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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우리가 은총을 받고 은총을 베푸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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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로서 가정사역을 활발하게 하시는 정태기 목사님께서 미국에 있을 때 소록도에 관한 기사를 읽고 한국에 돌아오자 소록도를 방문하였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은 뒷사람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답니다. 아주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큰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대유?”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고 쳐다보았더니 눈 한 쪽이 없고 두 손은 없어져 팔뚝만 남았고 입도 정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대유”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정 목사님은 그의 기도 모습에 가슴이 북받쳐 그 사람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울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몽둥이가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 같았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사람의 팔이 그를 깨우고 있었답니다. “예배 끝났시유.”교회 안에는 자신과 그 사람뿐이었답니다. 그에게 물었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그런 기도를 드립니까?” 문둥병이 들자 처자식도 형제도 다 자신을 버렸지만 오직 주님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으니 이처럼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냐고 대답했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란 받은 자에게 이렇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보상이지 은총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은총이라는 말이 1. 3. 7절에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총 "헤세드"는 "친절, 자비"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출 19:5, 6)대로 택한 백성에게 부어 주시는 무조건적인 풍성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신약의 아가페와 같은 말입니다. 사극을 보면 무수리가 어느날 왕의 총애를 입어 왕비가 됩니다. 이것을 성총이라고 합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택하여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자녀로서의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은총을 입었습니다. 사울의 손자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도망자가 되어 죽은 개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날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까?

1. 하나님은 고난의 끝에서도 새로운 시작으로 역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성경에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8절에 보면 자신의 인생을 죽은 개같은 인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의식이 비참합니까? 그의 인생은 그의 표현처럼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스라엘 왕 사울입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던 요나단입니다. 그 가정에서 왕통을 이을 외아들 사울의 손자로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귀염받고 얼마나 호강을 하며 살았겠습니까? 왕가의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이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의 사고가 미리 경고장을 보내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블레셋과 전쟁에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두 삼촌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길보아 전투에서 아버지 요나단과 할아버지 사울 두 삼촌이 처참하게 전사해 버렸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입니다. 패전하였으므로 적이 진격해 들어오면 왕실의 혈족은 다 잡아 죽일 것입니다. 유모는 이것을 알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안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도망하다 그만 아이들 떨어뜨려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신체적 기능을 상실한 불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몸만 장애인이 된 것이 아니라 마음마저 철저히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실감으로 절망했을 것입니다. 권력도, 물질도, 건강도, 사랑도, 부모도, 집도 한 순간에 잃어 버렸습니다. 크게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못하였고 시체마저 보지 못했고 장사마저 치르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살았겠습니까? 이제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숨어삽니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습니다. 신분이 노출되면 죽습니다. 사람을 기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도 바꾸었습니다. 본래의 이름은 므립바알입니다.(대상 8:34) 아이들을 앉은뱅이라고 놀려댔을 것입니다. 자폐적 기질, 대인 기피증, 상실감, 무력감으로 인생의 긴터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아마 요나단을 닮아 얼굴이 잘 생겼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여 미가라는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이것 역시 기쁨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적인 삶입니다. 아들이 있다는 자체가 부담이 될 것입니다. 희망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베풀어주었습니다. 1, 3, 7절을 보십시오.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하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어느날 사울의 종 시바를 불러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끝에서도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고난의 깊은 늪에 있을 때 한 없는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한 번 은총을 베풀어주시면 인생은 역전이 됩니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나오미가 인생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제 외아들과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고 죽을 계획을 세우고 있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니까 가뭄이 끝나도록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3년의 긴터널을 통과하고 마지막 2년 감옥에서 칠흑같은 어둠에 갇혀있는 요셉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어서 인생을 역전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년의 긴 늪에 갇혀있는 모세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어 민족의 지도자로 인생을 역전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장사의 아들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 아브라함을 불러 은총을 베풀어줌으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인생을 역전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만의 음모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모르드개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어 절망의 절정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여 주었습니다.

이 시간 깊은 상실감에서 절망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분은 없습니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패배감에 가슴아파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질병으로 인해 죽음의 두려움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력감에 살아가시는 분은 없습니까? 가정 환경으로 인해 건강한 자존심을 다 잃어버리고 개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도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절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믿음이 생깁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성령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만나면 소망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38년된 병자도 절망의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니까 역전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외아들이 죽고 인생이 다 끝났다고 절망하며 나가는 장례 행렬이 예수님의 은총을 입으니까 축제의 행렬로 변화되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모든 것을 허비하고 다 끝났다고 생각한 여인도 예수님 만나 은총을 받으니까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나니까 예수님의 은총을 받으니까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으니까 인생이 달라져 담대하게 예수님을 구주로 전하며 살았습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다 끝났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새 일을 시작합니다.

