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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우리가 시기심의 늪에서 해방되길 원합니다.(민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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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시기심이 있습니다. 시기심은 보편적 현상이고 한 번도 남을 시기하지 않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기심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온갖 형태의 자기애를 감추려는 위선에 익숙해진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시기심을 내면 깊숙이에 감추는 것에 있어서는 선수급입니다. 한 수도사가 사막에서 인격의 성숙을 위해 금식을 하며 극기와 고행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때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귀들이 그를 시험하기로 했답니다. 음식을 가지고 시험을 하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답니다. 마귀들이 차례로 와서 육체적인 욕망, 물질, 의심, 공포 등으로 그를 시험했으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답니다. 마귀들이 그를 넘어뜨리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한 마귀가 탄성을 지르면 수도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답니다. "여보세요. 당신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답니다." 그러자 수도사의 얼굴빛이 금새 창백하게 변했답니다. 지금까지 잘 이겨냈던 수도사도 시기심의 담은 넘어갈 수 없었답니다.

시기심은 때때로 건설적으로 상용될 때가 있습니다. 시기심이 강한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기심이 강한 사람들이 경쟁자에게 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사업하는 것도 볼 수 있게됩니다. 이런 경우 시기심은 창조적 에너지로 사용이 됩니다. 그러나 시기심이 파괴적으로 사용되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기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열적인 적대감을 가지게 합니다. 판단력을 상실한 분노를 표출하게 합니다. 시기심은 파괴적으로 작용하면 늘 자신을 해롭게 하는 정열이 되어 버립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 거여동에서 일가족 3명을 살해한 사건이 실렸습니다. 30대 여성이 여고시절 단짝으로 지낸 친구가 아들과 딸 남편과 너무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시기하여 결국 친구와 아들 딸을 살해 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시기심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해 버리고 맙니다. 사울은 여인들이 다윗을 자신보다 뛰어났다고 칭찬하자 시기심이 발동하여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하다 가족과 함께 몰락해 버리고 맙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시기하다가 결국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든 장대에 자신이 목멤을 당하여 죽고 맙니다. 미리암이 다윗을 시기하다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시기심은 보이지 않는 미미한 것같지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기심은 비교하게 우울하게 하며, 파괴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게 하며 때로는 분노하며 판단력이 마비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미움에 사로잡혀 복수하게 합니다. 율라노프는 "시기심은 선한 것 자체를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심이 인간의 정신 안에서 끊임없이 선함과 아름다움과 감사의 감정을 파괴하고 온갖 병리를 만들어내는 주범"이라고 했습니다. "정신건강은 결국 이 시기심의 극복 정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속하신 성도들이 이 파괴적인 시기심의 늪에 갇혀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기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1.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나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계발해야 합니다./비교의식이 아닌 창조 의식

