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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자 (롬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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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본문 성경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 중에 고난과 역경을 즐기면서 이를 반가와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깊은 경지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를 실감하고 있는 사람은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비결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I. 하나님과 화목된 삶을 사는 자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하였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된 자입니다.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힌 바울은 그 뜨거운 감격을 가지고 성도들의 가슴에 불을 붙입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삶을 사는 것이 꿈같은 사실이요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롬 4:1-8). 유대인이 자랑하는 할례 때문도 아닙니다(롬 4:9-1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입니다(롬 4:17-25).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의 신분을 인정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입니다(1절). 여기 “화평”이라는 말(ε?ρ?νη)에 대하여 칼빈(J. Calvin)은 ‘양심에 평정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과 불화하면서 절대로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도움 받아서 살게 되는데 죄로 인하여 그 관계가 원수처럼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개입하시고 둘을 하나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에베소서 2:14-16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2) 은혜 안에 들어가는 자입니다.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게 되는 최상의 축복을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은혜(Χ?ρι?)는 할 수 없는 죄인이 조건도 없고 자격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호의와 사랑을 뜻합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조건이 되는 것이지만 받는 우리 입장에서는 값없이 받는 선물입니다(엡 2:8).
이 은혜의 결과가 모든 불안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참 평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은혜의 날개 아래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여기 “들어감”이라는 말(πρροσαγωγη)의 뜻은 안내자의 인도로 왕에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2:18에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불행한 인생들을 생명과 평안이 있는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입니다. 마치 거친 파도에 시달리며 항해하던 배가 안전한 항구 안으로 들어오도록 안내하는 항해사와 같은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대망하며 즐기는 자입니다.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원수나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 잘 되고 형통한 것을 보게 되면 심리적인 박탈감과 함께 불안하고 공포에 떨게 됩니다. 누가복음 19:14에 보면 어떤 귀인이 먼 나라로 가서 왕위를 받아오게 되는데 그 백성이 뒤로 사자를 보내서 왕이 되지 못하도록 섭외를 했다가 뒤에 크게 보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와 화목을 이루고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거나 영광을 누리게 되면 덩달아 기쁘고 즐겁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을 때 그의 영광을 보면서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성령에 이끌리어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즐기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황홀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맛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실감하는 자들입니다.

II. 환난의 의미를 아는 자들입니다.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1) 환난 중에 즐거워합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이를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바울을 신문하던 총독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행 26:24-25). 미치지 않고도 환난 중에 즐기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진리를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혐오하고 피하려는 그 환난을 즐기며 감당하는 비법을 가진 사람입니다.

호주에 있는 세계적인 휴양지 브리스베인(Brisbane)에 가면 많은 젊은이들이 파도타기로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장면을 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집채 같은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갈 엄두를 못 내겠지만 그 사람들은 널빤지를 발밑에 대고 곡예 하듯이 파도와 함께 몸을 날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환난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4:22). 찬송가 작가 오트만(J. Oatman)은 543장 찬송을 작시하면서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고 하였습니다. 슬기로운 성도는 피할 수 없는 환난 때문에 눈물 흘리고 고통만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하며 즐기는 비법을 가지는 것입니다.

(2) 환난의 유익을 압니다.

3-4절에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였습니다(마 5:11-12).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0:18).

이와 같은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성도가 신앙생활로 인하여 환난을 당할 경우 하나님에게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되는데, 그것을 증거로 삼기 위해서라도 환난은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라고 하였습니다(갈 5:22).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내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며 기다려야 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농부가 가을에 거둘 열매를 보며 일 년 내내 수고하는 것과 같습니다(약 5:7-8).

하나님께서 환난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는 데는 연단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올리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시키듯이 연단을 시켰다고 회고하였습니다(신 32;11).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벧전 1:7).

(3) 환난의 결과를 압니다.

환난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완성시키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과 소망과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8:17에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롬 8:18).
성도가 신앙생활의 과정 중에서 고난이라는 적은 밑천을 들이고 영광이라는 많은 소득을 보장받았다고 한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죽음의 단계를 지난 후에 부활과 승천 그리고 보좌 우편의 영광으로 이어 진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만 됩니다(빌 2:6-11).

III.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성경을 기록하면서 단순히 성도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나 세상으로부터 오는 환난을 극복하도록 정신력을 키우게 하는 그 이상의 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당위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의미와 그것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8절).
여기서 강조하는 복음 진리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사랑의 결과로 얻는 축복은 성도가 누리는 소망의 영광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여야 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 내용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의 강도(强度)가 들어나듯이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절망적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가 들어납니다. 여기 대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3:16).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였습니다. 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하였습니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환난과 죽음의 멍에 아래 놓인 인간의 근본 문제를 풀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카드로 독생자를 희생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환난의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사랑의 강도를 느끼며 즐거움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입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그 환난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헌신적 삶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의 의미를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길을 따라 가야된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21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여간한 환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고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걸음이라면 이것을 마다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감격스러운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3) 승리적 삶의 원동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거기서 조반을 같이 하신 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 21:15). 이렇게 하여 사랑의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분부를 하였습니다. 박해가 극심한 초대교회 상황으로는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말 못할 환난과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였습니다(요 21:18).

이와 같은 고난과 죽음이 그의 앞에 놓여 있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강한 힘으로 그것을 이기며 자기소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때문에 온갖 고난을 당했고, 최후로 순교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바울의 경우 그 무서운 박해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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