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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둘기 같이 (눅 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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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어느 지역이나 나라가 발전하는 곳에는 반드시 강을 끼고 있었습니다. 나일 강을 끼고 이집트 문명이 발전했고, 인더스 강을 끼고 인더스 문명이 발전했고, 황하 강을 끼고 황하 문명이 발전했으며,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독일의 발전을 두고 라인 강의 기적이라 하며,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두고 한강의 기적이라 말합니다.

강에 비추어 말한다면 기독교는 어느 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요단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지를 순례하는 코스 가운데 요단강을 찾는 것이 필수입니다. 요단강은 헬몬 산에서부터 발원하여 흐르는 물이 갈릴리 바다를 이룹니다. 이 바다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물이 흘러 모이는 곳이 죽음의 소금바다 사해입니다.

기독교의 발원지를 요단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본문에 기록된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례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성도들의 필수 의식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를 받은 사람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많은 분들은 이미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세례를 받아야할 분들도 계십니다. 나는 과연 세례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내 신앙의 정체성을 재점검 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계서 세레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는 것은 비둘기 같이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1.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인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공원에는 의례히 비둘기들이 날고 있습니다. 평화의 제전이라 부르는 올림픽이 1988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개막경기 때에도 수백 마리의 비둘기를 하늘에 날렸습니다. 이는 모두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갈라디아서 5:22~24에 기록하시기를“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여러 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가 화평입니다.“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의 삶은 평화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세레란, 옛사람을 물에 씻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란, 옛사람은 물속에 수장(水葬)지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인해 변화된 사람을 가리켜“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고 하셨습니다. 변화된 새사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화평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 보다도 평화가 절실한 때입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에도 평화가 절실합니다. 남북간의 평화, 동서간의 평화, 세대간의 평화, 보수와 진보간의 평화, 이념간의 평화가 절실한 때입니다. 계절적으로 볼지라도 불쾌지수가 높아 짜증나기 쉬운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각 기관마다 여름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화평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입니다.

이 평화는 우연히 또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의 원수되었던 담이 다 무너지고 화평이 이룩되었습니다. 무엇으로 이룩하셨습니까? 십자가의 희생이었습니다. 희생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양보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평화를 이룩하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린도후서 5:17~19)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달려온 로마 군병들을 향해 베드로가 칼을 들어 내리쳤습니다. 그 칼에 말고라는 사람의 귀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삶의 귀를 주워 붙여주기시면서 말씀하시기를“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2~53)라고 하셨습니다. 뺨을 치는 무리에게도, 침을 뱉는 무리에게도, 옷을 벗기는 무리에게도 주님은 조용히 참으셨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룩된 것이 평화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을 부탁하셨고, 화목의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들, 주님께로부터 평화의 삶을 부탁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할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써야할 권리를 다 쓰지 못합니다. 그리하면 화평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법정에 송사하는 사태까지 갔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사도는 질책하기를“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린도전서 6:6-7)라고 했습니다. 송사하므로 내 이익을 챙기기보다 차라리 손해를 볼지라도 화평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랜시스>

이 성스러운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평화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9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은 하나님 아들의 자격입니다.

2.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입니다.

마태복음 10:16에“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하셨습니다.
조류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번 맺어진 비둘기의 암수 관계는 영속된다고 합니다. 순결이란 거룩한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악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혜롭되 순박함을 잃게 되면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지혜로워야하되 순결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둘기의 암수가 순결한 관계를 맺듯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베드로전서 1:16)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 임재 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1~22에“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하셨습니다.

한 젊은 아들을 둔 어머니가 아들에게 타이릅니다.“주일을 잘 지키고, 성경대로 착실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니?”“아니요 나는 내 방법대로 살고 싶어요.”이처럼 아들은 언제나 반대를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친구들과 사귀며 교회를 멀리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옷 몇 벌을 챙겨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면서 어머니께 하는 말이“더 이상 갇혀있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이다, 교회다. 다 싫어졌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 자유롭게 싱싱하게 살아가겠습니다!”하며 집을 떠나는 아들의 등을 향하여 어머니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정 떠나려는 너를 붙잡아 둘 수는 없구나. 그러나 너는 나의 간곡한 부탁 한마디는 꼭 기억하고 가거라. 너에게 언제인가, 답답한 시간이 오거든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되는 시간이 오거든, 너는 너의 어머니가 부르는 하나님을 찾아라 나는 너를 위하여 기도하겠다.”

집을 떠난 아들은 술과 놀음 그리고 온갖 방탕한 생활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한편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는 한 밤도 잠자리에 누워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하고 침대 옆에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집을 나가 아들은 방탕이 자유로 알았고, 방탕 속에 즐거움과 만족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의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방황하던 아들은 삶의 허무를 느끼고 끝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밤 여관방에서 준비한 권총으로 가슴을 겨누었습니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 순간, 그의 귓전에 어머니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에게 답답한 시간이 오거든, 모든 것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거든, 너는 너의 어머니가 부르는 하나님을 찾아라!” 순간 아들은 권총을 땅에 떨어뜨린 채 무릎을 꿇었습니다. 소리 높여 울부짖는 것입니다. “나의 어머니의 하나님이시여!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를 살려주옵소서!” 밤이 새도록 울부짖었습니다. 날이 밝자, 그는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하며 세계적인 대전도자요 신학자요, 설교가가 되었는데, 그가 곧 미국이 자랑하는 토리 목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순결해진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믿으므로 누구든지 순결해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이사야 1:18)하셨습니다.

3. 비둘기는 소식을 전하는 새입니다.

창세기 8장에는 노아 홍수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천하가 물에 잠겨있을 때 방주 밖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노아는 까마귀를 내어보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먹이를 찾아 물이 마르기까지 날아다닐 뿐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그 다음에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물이 많아 접촉할 곳이 없으므로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일주일 후 다시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비둘기가 돌아왔는데 입에 감람나무 새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이를 본 노아는 물이 감한 줄 알고 일주일을 더 기다린 후 다시 비둘기를 밖으로 내어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노아에게 방주 밖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비둘기는 본래 귀소본능(歸巢本能)이 강한 새이므로 옛부터 통신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신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나라의 비둘기이십니다.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처럼 하늘나라의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소식을 곳곳에 전하시다가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 비둘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비둘기의 사명을 받고 오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9-20)하셨습니다.
언제 전해야 하겠습니까?“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1-2)하셨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그의 저서에서 이런 고백하기를“나는 내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에 14년 동안 참가하여 10가정씩 140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내가 주지사에 입후보하고 선거 운동 3개월 동안에 악수를 나눈 사람은 약 30만 명에 달한다. 나는 나를 위해서는 3개월 사이에 30만 명을 만나보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14년 동안에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달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증거의 거룩한 지상명령(至上命令)앞에 부끄러움이 없으십니까? 복음을 전하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임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께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신 성령임은 우리에게도 오셨습니다.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한복음 6:44)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리도전서 12:3)고 하셨습니다.

비둘기처럼 임하신 성령님에 의해 우리는 이 시간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 나와 있습니다. 비둘기처럼 임하신 성령님에 의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비둘기처럼 임하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첫째,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듯, 평화의 사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비둘기가 순결의 상징이듯,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비둘기가 노아에게 새 생명의 소식을 전했듯,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를 사랑하시며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의 가장에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에게 하늘나라의 축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비둘기처럼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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