1)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기심은 자신과 남을 비교했을 때, 남이 나보다 우월하게 여겨질 경우 생기는 마음입니다.
시기심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질투와 같은 말로 사용하는데 시기(envy)는 질투라는 개념과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정의를 보면 시기란 “행복, 성공, 명성 등 가치 있는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우월함에 대해 불쾌함과 악의를 느끼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시기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탐욕, 악의, 나쁜 감정 등을 포함하지만 질투는 자신이 이미 가진 소중한 것을 경쟁자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포함합니다. 시기심은 시기하는 사람과 시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두 명의 인물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질투는 삼각관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질투의 대표적인 형태가 남녀간의 삼각관계로 잘 표현되듯인 시기심의 경우 갈망하는 재산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있고, 질투의 경우에는 누군가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에서는 시기심 (猜忌心)을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라고 풀어쓰고 있습니다. 이 시기심은 대부분 비교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비교의식은 자라면서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 돈 많은 사람, 인기 있는 사람, 미모가 뛰어난 사람 등등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 시기심을 느끼게 됩니다. 시기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이 비교입니다. '내가 못 누리는 것은 다른 사람도 누리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은 나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를 그 자리에 올려놓든지, 아니면 네가 내려오든지 해라.'라는 식의 심리적 동기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고라와 다단, 아비람, 온 그리고 유명한 족장 250명이 모세를 대항하여 반역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분수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처지와 모세와 아론을 비교하여 모세와 아론이 지나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와 아론의 사촌으로(출6:16)입니다. 자신들을 모세와 아론과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제사장 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0).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혈통적으로 장자 지파인 루우벤 지파 사람입니다. 장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도 정치적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사울이 다윗을 시기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만만이고 사울은 천천이라고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습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자신들과 비교하여 시기하는 것입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시기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미련한 행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 지혜가 없다는 말은 미련하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남이 나보다 남이 나보다 잘하는 것을 보면 실망하고 시기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내가 남보다 잘하면 교만하고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비교는 어느 모로 보나 자신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섬기다가 원치 않는 곳에 가서 죽음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바로 요한과 비교하여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어떤 죽음을 맞겠습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너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다. 만약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요한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나는 너의 삶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너만을 위한 계획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나의 계획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갈 6:4)"라고 말씀합니다. 남편을 비교하고 아내를 비교하고 자식을 비교하고 교회를 비교하고 목회자를 비교하고 가정을 비교하면 끝없는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끝없는 비교는 끝없는 시기심을 만들어 시기심으로 일생을 고통가운데 살게 만들어 버립니다.

2) 나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같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존재입니다. 비교의식이 아니라 창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유일하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16일자 신문을 보니까 영국의 한 사업가가 한 자리에서 한 병에 5천 9백원하는 고급 위스키를 마셔 버렸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똑같은 술인데 왜 그렇게 비쌉니까? 1943년에 만들어졌는데 12병 밖에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73억에 팔렸답니다. 피카소 그림 한 점이 12억원에 팔렸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희소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유일합니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진정 가치있는 것은 많은 것이 아닙니다. 수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것입니다. 마음도, 외모도, 환경도, 개성도, 지능도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독특한 것입니다. 누가 지었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고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시 139:13) 피카소 정도가 만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지으신 우리 하나님 모태에서부터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시기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독특하고 위대한가를 깨닫지 못할 때 생기는 열등감입니다.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장 나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나의 장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삶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장점을 개발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기를 원합니다.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라는 바울의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독특성을 인정했다면 비교할 시간에 그것을 개발하면 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달란트를 두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개발하면 됩니다. 이들은 모세와 아론이 가진 것만 비교하며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잘 개발하고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세요. 레위 지파가 성막에서 봉사하고 섬기게 한 것 작은 일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교하면 결국 자기를 파괴하게 되고 자시 것을 땅에 파묻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얼마나 좋은 것을 많이 받았습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목 하나 만큼 더 크다고 했습니다. 외모가 준수한 사람입니다. 왕으로 선별하고자 할 때 나무 뒤에 숨었을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심부름을 너무너무 충실하게 하는 효자였습니다. 경우와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권력도 돈도 명예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다윗을 좋아하며 만만이라고 칭찬하는 꼴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비교하며 거기에 집중해 버립니다. 시기란 감정 에너지를 집중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많은 것, 그 가치있는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시기의 늪에 빠지는 순간 그 좋은 것들이 아무 쓸모 없게 되고 마음을 끊임없이 사로잡는 독한 시기는 자신의 삶을 파괴해 버립니다. 시기심의 늪에 갇히면 자신의 가능성을 계발하지 못합니다. 많은 좋은 것들, 장점들이 사장되어 버립니다.

