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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태도 (마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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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1.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태도의 실제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두신 공동체는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어떤 공동체든지 그 공동체 속에 최고의 권위자를 두셨습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은 그 권위자와의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관계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연습하며, 경험합니다. 그 권위자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하나의 공동체는 그 권위자와의 관계 속에서 질서가 유지되고, 평화와 안식을 누립니다. 그 권위자와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신분과 인격이 평가됩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최고의 권위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피조물의 최고의 권위자로서 교회 공동체의 주인이시며, 주관자이시고, 최종 심판자이십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성도들은 최고의 권위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신분과 인격이 평가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의 신분과 인격 유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중요성은 더욱 크게 인식되어집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죄악된 성향은 이처럼 중요한 영역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의 신분과 인격은 사단의 주요 공격 지점입니다. 인간의 죄악된 성향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태도를 변질시킵니다. 첫 출발은 하나님을 향하지만 이내 자신의 죄악된 욕심을 향하게 합니다. 비록 첫 출발은 하나님을 향할지라도 순식간에 그 대상이 자기 자신으로 변질되며, 그 최종 목적도 자신의 욕심으로 변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타락한 인간의 죄가 우리 안에 남겨 둔 흔적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부패 성향은 모든 신앙적 행위마다 빠짐없이 나타납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를 향하는 첫 발걸음은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될지라도 잠시 후면 그 중심에서 하나님은 밀려나고 자신의 욕심, 자신의 계획, 자신의 인간관계, 자신의 외모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 속에서 드러날 것인지가 최대의 관심사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도할 때, 구제할 때, 선교나 봉사할 때도 첫 출발은 하나님께서 그 중심에 계시지만 순식간에 그렇게 행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 모든 사역의 중심에 서 있게 됩니다.

예배시간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할 때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경배하지만 잠시 후면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그 중심에서 밀려나고 자신의 갈급함들, 문제들, 욕심들, 외모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예배의 첫 시간은 하나님의 존전을 의식하며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순식간에 자신의 욕심이 그 자리에 차지합니다. 예배 받을 분이 예배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은혜 받기를 원하는 자신의 타락한 마음이 예배의 중심에 앉아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이 외형적으로 공동체 속에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조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이 채움 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채움 받은 자인 것처럼 조작된 행위를 나타내는 외식에 빠집니다. 욕심을 채움 받은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 감동 받았다”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영적인 신분과 인격을 나타냅니다. 또한 설교자에게도 그렇게 표현하며 설교자를 높이는 동시에, 교묘하게 자신도 높입니다.

“은혜 받았다, 감동 받았다”는 표현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대신에 은혜 받을 자기 자신이 예배 대상이었다는 표현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님들은 설교자가 성도들로부터 “은혜 받았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부터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기 시작함을 깨달으라고 질책합니다. 성경적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임한 결과는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통곡하거나 “이를 갈거늘(행 7:54)” 이라는 분노입니다. 예배 중의 깨달음은 “도전받았다”라는 표현이 합당합니다.