역경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대개 네가지 유형으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체념형'입니다. 둘째는 역경을 피해 가는 '도피형'입니다. 셋째는 핑계형입니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역경에 당당히 맞서는 '은혜형'입니다. 은총의 때를 기다리며 돌파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

2. 하나님은 남은 것을 통해 다 잃어버린 것 되돌려 주시는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므비보셋은 다 잃어 버렸습니다. 두다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권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부을 잃어 버렸습니다. 부모를 잃어 버렸습니다. 명예를 잃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린 상실감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직 잃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시종 시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가의 남은 사람을 찾았을 때 그가 죽었다면 그는 은총을 받을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울 왕가의 신분은 그래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잃어버린 것 도로 주겠다고 합니다. 도로 주는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훼시브'라는 말은 원래 위치로 되돌아오는 것, 원상복구를 뜻하는 말입니다. 원상복구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므비보셋이 받은 회복의 은총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정신적인 회복의 은총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므비보셋을 만나자 말자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입니다. 왕위에 오르면 일단 정적(政敵)과 그 일가 친족들을 모조리 진멸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일반적 관례입니다. 언제 잡혀 처형될지 모르는 공포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예전에 누렸던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 마음의 평안이 회복됩니다. 무서운 것이 살아집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천국에 갑니다. 고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의 용광로를 통해 훈련시키고 있는 것을 압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의 풍요를 잃어 버린분 계십니까? 두려움의 늪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신분회복의 은총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고 말씀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절뚝발이입니다. 그는 망한 왕가의 후손입니다.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건을 보지 않고 왕자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 완전히 신분이 회복됩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됩니다. 이제는 죽은 개같은 인생이 아닙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 우리의 신분은 완전히 회복이 됩니다.

셋째는 물질적 회복의 은총입니다. 므비보셋은 모든 물질을 다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주시니까 물질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하였습니다. 말로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9절 이하를 보십시오. 다윗은 사울과 그 온 집에 속한 재산을 다 므비보셋에게 주고, 사울의 종 시바로 하여금 다시 관리하도록 명하였습니다(삼하 9:9-10). 잃어 버린 재산을 다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주면 물질의 풍요도 누릴 수 있습니다.

넷째는 권위를 회복해 주신 은총입니다. 그는 모든 권위를 잃어 버리고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주니까 이제는 모든 종들이 그에게 수종을 들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종 시바를 위시하여 그의 아들 15명, 그리고 시바 밑에서 수종드는 자 20명을 본 주인 므비보셋에게 돌려주었습니다(삼하 9:9-11).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 권위가 회복됩니다.
잃어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주시면 신분의 회복도, 정신적 회복도, 물질의 회복도, 권위의 회복도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니까 욥이 잃어 버렸던 것 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허천 국회의원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강원도 도의원(11년) 도의장(4년) 제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장로님입니다. 장로님은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성공한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춘천에서 제법 다복한 가정의 맏이로 태어났지만 6·25 전쟁은 풍비박산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제외하곤 아버지와 누이까지 모두 빼앗아갔고 피난을 떠난 동생 둘도 세상을 떠났답니다. 추위와 배고픔, 뭐하나 변변한 게 없는 궁핍한 생활. 어머니 화전을 일구며 살았답니다. 그런데 4h 활동을 하다가 미국의 한 평범한 집배원의 집에서 1년 남짓 생활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주일만 되면 온 가족이 교회에서 찬양하는 단란한 집배원 가정을 보면서 그 가정이 꿈꾸는 가족모델이 되었답니다. 귀국하면 교회에 나가리라 마음먹었지만 나가지 못했고 서른 네 살 믿는 아내를 맞이했답니다. 그러나 세상 일에 취해 신앙생활은 하지 못하고 술과 함께 살았답니다. 79년부터 아내의 손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교회에 출석했지만 거듭난 기독인보다는 세상의 성공주의자를 추구했답니다. 그럴수록 아내는 기도의 불을 지폈는데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두컴컴한 길을 재촉, 40분거리의 적막한 산길을 걸어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답니다. 아내는 과일장사다 옷장사를 하며 기도했지만 어머니와 자신은 소주로 연명했답니다. “민이 아빠,우리 기도원에 가요. 살 길은 하나님밖에 없잖아요. 민이 아빠, 함께 기도해요.”형식적인 신앙인으로 살았는데 아내의 금식기도로 술에서 해방되었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우반신마비가 되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는데 5일 동안 금식하며 주야로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여 신비하게도 어머니와 자신이 완전히 술에서 해방되었답니다. 아내는 질병에서 치유받고 어머니는 지금은 권사가 되었답니다. 자복 회개하고 성령세례를 받게 되자 근심 낙담 방황이란 단어는 더 이상 내게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감사가 습관화됐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변했고 얼굴은 언제나 싱글벙글했답니다. 성경공부가 재미가 있고 새벽기도 용사가 되었답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기도를 거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은 나이 60에 국회에 파송된 선교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은총을 베풀어주는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개구리가 되면 올챙이 시절을 잃어버립니다. 은혜는 물에 세기고 원수는 돌에 세깁니다. 한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답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돈을 놓고 그 결과를 관찰한 것입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갔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집 앞에 돈을 놓고 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둘째 주쯤 되자 현관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셋째 주쯤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이상해 하지 않았고 넷째 주가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갔습니다. 실험기간인 한 달이 지나자 학자는 돈을 집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며 "왜 오늘은 안 주고 가느냐?"고 따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베풀었던 은총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하고 불쾌해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실 때 누구를 통해 은총을 베풀어주었습니까? 다윗이라는 사람을 통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시바라는 시종을 통해 은총을 베풀어 줍니다. 만약 시바가 없었다면 므비보셋이 하나님께서 다윗 통한 은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다윗처럼 혹은 시바처럼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까지 다윗이 죽은 개같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까?