비교하며 시기의 늪에 빠지지 말고 창조의식을 가지고 나에게 주어진 것 만족하며 충성스럽게 계발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했다 칭찬받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지나친 독점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합니다. /소유의식이 아니라 은혜의식

1)지나친 독점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시기심은 지나친 독점욕에서 나옵니다. 아이들이 동생이 태어나면 이제까지 자신이 독점했던 부모를 동생에게 빼앗기야 하기 때문에 시기합니다. 그래서 동생을 괴롭히고 심하면 이불로 덮어놓고 발로 밟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는데 동생에게 그 사랑과 관심이 가니까 시기하는 것입니다. 독점하지 못하니까 시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사랑과 관심을 자신만 받고자 하여 새로운 식구가 오면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지나친 독점욕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고라와 르우벤 자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맡겨준 일도 작은 일이 아닌데 제사장 직분을 달라고 합니다. 성막 맡은 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제자장 직도 자신들이 갇고 싶어합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분수에 지나쳤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들이 분수에 지나친 것을(7)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도 합니다. 최초의 타락한 인간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사람에게는 다 주어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그 마지막 것까지 소유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면 시기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이미 왕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고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조금 인기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것을 가만 두지 못합니다. 자신이 명예와 인기도 다 독차지해야 합니다. 요즈음 방영되는 불멸의 이순신을 보십시오. 선조가 이순신을 시기합니다. 결국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자신은 왕입니다. 조금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그것 보아줄 수 없습니까? 인기까지 독점을 하려고 합니다. 왕이니 모든 것을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일을 맡아 그 일도 잘 못하면서 자신은 부장도 안시켜주고, 위원장도 안시켜주고, 교구장도 안시켜주고, 구역장도 안시켜주고 이런 식으로 독점욕을 가지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라를 보십시오.(창16장) 아이가 없어 자신이 먼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고 정작 아이를 낳자 시기심에 몸부림칩니다. 결국 하갈을 쫓아냅니다. 아이를 낳다해도 하갈은 종일 뿐입니다. 하갈이 아이로 말미암아 조금 아브라함의 사랑을 받으면 어떻습니까? 그것까지 독점하려고 합니다. 과도한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은 모든 것을 잃을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라헬을 보십시오. 얼마나 야곱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14년을 수일처럼 라헬을 위해 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훨씬 못생긴 언니 레아가 자신보다 먼저 아이를 낳습니다. 그걸 못 견디어 했습니다. 자기 여종을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고‘빨리 내 종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합니다. 독점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까? 구원을 받았고 천국을 받았고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고 능력을 받았고 얼마나 많은 것이 있습니까?
이런 독점욕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삶을 파괴해 버립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언14:3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라고 했습니다. 시기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다른 죄를 만들고 결국 자신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헬라의 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월계관을 차지한 일등 선수의 기념비를 세워 놓았답니다. 그런데 그와 라이벌이었던 선수가 그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답니다. 밤마다 몰래 가서 그 기념비를 부수려고 끌로 그것을 쪼았답니다. 며칠 밤을 몰래 가서 그것을 다 쪼았는데 마지막 밤에 그만 그 기념비가 넘어지는 바람에 동상에 깔려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파킨슨의 법칙"으로 유명한 영국의 사상가 파킨슨이 만들어낸말로 "무능자 질투증(Injelititi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능한데다 시기심까지 겸비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성장가능성이 높은 유능한 사람은 결코 임용 또는 승진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2류 밖에 안되는 사람이 정상의 자리에 앉게되면 3류의 두뇌를 가진 사람만 측근에 두게 되고, 3류들은 다시 4류들만 부하로 거느리게 되므로 조직은 마침내 서로 바보가 되려는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합니다.
시기심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편협한 자신의 시각으로 보며 독점하려 하지 말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독점욕을 가진 시각으로 모세와 아론을 바라보지 말고 모세와 아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울이 독점욕을 가진 자기 시작으로 다윗을 바라보니까 시기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창조하시고 메시야 왕국을 위해 쓰시려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하나님이 사용하고 계시다고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많이 가지고 계시는 김집사님을, 김 장로님을 하나님이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러워하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진권사님, 내가 추구하고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조집사님을 하나님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러면 독점욕으로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잘 쓰임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격려하며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심이 강한 사람들은 타인의 축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입니다. 나는 잘 되어도 타인은 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보다 잘 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탐심이 강한 자요 다른 사람은 시기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 왕이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청구하면 청구대로 들어줄 것인데, 한 가지 조건은 먼저 청구한 사람은 청구한 대로 들어주고, 다음에 청구한 사람에게는 그 갑절을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이 말을 듣고 탐심이 강한 사람은 갑절을 받을 야심으로 먼저 청구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었답니다. 시기심이 강한 사람도 청구하지 아니하고 가만 있었답니다. 시기심 많은 사람이 더 이상 기달릴 수가 없어 왕에게 요청을 했답니다. 무슨 소원을 말했을 것같습니까? "내 눈 하나를 뽑아 주시오"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는 탐심이 있는 자의 두 눈이 다 뽑히기를 바라고 한 것입니다.

