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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어의 위력(마 12: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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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며 말을 그치지 않고 많이 하면서 사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한 조사 통계에 의하면 한 사람이 18000단어를 사용해서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 단어를 길이로 하면 54페이지의 책 한 권에 해당되는데 1년이면 한 사람이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 66권에 해당하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의 경우이고 사람들 가운데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남성보다는 여성이 말이 많습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팀 하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말을 한 사람으로 그는 무려 144시간을 쉬지 않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대중연설을 통해 조사했더니 말을 가장 빨리한 사람은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으로 그는 1961년 어떤 연설에서 1분에 327개의 단어를 구사했으니 얼마나 빨리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합니다. 그 말들이 끼치는 영향들을 생각해 보면 끔찍합니다. 적은 물방울이 계속되면 바위를 뚫는다는 말처럼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말들이 얼마나 우리의 인격에 구멍을 내고, 인생을 망가뜨리거나 살리기도 합니다.

잠언 18:21절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기능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써 인격을 드러내기도 하고, 말 자체가 소유한 영향력으로 인해 말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도 하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짧은 말 한 마디가 희망 혹은 절망으로 남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말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첫째, 언어는 마음에 가득 쌓여진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34~35절)

본문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말은 그 심중(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은 입으로 하지만 말은 그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구절에서 말이라는 ‘로고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의미와 사상이 담겨있는 말”을 지칭합니다.

34절에 ‘가득한 것’이라고 표현했던 ‘페리스슈마’는 비 “의지적이고 체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은 내 안에 쌓아 두었던 것, 기존에 있던 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평소에 우리가 하는 말은 이전에 내가 경험하고, 생각 했던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축적되어 있다가 보여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은 단순히 들려지는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고 삶의 경험이며, 앞으로의 될 미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나아가 말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 준다고 말씀합니다. 즉, 언어의 표현을 들어보면 그 위인이 어떤 한지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5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 본성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타락하였기에 아무리 어린 생명이라고 해도 다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음으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니의 죄가 여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의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선한 사람이 된다. 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리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의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에

"주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 라고 하였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죽고 사는 것이 돈에 달렸다고도 하는데 실제로 죽고 사는 것은 혀에 달린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 혀를 어떻게 잘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혀를 사람을 살리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되 긍정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솝은 이솝우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하루는 주인인 크산투스가 손님을 초대하려고 이솝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재료로 요리를 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이솝은 시장에서 짐승의 혓바닥만 산 후 온통 혓바닥 요리만을 만들었습니다.

기분이 상한 크산투스가 어떻게 혀 요리만을 했는지 호통을 치자 이솝은 “주인님 세상에 혀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혀가 있어서 말도 하고, 지식도 전달하고, 교양도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인님 말씀대로만 했습니다.” 라고 말하자 크산투스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다시 손님을 초대한 크산투스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하라고 주문을 하자 전날과 똑같이 혀로 된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너무 화가 난 크산투스가 이솝에게 “어제는 혀가 제일 좋다고 하더니 오늘은 제일 나쁜 것으로 요리를 하라고 했더니 또 혀로 된 요리냐?”고 호통을 치자 이솝은 말합니다. “주인님! 혀보다 나쁜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 혀야 말로 모든 분쟁의 씨앗이요 , 다툼의 어머니요 거짓말과 중상모략의 그릇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짐을 교훈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합시다“. 혀를 잘 사용하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혀를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덕스럽고,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합시다. 남을 충고하고 조언하는 일,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 남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혀를 사용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말을 할 때 그것이 단순하게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의 표출이라고 보지 않고 그 말속에 있는 우리의 영적상태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니면 육을 따르는 사람인가? 그것을 통해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평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 , 부패하고 타락하고 분쟁과 끊임없는 싸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만물보다 부패한 마음에서부터 온갖 나쁜 것들이 나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결국은 혀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말 때문에 얼마나 우리 사회가 어지럽습니다. 대통령도 언어 때문에 몇 번이나 곤욕을 받았으며, 돌아다니는 말 때문에 이 사회가 복잡하고 힘이 듭니다.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들은 말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도 때로는 분란이 생겨서 어려움을 겪는 것도 결국은 말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혀는 참 좋은 것으로 잘 사용하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죽일 수도 있다는 간단하면서도 깊은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새기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나의 사용하는 말을 통해 나의 영적상태를 체크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영적상태는 어떠한가? 성령에 속한 그리스도인인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인가? 를 점검해 보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둘 째, 말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30~32절)

