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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에 책잡히지 마시오 (눅 2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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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 즉 말로 세상을 지으셨기 때문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 말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말을 책잡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과 농부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가 자기네들을 겨냥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그 때에 예수께 손을 대어 잡으려고 하였으나 백성을 두려워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정탐꾼들을 보내서 이들이 거짓으로 의로운 사람인 채 행세하면서 예수께 접근하게 하여 예수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를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께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얼마나 교활한지 보아야 합니다.
처음 하와에게 다가온 뱀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자 얼마나 교활한지 보십시오. 아마도 뱀이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렇게 물었다면 하와가 아주 쉽게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랬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겠죠? 그런데 사단은 뱀의 입을 빌어서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모두를 먹으라고 하신 것은 아니죠?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바로 이 대답에 문제가 있습니다. 동산 안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게 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 이렇게 정확하게 대답을 하여야 했지만 하와는 그렇지를 못했고 거기서 말꼬리를 잡혀서 결국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까지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말꼬리를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말에 책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잘 아는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사람들은 보내어 먼저 예수님을 칭찬해 가면서 그 마음을 안심시켜 놓고서는 말에 책잡히도록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매국노라고 할 것이요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황제에게 거역하는 반역자라고 또한 고발할 것입니다. 그러니 바치라고도 바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교묘한 질문을 지금 던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말로 책잡으려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주 중요합니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로 하여금 믿음 없는 말을 하게 하고 은혜 없는 말을 하게 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책잡히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이 없는 말이요 은혜가 없는 말입니까? 바로 우리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힌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리의 생각대로 말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됩니다. “나는 못해 나는 할 수 없어.”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주의 말씀을 힘입고 주님께서 능력 주시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내 스스로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말은 우리를 다스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못해 나는 할 수 없어” 하게 되면 결코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결코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함께 계시면 물 위로도 걸을 수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의 말씀을 의지해서 물 위로 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신 말씀을 따라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나는 주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계속해서 고백해야 하고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겠다.” 그리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처럼 친구라 부르신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만큼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딪치는 모든 일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모든 것들이 다 합력해서 선을 이룰 줄을 믿고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아는 다윗은 대적에게 쫓겨다니며 목숨이 아주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처럼 그의 삶은 안전하고 풍성하고 승리로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내 생각에 사로 잡혀서 믿음 없는 말을 하여 말에 책잡히는 성도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 은혜로운 말과 사랑의 말을 통해 놀라운 승리의 삶을 누려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와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의 속임수를 알아채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다오. 이 돈에 누구의 얼굴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황제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의 말씀을 책잡지 못하고, 그의 답변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래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했던 무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라고 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땅한 칭찬과 더불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까지 내가 받으려고 하니까 그것이 시험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책잡히게 되더란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칭찬을 듣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칭찬을 듣다보면 스스로가 대견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빨리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맞아, 맞아 내가 정말 잘했지” 하고 다시 한번 칭찬의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조심해야 될 점입니다.