시기심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고전 13:4은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말씀합니다.
시기심에서 벗어나려면 질투 대상자를 축복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갈 때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30)"라고 했습니다. 나는 조금 자존심이 상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흥하면 됩니다.

옛날 영국 런던에 아주 유명한 목사님 세 분이 동시대에 사역을 했답니다. 한 분은 그리스도 교회의 목사님인 F. B 마이어라는 분이며, 또 한 분은 대 부흥사 스펄젼 목사님이며, 한 분은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이셨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서로 떨어져 사역할 때는 몰랐는데 그 유명한 분들이 같은 도시 런던에서 사역을 하니까 마이어 목사님이 배가 아프더라는 것입니다. 시기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이어 목사님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시기의 감정을 극복하게 해 주시옵소서’성령님께서 세미하게 깨닫게 해 주었답니다. "시기심의 감정이 극복되기만을 단순히 바라지말고 그들을 축복하라" 그래서 기도를 바꾸었답니다. "하나님, 스펄젼 목사님을 축복하소서. 하나님, 켐벨 몰간 목사님을 축복하소서" 그랬더니 시기심이 살아지더라는 것입니다.

3. 자신 성취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자기 성취의식이 아니라 사명의식

1)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기의 성취욕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기심은 대개 자신이 바라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욕구불만의 결과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취욕의 좌절이 성취한 사람들에게 대한 시기심으로 발동을 합니다. 잘 될 때는 잠자던 시기심이 추구한 바를 성취하지 못하면 더욱 기승을 부려 자신을 옭아맵니다.
발자크는 시기심을 '이룰 수 없는 희망, 실패한 재능, 좌절한 성공, 거부당한 욕구들이 도망쳐서 숨는 끔찍한 도피처'라고 했습니다.

