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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에 붙잡혀 살아갑니까? (행 16: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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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디에 속하고 있는가?(소속감), 내가 받아드려지고 있는가? 나는 인정받고 있는가? 내 인물됨, 내 인격과 성품과 기질, 내 능력, 가치, 은사, 관계 등에 대해 내가 나를 평가하고 조망해보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아닌 내 인물은, 나의 용모는 어느 정도인가를 판단하고 평가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무리 보아도 나는 참으로 잘 생겼고 용모와 인물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칭송하는 것이고, “나는 너무 못생겼다”, 심지어는 “나는 막 생겼다”고 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에 크게 도전하는 셈이 됩니다.

어느 칼럼에‘용모는 하나님이 책임지는 것이고, 표정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용모는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기 때문에 ‘잘 생겼다, 못 생겼다’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고, 내가 신경 쓸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표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표정은 내 생활과 마음의 산물(産物)로서 내가 어떤 생활을 하느냐,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밝을 수도 어두울 수도, 사랑스러울 수도 사나울 수도, 표독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 갖고 신경 써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표정입니다.

여러분의 표정은 어떻습니까?‘표정이 참 좋습니다, 당신만 보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라는 말을 듣습니까? 아니면‘당신만 보면 기분이 찜찜해 지고 불쾌해 집니다’란 소리를 듣습니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얼굴과 표정이 예수님의 얼굴이요 표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가 어떤 경로를 거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을 가지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가서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빌립보 도시에는 귀신들린 한 여종이 있었는데, 그 여종이 점을 치는데 정말 귀신같이 잘 알아맞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종의 주인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이 바울을 따라다니면서“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귀신들린 여종에게 자신의 미래와 운명에 대해 점을 치고 믿던 빌립보 사람들은 이렇게 귀신 들린 여종이 떠드는 말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허탄한 점괘는 믿으면서, 진실을 말하는 것엔 관심도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여종이 이렇게 바울을 쫓아다니며 떠들어대는 것이 바울에게는 얼마나 곤욕스럽고 귀찮았던지 하루는 그 귀신에게 이렇게 명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래서 귀신은 그 여종에게서 떠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여종은 온순해 졌고, 이후로 다시는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귀신 들린 여종을 통해 떼돈을 벌던 주인들이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끌고 광장으로 가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무차별 폭력을 가하였고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거반 죽도록 얻어맞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낮에 죽도록 얻어맞고 만신창이 된 바울과 실라, 밤이 되자 지하의 서늘한 기운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곤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을 올립니다. 지하 감옥에 있는 다른 죄수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와 찬송을 하였는데 그 다음 죄수들의 발목을 묶었던 것들이 다 풀리고, 옥문이 다 열려버린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색이 된 이가 있었는데 간수입니다. 간수는 죄수들을 책임져야 하는데, 죄수들이 다 도망가 버렸다면 자신은 다음날 책임을 물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결하려는데, 그 어두움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혼비백산한 간수가 등불을 찾아 들고 지하 감옥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곤 낮에 억울하게 그토록 무참히 얻어맞았던 바울과 실라가 앉아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 순간 간수는 엄청난 힘, 형용할 수 없는 권위에 압도당하여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곤 말합니다.“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이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주어집니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어떤 사람이 주차공간을 찾지 못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차 금지 구역에 차를 세우게 되었지요. 쪽지 한 장을 차 위에 남겨 두었습니다.“이 주변을 15분 동안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이곳에 세웁니다. 지금 차를 세우지 못하면 제가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구절 한 토막을 써 놓았습니다.“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잠시 후에 돌아와 보았더니 차 위에는 주차위반 스티커가 발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장 메모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 구역을 15년 동안 돌고 있는 순찰자입니다. 제가 만약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으면 이번엔 제가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그리고 또 성경구절이 한 구절 남겨져 있었습니다.“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이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내 삶, 내 인생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가히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유혹의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치관에 붙잡힌 사람들

오늘 본문에는 헛된 것에 붙잡히고 묶여 있는 사람들, 그들의 묶인 것을 풀어주려는 성령의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 건강한 가치를 묶어두려는 사단의 몸부림, 그 묶인 것을 풀어 자유케 하는 성령의 구체적 행동이 나옵니다.

오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그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헛된 것들에 붙잡혀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붙잡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붙잡혀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예수님 당신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이십니다. 동시에 저를 다스리시는 주인이십니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결정에서 제 자신의 뜻이 아닌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인물은 모두 무엇인가에 붙잡혀 종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에 붙잡혀 사는 여종

영락없는 노예입니다. 남의 집에 매여 사는 노예 신분만으로도 불쌍하고 가련하거늘 귀신에게 붙잡혀 귀신의 종이 되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이 사람은 보는 세계가 귀신의 세계입니다. 귀신의 말을 듣고 귀신이 주는 말을 합니다. 이 땅에는 귀신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를 봅니다. 어두운 말을 하고 어두운 행동을 합니다. 귀신에게 묶여서 이사도 함부로 못합니다. 못 하나 박는 것도 맘대로 못합니다. 결혼 날짜도 편안히 못 잡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한 가정을 묶고 있는 귀신도 나옵니다. 한 가족을 묶고 있는 어둠의 영들이 있습니다. 늘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의 영에 사로잡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아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를 미워하게 되면 그 사람과 내 영혼이 묶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미움의 자리에 사단이 앉아서 법적으로 나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뢰를 쌓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용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무한히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관점, 그 배후에 더러운 영이 있습니다. 영적인 권위자들에게 순복하지 못하는 거역의 영, 압살놈의 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불순종을 정의로 알고 살아갑니다. 질병의 영에 사로잡혀 악한 질병을 유전시키는 가계도 있습니다.