예수님께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온 무리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율법에 돌로 쳐죽이라고 했으면 그냥 쳐죽이면 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 와서 묻는 건 무슨 까닭입니까? 바로 예수를 책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지혜롭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말한 것과 같이 너희가 저 여인을 돌로 치도록 하여라. 그러나 너희 가운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여인을 돌로 치도록 하여라.” 그때 누구도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의 뜻도 살리고 사랑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하고 사랑도 살리는 그런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보면 자기만 옳습니다. 자기 말만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할 뿐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이라도 하게 되면 그것 가지고 또 시비를 합니다. 왜 내 말은 듣지도 믿어 주지도 않느냐고요. 그러나 그런 자기는 어떻습니까?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권세를 가지고 살려고 하지는 않고 “나는 안 된다 나는 못한다”고만 하더란 말입니다.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셨으면 끝까지 그냥 걸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걷지는 않고 풍랑이 있어 무서워서 안 된다고 하니 그만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요. 예수님께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얼마든지 자기의 말을 할 수 있었는데도 자기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사단에게 대답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씀 앞에 사단이 꼼짝 못하고 물러갔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외우고 배워야 하는가 하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의지해서 고백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약속을 의지해서 악한 마귀의 모략과 술수와 모든 권세들을 묶어 버려야 합니다. 그것도 내 힘으로가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님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의지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하여 예수 이름으로 명한다.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한 마귀야 물러가라. 우리로 하여금 다투게 만들고 갈라서게 만드는 악한 마귀야 물러가라. 우리로 술 취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아프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한 마귀야 물러가라” 그러면 그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 앞에 마귀는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으니 내 지혜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말고 주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놀라운 지혜를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 입에 사랑의 말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구하면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원수에게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고백 앞에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우리로 다투고 갈서게 만들던 마귀는 꼼짝 못하고 떠나가게 되니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게끔 만듭니다. 왜요? 말에는 그런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 있는 말 중 최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요 이렇게 말로 믿음을 심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믿음의 열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넘치는 승리의 삶을 믿음의 고백과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 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에 책잡히지 않도록 은혜와 믿음과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믿는 자입니까?
예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다윗은 골리앗을 향하여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데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뇨?”
“너는 칼과 단창을 가지고 내게 오거니와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가 가노라.”
그리고는 손에 검 하나도 들지 않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가 가진 유일한 검은 그의 입의 검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검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그의 믿음을 고백하고 말함으로써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더욱 믿음의 고백을 통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을 믿고 고백하십시오.  일들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모든 것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계십시오. 결코 부정적인 말은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스스로를 축복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고백하는 야베스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야베스는 그 이름부터가 고통스러운 자였습니다. 모든 상황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고통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고백하며 스스로를 축복하였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가장 존귀한 자가 되었다고 역대상 4장 9절로 10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도 형편없이 망가져 보이고 모든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간다고 해도 이런 믿음의 고백을 날마다 드리게되면 하나님께서 그 고백과 축복의 기도를 받으시어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고 우리의 영토를 넓혀주심으로 우리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게 만들어 주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도우시어 불행도 막아주시고 고통도 받지 않게 만들어 가시더란 말입니다.
야이로가 자기의 딸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다 못해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집으로 가는 동안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던 여인으로 인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방금 죽었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물론 처음에 야이로는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은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하고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절망입니다. 자기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까지는 그래도 딸이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때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조금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마디도 그는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일이 잘못되어간다 싶을 때 일이 잘 되지 않을 것 같이 보일 때 우리의 믿음이 떨어져 있을 때 모든 것이 최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철저하게 입을 다무십시오. 오직 말씀 안에서 안식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열매맺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민수기 6장의 제사장의 축복으로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야베스의 기도로 간구합니다. 그랬다면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영광의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고백하십시오. 주님 역시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고백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셨던가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드리십시오. 그 사랑으로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럴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땅에 심기운 씨앗이 어느 순간 흙을 뚫고 나와 힘차게 자라가듯이 그렇게 우리의 삶에 믿음으로 고백한대로 믿음으로 축복한대로 열매맺어 자라게 될 것입니다.
“너희 믿은 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야베스처럼 고통스러운 삶이 존귀한 자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신 주님 말씀 따라 믿고 구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셨노라고 승리의 선포를 하십시오. 그럴 때 아름다운 열매가 주렁주렁 맺게 될 것입니다. “네 믿은 대로 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믿음의 열매가 사랑의 열매가 복의 열매가 넘쳐흐르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의 입술에 믿음의 고백이 항상 있게 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마시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변함 없이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은혜 가운데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줄로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아니 이미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셨노라고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도록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결코 말에 책잡히지 않도록 믿음 없는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마시고 오직 이 승리의 고백 믿음의 고백으로 놀라운 은혜의 자리 복된 자리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우리의 영토를 넓히시며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시는 귀한 삶이 항상 펼쳐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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