리입니다. 이러한 잔치를 꿈꾸다가 생긴 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란 본래는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잔치가 제사로, 이 제사가 발전하여 오늘날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뿐 아니라, 우리 서로끼리 친한 교제, 즉 친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친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회를 “가르칠 교”자를 쓰는 교회(敎會)라고 하지 말고, “교제할 교”자를 쓰는 교회(交會)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람들은 과도한 경쟁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탐심과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쉼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휴식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또 쉼을 오용하여 쉼을 더럽히는 경우를 봅니다. 휴식이란 거룩하고 복되게 구별된 시간 속에서 찾아지는 것인데, 단지 쉰다는 명목 하에 장소만을 바꿈으로 휴식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뀌어진 장소 곧 향락의 자리에서 맞이하는 휴식은 휴식이 아니라, 허무함과 더불어 우리의 생명을 소모하는 노동이며, 따라서 오히려 우리의 안식을 앗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종류의 휴식을 “휴식”이라 하지 않고 “노는 일”, 혹은 “쉬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쉼에 참여하는 그러한 쉼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쉼으로 엿새 동안의 노동에 대한 보람을 갖는 시간으로 맞이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이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의 관계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새롭게 정립하는 시간으로 간직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안식일을 엄하게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경제활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랍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최대의 우상인 돈으로부터의 독립을 다짐하며, 사람이 돈의 노예가 아니라는 인간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 주었다.” 이 말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자 한 그러한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면서도 유대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잃지 않고 잘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진정한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참된 쉼을 이 날을 통해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닐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쉬는 쉼의 모습이요, 자세인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노 강 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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