2. 성도의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태도는 외식하는 자의 기도로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태도 중에서 조작적인 태도가 가장 교묘하게,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신앙의 영역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의도적인 신앙행위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직접 대면하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기도의 자리는 그 어떤 다른 요소도 끼어들 수 없는 가장 거룩하고, 가장 성결하며, 가장 완벽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태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남아 있는 죄악의 부패성을 그 누구보다도 분명히 깨닫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단의 세력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에서 용솟음치는 타락한 정욕의 욕심들을 명확하게 구별하여 불 수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더욱 더 완벽하고 교묘하게 자신의 참모습을 조작하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조작적으로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태도의 표본으로서 이러한 “기도”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위하여 기도의 삶을 통해 우리의 태도를 진단하십니다. 예수님은 마 6:5에서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하시며 잘못된 기도자의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기도자의 태도는 “외식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경건한지, 얼마나 거룩하고 성결한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인지 드러내고자 하는 접근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기도자의 접근 태도가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신의 태도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드러내려는 조작적인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여기에는 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기도자의 핵심 문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의 주요 관심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와 하나님 사이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기도 응답 받을 사람 자신이 중심이 되어지는 것을 책망하시며 “외식하는 자”라고 평가하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마음을 지배하는 관심의 최종적인 목적지가 자기 자신이 된다면, 그 관심의 주요 목적은 결국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의 변질된 수많은 예들을 경험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합니다. 남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늘 가까이 함께하는 자로 보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 응답 받는 자신의 신앙적 신분과 인격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다양하고도 많은 기도제목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요 관심이 자신의 주요 관심이 되어져 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원합니다.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태도를 통하여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교회 공동체에 나타내기를 원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교회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신분과 위치, 그리고 자신의 신앙 인격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즉 기도가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를 거짓된 기도, 욕심에 이끌린 외식적인 기도라고 책망하십니다. 모든 신앙적 행위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기도의 자리도 언제나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의 기도는 언제나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앉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욕심에 일치하면 기도응답으로 인정하고, 일치하지 않으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기도응답을 받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아주 예민하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태도를 검증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때마다, 또한 기도의 자리에 앉을 때마다, 기도시간마다, 기도의 순서를 담당할 때마다, 기도의 언어를 사용할 때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본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께의 접근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교묘한 자기중심의 태도를 알려줍니다. 우리의 어린 신앙을 알려줍니다.

3. 성도의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는 골방의 은밀한 신뢰의 태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태도로 나가야 올바른 태도인지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마 6:6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바른 태도는 첫째가 “골방의 은밀한 기도”입니다. 골방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그 중심에 앉아 계신 방입니다. 하나님과 기도자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그 관계의 중심이 되시며, 주요 관심이 되는 방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존재도 개입할 수 없는 방입니다.

“골방”이란 직접적으로 “큰방의 구석 쪽에 달린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작은 방”입니다. 그러나 왕상 6:5에 보면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라고 설명합니다. 골방은 성전 안에 있는 다락방들로서 성전에 드려진 예물들이 보관되는 보물창고였습니다. 이곳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만 보관되는 곳이기에 숨기에 좋았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범죄자들이 숨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골방은 그곳에 드려진 모든 예물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들이 풀어져 쌓이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들의 거룩함과 부정함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 놓여질 수 있는지 없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이러한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실질적인 골방이라는 장소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자리에 계시고, 우리의 모든 마음이 다른 존재들의 방해 없이 하나님께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골방의 은밀한 기도를 위해서 기도의 자리를 향할 때나, 기도의 자리에 있을 때나, 기도 후에 공동체 속에서 함께할 때,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시도록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특히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이 앉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죄의 본성을 지닌 우리의 육신은 언제든지 순식간에 그 자리의 중심에 자신을 앉히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자기 마음의 중심에 자신이 앉지 않도록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의 은밀한 기도를 위해서는 기도의 자리를 향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나가고 있음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낼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그 마음을 떨어버려야 합니다. 기도 중에도 자신이 현재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며,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골방의 은밀한 기도이며, 하나님께서 보시고 응답해 주실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마 6:7-8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 중 둘째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방인들은 “중언부언”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는 “신뢰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언부언이란 주문을 외우듯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같은 기도제목을 오랜 시간동안 기도하는 기도의 양이나 그렇게 기도하는 자세를 통하여 기도 응답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시간이나 기도하는 자세보다도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분량이나 기도 자세의 수많은 노력은 결국 그 기도의 중심에 자신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그 기도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분양이 아닌 우리의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온전한 태도를 정확하게 알려주며, 진단합니다. 만일 기도자의 마음에 기도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인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기도가 될 뿐 아니라, 그의 신앙까지도 거부됨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기도의 양이나 기도의 자세를 통해서 자기 의를 쌓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도 응답받을 수 없으며 그 신앙도 거부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만 대면하는 기도와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태도는 자기중심적일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받을 것인가?”에 집착할 때, 부패한 우리의 욕심에 의해 자기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될 위험이 큽니다. “어떻게 하나님 한 분 앞에 설 것인가?”에 집중할 때에만 응답받는 기도와 신앙의 태도가 됩니다.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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