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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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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집착하는 것은 행복일 것입니다.  행복,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본능처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계속 추적해 보면 그 이면에는 행복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바쁘게 일하십니까?”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사업이 필요하십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왜 돈이 필요하십니까?”
“그거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왜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묻는다면 그의 최후의 대답은 행복을 위해서라는 답변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노력과, 바램과 최후의 궁극적인 목표를 묻는다면 행복하고 싶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최고 선이라고 했습니다.  행복, 그것은 모든 사람의 최종적인, 궁극적인 결론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들의 근거가 되며 내면 깊이 뿌리박힌 소중한 열망은 행복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새로 산 자동차가 온전한 차인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를 구분하려면 방법이 있습니다.  차의 뚜껑을 열어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엔진 부분을 보고 전기 부분과 기계부분을 봅니다.  이 부분들이 온전하다면 그 차는 정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내가 행복한 사람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행복의 세 가지 조건들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올바른가를 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없이 행복할 수 없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는 엄마 품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피조물인 인생에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선이 끊어지면 인생은 비참해집니다.  그래서 젊은 날에 긴 방황을 했던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내 마음에 참 평화가 없었습니다”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에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채울 수 없는 진공상태가 있었습니다. 그 공백은 오직 당신만이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 두 사람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 살고 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고백한 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주께서 나의 생애 속에 들어오시자 새로운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나의 인생이 존재하는지, 삶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한 사람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금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가 바로 맺어져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가정생활이 온전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장소, 아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축복의 통로로 만드신 보금자리가 바로 가정입니다.  그처럼 풍성하고 좋은 것이 많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도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셔서 하와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가정은 인생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가정은 이처럼 영광스럽고 소중한 장소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아무리 인정받고 대우받는 남편일지라도 집에서 아내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편은 별 볼일 없는 인생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아무리 칭찬을 들을지라도 남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내도 신통치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가정 안에서의 삶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만남, 이것이 있을 때에 그 가정은 행복하며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통로가 됩니다.

세상의 노도광풍이 아무리 세차게 몰아친다 해도 가정이라는 안식처에서 그 광풍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매몰찬 삭풍이 부는 추운 겨울일지라도 가정의 따뜻한 사랑의 품안에서 다시 활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을 더욱 소중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특별히 한국 남편들은 좀 무뚝뚝한 편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아내들에게 모두 위임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를 잘못 키우는 것도 성경에서는 “아내들아” 라고 말하지 않고 “아비들아” 하고 부른 뒤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가정의 대표자인 남편을 향해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의 문제는 여자의 책임이 아니라 대부분 남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부부가 함께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두 가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인정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셋째로,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교회 생활이 온전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저는 세 번째 부분에 대해서 강조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참으로 내가 행복한 인생인가, 아닌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점검하면서 성찰해 보아야 될 요소는 지금 나는 교회 생활을 온전하게 하고 있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키우십니다.  또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유익들을 주십니다.  이 교회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공동체는 두 개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가정이고, 둘째는 교회입니다.  그 외에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공동체를 통해서 인생을 축복하시는데, 이 둘의 모습이 비슷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어느 나라의 전시장에 걸려 있어도 미켈란젤로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솜씨는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유감없이 나타납니다.  모습이 얼마나 흡사하든지 어떤 성경학자는 교회는 확장시켜놓은 가정이고, 가정은 축소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 둘이 하나의 원리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2-33절에서 부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했습니다.  계속 똑같은 원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가정을 통해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도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중에는 처음부터 언양 영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옮기신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있으면 전반적인 생활에 활력을 잃게 됩니다.  사업이 잘 돼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사실 우리가 별로 중요하게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교회에 내부적인 문제가 생기면 내 신앙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우리에게 소중한 장소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교회를 소중하게 가꾸어야 교회 안에서 나의 가정이 또한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나의 인격이 주님 앞에 바로 자랍니다.

천둥 번개가 치며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내 손에 우산이 들려져 있으면 비를 맞지 않는 것처럼 교회라는 보호막 아래서 우리는 사탄의 세력을 대적하여 승리합니다.  교회라는 보호막 아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행복한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바른 관계가 맺어졌는가, 우리 가정 안에 개선되어야 할 부분은 없는가, 교회에서의 우리 삶이 온전한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부분에서 온전하다면 때때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지라도 근본적인 행복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삶의 목적과 보람이 분명하게 됩니다.  마음에 많은 감사와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부분에 있어서 내가 어떤 삶을 누리고 있는가를 다시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교회에 대해서 이 시간에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있는 교회는 어떠한 교회입니까?  이상적인 교회라면 초대교회를 연상하게 됩니다.  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성경에서는 초대교회 가운데에서도 여러 교회가 나옵니다.
가령 라오디게아 교회, 사데 교회,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 모양은 그럴 듯 하나 죽은 교회, 성령의 은사가 너무 많이 나타나서 혼란스러운 교회, 고린도 교회, 예루살렘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교회들 중에서 어느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가자는 의견에 반대합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축복과 영광스러움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주님의 명령인,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기뻐하고 만족하였으나 그것으로 그만인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두 사람의 위대한 설교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의 설교였고, 또 한 사람은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3천명, 5천명이 주께 돌아오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결론이 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군중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군중들은 이를 갈며 달려들어 돌을 던졌습니다.