롤프 하우블이는 사람은 "시기심"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시기심은 매우 정열적인 감정인데 사람들은 시기심이 생길 때 세 가지 방법으로 극복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우울입니다. 이것을 무기력하게 하는 시기심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갈망하는 재산을 소유하지 못했는데 상대는 정당하게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하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신에게 격분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울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야심입니다. 고무적인 시기심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도 갈망하는 그 재산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분노입니다. 논쟁적 시기심이라고 말합니다. 상대가 재산을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을 때 생기는 시기심이라고 합니다. 재산의 공평한 분배를 위해 투쟁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쓴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당하게 하나님처럼 될 것같으니까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한 것이라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심에 가득 찬 욕망을 일깨운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고라와 그 일당들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부당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거스릴 명분을 그렇게 부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미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성취욕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좌절되자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분수에 지나치다고 합니다. 회중도 다 거룩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중 가운데 계시다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높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수에 지나친 성취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7,10). 여호와를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11). 모세와 아론은 사명에 초점을 맞춘 반면 그들은 자신의 성취욕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성취욕에 사로잡혀 시기심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31절 이하를 보십시오. 비참하게 망해 버렸습니다. 결국 시기심이라는 것은 자기 독살과 자기 파괴를 가져옵니다. 시기심이란 늘 자신에게도 해를 입히는 정열입니다. 성취욕으로 시기하는 사람은 특정 재산을 강렬하게 원하면 원할수록, 이루지 못한 좌절감은 크고 좌절감이 큰 만큼 시기심은 파괴적으로 발동하여 자신에게 더 많은 해를 입히게 됩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떠올릴 때마다 고통은 몸과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독을 만듭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파괴적으로 제한하고 맙니다. 끝없이 자신을 소외시켜 버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사인 아브라함 아 산타클라라(1644~1709)는 시기심을 품은 사람들이 얻게 되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은 시기하는 사람의 목을 조이는 밧줄이다. 다른 사람의 품위는 그를 압박하는 무거운 짐이다. 다른 사람의 명망은 그를 깨무는 통증이다. 다른 사람의 위트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창끝이다. 시기하는 사람은 수난자이기는 하지만, 악마의 수난자이다. 시기하는 사람은 자신을 물어뜯는 개다. 또한 그는 잠시도 조용히 있지 못하는 시계다." 성취욕의 좌절로 오는 시기심은 결국 '세상이여, 망해버려라!' 라는 식의 소름끼치는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파괴적인 시기심은 '막가파' '지존파'같은 사건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부자들을 보면 살의를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분배의 구조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괴적인 시기심의 한 유형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사울이 왕권에 대하여 사명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성취욕으로 접근할 때 그에게 시기심을 불어 넣어준 장본인은 무엇입니까? 사탄입니다. 악령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 16:14)" 악신이 그를 시기의 포로가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삼상 16:15; 16:16; 16:23; 삼상 18:10; 삼상 19:9) 마귀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다 타락한 천사입니다.(사14:12-15) 시기의 배후에는 시기의 영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14절에 보시면 성경은 “마음 속에 독한 시기가 있느냐?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가 있느냐?”시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한 나쁜 지혜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음모는 시기하는 사람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성취욕이라는 그럴듯한 옷을 입고 불평등이라는 미화된 미소를 띠고 다가오지만 독한 시기는 결국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2)시기심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저마다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모세에게 아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레위지파 고핫에게 그리고 르우벤 지파 자손들에게 저마다 고유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비교하면 끝없는 시기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시기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바라보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면 됩니다. 고라에게는 레위 지파로 성막일을 맡겼습니다. 그 일을 충성스럽게 하면되는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는 르우벤이 야곱의 장자였으나 서모 빌하를 통간한 일로 인해 야곱의 저주를 받았으며 장자권이 유다에게 넘어갔다는 것을(창49:8-10) 받아들이고 지금 주어진 위치에게 자신들에게 맡겨준 일에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시기는 삶의 목적을 빗나가게 합니다. 독점욕과 과도한 성취욕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습니다. 사명에 붙들림 받아 살면 됩니다. 어떻게 다 아브라함이 될 수 있으면 어떻게 다 모세가 될 수 있으면 어떻게 다 여호수아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며 이 땅에서 복받는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아버지가 요셉을 조금 좋아한다고 시기하여 살인을 기도하고 인신매매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에게 준 사명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 왔다고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에게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준다고 시기하며 그렇게 분노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더 좋은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시기심은 삶의 목적을 빗나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나의 관심을 성취욕에 두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이 곁길로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눅 9:62)"

사명 잃어버리고 시기하여 자꾸 다른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약 3:16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시기심 때문에 험담을 할 수 있고, 시기심 때문에 살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 아십니까?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은 주의하지 않으면 어는 순간 나를 산 채로 삼켜버립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골 3:2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잠깐이면 살아지는 것입니다. 평생의 사명을 이루는데 시기심은 가장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시기심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하는 대신에 내 눈길을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에 돌리게 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 사명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따름이지 다른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시기심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긴 사명을 무시하게 만듭니다. 시기심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것을 보며 분노하게 만듭니다.“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 5:25-26)
사명붙들고 가는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시기의 늪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어떤 사람들은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할 지라도 사도 바울은 기뻐합니다. 일평생 사명 따라 산 바울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8)"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시기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1.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나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계발해야 합니다./비교의식이 아닌 창조 의식
2. 지나친 독점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합니다. /소유의식이 아니라 은혜의식
3. 자신 성취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자기 성취의식이 아니라 사명의식
(김 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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