오늘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교훈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령 훼방 죄인데, 그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30-3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말로 거역한 것이기에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혀를 잘못 사용한 결과에 대하여 사함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혀는 우리 몸의 기관 중에 작은 것이지만 혀가 가장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경계하고 있습니다.

말 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계신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오,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기에 말씀은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말을 판단하신다면 나는 과연 어떤 판단을 받을 것입니까?

여기서 무익한 말이라고 하는 ‘아르곤’은 쓸데없는 말, 부주의한 말, 무의미한 말, 무가치한 말을 의미하나 존 맥아더 목사님은 조금 다르게 설명하기를 “비생산적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황무지와 같은 무책임하고 적절치 않은 말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창조적인 능력과 힘으로 용기를 주고 잠자고 있는 능력을 일깨우는 능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반면,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거나 낙심하게 만들고 새로운 희망과 기를 꺾어 버리는 언어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상 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야고보서 3장 9~10절 말씀 “이것(혀)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선언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험한 말은 정신적인 것에 영향을 끼치고 육체적인 질병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잠언 6장 2절은, ‘네 입의 말로 내가 얽히게 되었으며 네 입의 말로 내가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덴마크의 저술가 데어도어 라인킹(Theodore Reinking)이라는 저술가는 자신이 쓴 책 속에서 당시 덴마크 국왕 크리스쳔 4세를 헐뜯었다는 이유로 1646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최종 결심에서 국왕은 그에게 "네가 쓴 책을 씹어 삼키든가 사형을 당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라인킹은 하는 수없이 자신의 책을 갈기갈기 찢어 스프에 넣어 꿇인 다음 모조리 씹어 먹었다고 합니다.

말(혀)는 자신을 망칠 수도 있고, 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를 파괴할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말로 신앙을 고백할 수도 있고, 예수를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말조심합시다. 손이나 발보다 말의 속도가 빠릅니다. 그래서 손이나 발이 나가기 전 불쑥 말이 나가는 것입니다. 총소리가 "탕"하고 난 뒤에 총알이 총구를 떠나 날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총알이 목표물을 맞힌 뒤 총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10㎞ 떨어진 목표물이라면 총알은 25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의 속도도 총알과 비슷합니다. 총알이 잘못 맞으면 오발이 되고, 말이 실수하면 전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이 빠르고 급해서 실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3절은 말씀합니다. "입에 재갈 먹여 온몸을 어거하라(약 3:3)"고 명령합니다.

타고 다니는 말을 어거하는 방법은 입에 재갈을 먹이고 재갈에 고삐를 매 말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고삐를 잡고 잡아당기고 늦추면 재갈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야생마도 재갈만 먹이면 꼼짝 못합니다. 큰 배도 키 하나로 방향을 조정합니다. 내가 내 입을 신앙과 인격과 덕으로 재갈 먹이면 아무 말이나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천 냥이 있으면 노비에서 평민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이 속담은 말 한마디가 팔자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졌다고 합니다.