물질고 돈에 붙잡혀 살아가는 종의 주인

돈에만 눈이 어두워진 주인은 여종이 벌어들이던 복채가 끊어졌다고 노발대발, 폭행, 고소 고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주인에게 있어서 여종은 한 인격체가 아니라 상품에 불과했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주인들”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여기 재물이란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재물이 단지 재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신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만큼 강력한 신이냐? 하나님과 견줄 만큼 강한 신입니다.

인간이 돈 앞에 그토록 무력한 이유는 돈에 신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돈에는 인간을 조종하는 힘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초점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감격을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지성적으로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 돈만 보면 힘없이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돈의 힘을 알고 그래서 돈을 신으로 섬기게 됩니다. 인간은 돈의 위력을 빌리기 위하여 스스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가치관, 성경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려고 할 때에 제일 쉬운 것이 물질이고 또 한편 제일 어려운 것이 물질입니다. 또 한편 성도의 마지막 헌신은 물질 헌신입니다. 그래서 물질 앞에 깨끗한 사람은 깨끗한 영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물질을 포기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 위하여 뭐든지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편견과 전통에 붙잡혀 살아가는 재판관

피고가 유대인이란 말만 듣고 시비곡직을 가릴 필요 없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고 옥에 가두어 버린 편견의 노예입니다. 이런 선입주견에 매이게 되면 가장 냉정하고 공정해야 할 법관까지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호된 책망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전통 집착증 환자들이었습니다. 좋은 전통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좋은 전통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전통주의자들은 전통이 진리와 복음을 대신합니다. 전통이 말씀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해 버립니다.

의무감과 율법에 붙잡혀 사는 간수

여러분은 무엇에 붙잡혀 살아가십니까? 나를 붙잡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나의 가치관입니다.

성령과 비전에 붙잡힌 사람

신앙이란 붙잡히지 말아야 할 것을 풀어 헤치는 것이요. 붙잡혀야 할 것에 제대로 붙잡히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빌립보에 갈 생각을 아니하고 좀 더 편한 아시아에서 일하길 원했지만 그러나 성령이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비두니아에 찾아가 복음을 전하길 원했으나 성령의 결재를 받지 못했습니다. 드로아에서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는데 독사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개구리의 비명처럼 처참한 부르짖음이 그 환상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 비전에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비전에 사로잡혀서 그 비전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진흙이 말라서 굳어 있을 때는 아무리 재주 있는 옹기장이라도 그릇을 만들 수가 없지만 진흙이 물에 젖어 약해졌을 때 곧 물렁물렁해졌을 때 옹기장이는 그 흙을 빚어 좋은 그릇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도가니 속에서 물렁물렁하여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만이 성령의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만이 성령의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에 붙잡힌 사람

사도 바울은 사랑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랑에 미친 사람이고, 강한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도와줘야 될 사람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며 사랑의 가치관에 붙잡혀 사는 사람, 예수님 사랑에 미친 사람,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사명에 붙잡힌 사람

“붙잡혔다”는 말의 원문의 뜻은“압착했다”“뭔가 강한 힘이 짓눌러서 툭툭 터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가 나를 압착할 때, 환상이 나를 사로잡을 때, 주의 은혜가 나를 감동할 때, 그 뜨거운 감동을, 무거운 힘과 능력과 위대함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입을 열고 손발을 벌리고 달려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제대로 붙잡혀야 산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10대는 사랑에 붙잡히고, 20대는 인기와 야망에 붙잡히고, 30대는 사업과 일에 붙잡히고, 40대는 소유와 정욕에 붙잡히고, 50대는 권세에 붙잡히고, 60대는 명예에 붙잡힌다고 합니다. 어차피 붙잡혀야 산다면 바른 곳에 붙잡히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빌3:7-8) 예수님 중심의 가치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비행기는 이륙하려고 할 때가 가장 위험하고 그때가 가장 많은 기름이 소모된다고 합니다. 모든 불기둥을 잡아 당겨놓는 것입니다. 가장 많은 에너지가 된다고 하는데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침체의 늪을 헤매는 사람이 이륙하기 위해서는 전에 없는 뜨거운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무기력한 성도로 전락했다가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에 없는 말씀에 사로잡히는 새로운 계기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불길을 잃어버리고 냉랭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커다란 성령의 기적을 위해서는 전에 없는 뜨거운 말씀에 사로잡히고 뜨겁게 기도하는 일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묶고 있던 헛된 가치관들, 썩어 없어질 것들, 허황된 것들, 나를 묶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다 결박하고 잘라 내시기 바랍니다.

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는 커다란 기대에 영광스런 가치관, 성령에 붙들린 사람, 환상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주의 은혜에 감동되어 살아가는 사람, 사명에 붙들려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 정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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