첫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니 은총을 베푼 것입니다.(3)
3절에 보십시오. 다윗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베풀고자 하는 은총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그같은 은총을 사울 가의 후손에게 베풀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베푸는 은총이 자신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지금 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왕이 되었겠습니까? 아버지도 그가 왕이 되리라고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목동입니다. 자신도 한 때 미친 개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주어 왕이 되게 하고 주변국을 차례로 정복하게 하고(삼하8:1-14) 대내적으로는 행정조직을 정비하게하여(삼하8:15-18) 강력한 통일 왕국의 왕이 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였습니다. 자신이 은총을 받았으니 이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이 은총을 베풀 줄 압니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아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잘 용서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도 이 은총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이 은총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자신이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으니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1).
1절을 읽어보십시오.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말합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사울왕의 아들이며 장차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요나단은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면 그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요다단의 은총을 잊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은총은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기지만 다윗은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총은 돌에 새겼습니다. 다윗의 은총을 베풀고자하는 은총의식이 얼마나 확고한가를 보십시오. 자신이 은총을 받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향하여 '베풀리라'(삼하 9:1), '베풀고자'(삼하 9:3), '베풀리라'(삼하 9:7), '도로 주겠고'(삼하 9:7), '주었노니'(삼하 9:9),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 9:7, 11, 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은총의 통로로 살아야가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전달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이요,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오.” 그 다음 예수님은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받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 갔오.”“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이오.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오.” 예수님은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과 매질을 하는 것을 봅니다.“여보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오.”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소.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구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이 아니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소.”은총을 잃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창녀에게서 구원받고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치유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보답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스텐포드 대학에 다니던 두 학생이 학자금 때문에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파데레브스키(Paderewski)를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등록금을 해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파데레브스키에게 공연료로 2000$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연주회에서는 예상과 달리 총수익금이 1600$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400$이나 적자가 났습니다. 이들은 연주회 수익금 1600$ 전부와, 나머지 400$은 앞으로 갚겠다는 서류를 만들어 파데레브스키에게 보냈습니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음악가는 가난한 학생들로부터 받은 1600$을 되돌려주면서 저들을 격려하고 학비에 보태 쓰라고 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파데레브스키는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전 유럽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폴란드 대통령 파데레브스키는 미국에 식량원조를 요청하기로 결심하고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식량원조 요청서가 미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미국으로부터 뜻밖의 많은 식량이 폴란드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파데레브스키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후버(Herbert Hoover; 미국 31대 대통령)를 찾아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후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식량이 필요한 것 같아 보내드렸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렵게 대학에 다니던 시절, 당신은 제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정말 곤경에 처해 있었거든요."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폴란드의 대통령이 되어 있는 자신을 청하여 연주회를 열고, 그 수익금으로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고자 했던 오래 전의 그 두 대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후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파데레브스키 대통령은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파데레브스키로부터 도움을 받은 후, 후버는 항상 그때 그로부터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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