로버트 란츠는 "우리가 날마다 뱉은 말들이 책으로 출판되지 않을지라도 말세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한 말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말로 복된 사람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세 번째, 우리가 한 말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36~37절)

본문 36절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본문37절 말씀에 “‘네가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말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심판 날에만 책임을 물으실 뿐만 아니라 사용한 말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것대로 갚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18장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이길 수 없다고, 여기서 죽는 것이 낫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정탐꾼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보면

“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그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 된다, 죽겠다, 할 수 없다 한 사람은 광야에서 다 죽었으나, 믿음의 눈을 떠서 약속과 믿음을 선포했던 사람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성도는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무릇 거짓말하지 말아야합니다 .더러운 말, 희롱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방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저주하는 말, 독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악한 말, 교만한 말이나 패역한 말, 궤사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 유언비어를 배포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 남을 참소하는 말, 불의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첨하는 말, 망령되고 헛되 말, 무익한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입을 통해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도구가 되는 입술이 되려면 적극적인 대처방법이 있습니다. 심판 받기에 하지 말아야 하는 언어도 있지만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을 때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1) 아름다운 소식, 복음을 전파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5: 42절에 "저희는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하였습니다.

2) 주님을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고,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에서도 이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3) 언어에 감정이 나타나기 때문에 온량한 혀는 생명나무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온량한 혀는 부드러운 혀로 부드러운 말, 즉 위로와 격려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 은혜를 끼치게 하여야 합니다.

4) 칭찬하는 말을 해야만 합니다. 옆의 사람의 장점을 칭찬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말, 친절한 말을 해야 합니다.

5)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 된 성도는 마땅히 참되고, 선한 말을 하여야 합니다. 진실한 말을 하여야 합니다.

6) 선과 악을 분별한 명철한 언어, 경우에 합당한 슬기로운 말, 지혜로운 말을 하여야 합니다.

7) 남에게 도움이 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축복을 빌어주는 말, 복된 소리,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짧지만 이런 한마디 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따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잘했어", "기도해 줄께" 그리고 옆에 사람에게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넌 항상 믿음직해", "넌 꼭 잘 될거야",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참 좋아". 이런 언어들을 생활 속에서 생활화하므로 복된 인생을 만들어 가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선무당 사람 잡는다는 얘기처럼 상담 잘못해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911테러가 나서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혀서 큰 폭음이 생겼을 때에 빌딩에 있던 사람들이 119에 전화해서 기다려야 할 것인지 ,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에 나 같으면 그곳에서 기다리겠다고 말을 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다가 건물이 무너져서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말로서 상담해주고 조언을 해준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언을 잘못해주면 죽일 수도 있고 잘해주면 살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어의 위력이자 그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는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죽겠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아이쿠 죽겠다.' '더워서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라고 하지만 성도 여러분들은 그런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겠다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는 언어의 위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좋은 말을 골라합시다. 나쁜 말은 하지 맙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긍정적인, 믿음의 말, 살리는 말, 영적인 말, 좋은 말, 단말, 맛있는 말, 유익한 말, 은혜로운 말을 합시다. 즉, 복록을 누리고 생명을 살리는 언어를 구사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 사주는 사주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본문 33절에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언어의 사용으로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집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이 하루는 그가 가게에서 일을 마치고 돈을 가지고 퇴근했는데 집에 아무도 없는데 마침 밖에서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러서 나가보았더니 세 사람의 권총 강도가 자신을 안방에 밀어 넣고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서 기절을 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깨어보니 자신의 두 손과 발이 묶여 있고 도둑들이 돈과 패물들을 전부 훔쳐서 도망갔던 것입니다. 집안에 사람은 없고 소리를 쳐보았지만 집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죽겠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살아야 하겠기에 침대 옆의 전화기까지 간신히 가서 발로 전화를 떨어뜨렸습니다. 전화버튼을 어떻게 누를 수가 있습니까?

이때에 자기에게 가장 유용하게 쓰였던 것이 혀였답니다. 혀로 119를 눌러서 살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혀를 잘 쓰니까 사는 길이 열렸다고 합니다.

한 강도는 '주여 낙원에 이를 때에 나를 기억 하옵소서, 이 한마디로 구원 얻었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롬10:9)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그 날에 그 사람을 부인한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사랑의 헌신으로 십자가를 통해 얻은 구원의 복된 소식을 내 입으로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전하시고,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복된 언어의 사용으로 승리의 삶을 이루어 나아가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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