왜 이와 같은 상반된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스데반이 베드로보다 어리석고 못나서였습니까?  스데반은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칭송을 받던 7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인정해주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결과와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결과는 결국 하나님의 개입하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선교에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길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 3천명, 5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가 성장하면서 그들은 나태해졌습니다.  그들은 매일 모여서 먹고 마시면서 그들만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웃을 향한 선교에는 눈을 감았습니다.  더 이상 선교하지 못하는 교회, 복음의 열정이 사라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바로 스데반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8장에 보면,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선교에 문을 닫았던 예루살렘 교회가 다시 선교에 열정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8장 8절에 보면, 다시 선교의 열정을 품고 주의 말씀을 전할 때에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었던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선교의 뜨거움이 없을 때,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이 없을 때 하나님은 교회에 박해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눈 팔지 않고 소망으로 바라보며 그리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합니까?  우리가 한 눈 팔지 않고 소망으로 바라보며 그리는 교회는 안디옥 교회이어야 합니다.
안디옥은 시리아와 터어키의 국경 지대에 있는 도시입니다.  원래는 그 이름이 시리아 안디옥이었습니다.  안디옥 이라는 지명은 성경에 두 곳이 나옵니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이고, 또 하나는 수리아 안디옥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안디옥 교회는 수리아 안디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게말파샤가 1차 대전 때 시리아 지방을 점령하였고, 그 뒤 2차 대전 때 온 세계가 독립을 요구할 즈음 시리아 안디옥 사람들은 터어키의 영토로 남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터어키로 남아 있습니다.
안디옥 박물관에 가보면, 그곳에는 아폴로의 지극한 짝사랑을 받았던 다프네라는 여인의 신화만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의하면 큐피드라는 장난꾸러기가 아폴로에게는 다프네를 사랑하도록 화살을 쏘았고, 반대로 다프네에게는 아폴로를 싫어하는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래서 아폴로는 그 여인을 마지막까지 쫓아갔는데 궁지에 몰린 다프네는 아버지 제우스신에게 “여기서 나를 한 그루의 나무로 만들어 주소서” 부탁하였고, 결국 여인은 나무로 변하여 그 나무가 월계 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전설과 다프네의 신화로 가득찬 도시가 바로 안디옥입니다.  박물관에도 다프네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곳곳에 치장하여 놓았습니다.  2,500년 전 이오니아 문화의 찬란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면 산 중턱을 오르면 조그만 동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이름이 베드로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남산만한 크기의 산인데 전체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래 이 산 안에 감추어져 있던 동굴 교회는 외부인들에게 오랫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터어키에서 대지진이 났을 때 산이 반쪽으로 갈라졌습니다.  갈라지면서 동굴교회의 모습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돌로 만든 설교단이 있고, 설교단 옆에는 옹달샘이 있어서 늘 샘물이 졸졸 흐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샘물은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 산 전체에는 곳곳에 많은 구멍이 파여져 있어서 사람이 몸을 굽히고 들어갈 수 있는 통로들이 수 없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 현지인들도 굴의 용도를 잘 모른다고 합니다.  굴의 길이는 이제까지 사람이 들어가 보았던 최대의 길이가 26Km이고, 그 이상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굴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렇듯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토굴 속에서 살았습니다.  곳곳에 그들이 살았던 흔적이 굴속에 남아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가를 볼 수 있는 흔적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의 산 이름을 마을 사람들은 “하비브 나자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하비브 나자르”  그 뜻은 “목수를 사랑하는 자의 산”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오직 주님 한 분만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했던 마음이 얼마나 극심하였으면 2천년이 지난 뒤에도 그 지명이 예수님에 대한 성도들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던 자의 산” 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목수를 사랑하던 영광스러운 장소였다고 불리워집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주님을 향해서 대답할 말이 있다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희생하신 그 사랑 앞에 대답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이외에는 없습니다.  충성이라는 말도 매우 멋있는 말이지만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에게 충성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독입니다.  성실이라는 말도 매우 귀한 말이지만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나요” 라고 물을 때 당신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성실하겠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큰 모독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신부로서 신랑되신 주님을 사랑했던 교회였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깊은 애정을 드렸던 교회였습니다.  그 뒤에 세월이 지나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언어도 바뀌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도 바뀌었습니다.  모두가 이슬람화 해 버린 그 지역이지만 그래도 그 산만은 옛날 안디옥 성도들이 우리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생각할 때에 건물을 떠올리십니까?  아니면 교회를 조직으로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구속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이 바로 교회입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는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한 말씀이지 개인을 향한 말씀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누구든지”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우리”이기도 하지만 또 “나”입니다.  내가 모여서 우리가 되었습니다. l

나를 향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실패한 베드로에게 주님이 다가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주께서 그를 회복시키시며 물으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세우시고자 하실 때에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헌신도 하고, 봉사도 하고, 열심으로 노력도 했지만 실수도 많습니다.  또 나의 의도가 빗나갈 수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지만 최후로 주님이 받아주시는 것은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입니다.  내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해서 그 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성공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주께 헌신한 것 같으나 주님을 사랑한 마음이 없었다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소망하는 그 교회는 진실로 주님을 사랑했던 교회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향해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물음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십니까?  그 사랑 앞에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대답이 안됩니다.  진실로 사랑하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도, 우리의 업적도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도 모두 사라질 날이 올 것이지만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것이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소리나는 구리에 불과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일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사랑의 감격이 있습니다.  불이 지펴지면 따뜻한 열이 생기고, 환한 빛이 있는 것처럼 사랑이 있으면 주위의 환경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감격이 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기쁨이 샘솟듯 합니다.  사랑만 있으면 헌신이 불타오릅니다.

사랑은 어떤 돌맹이도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어두움도 밝히는 불빛입니다.  사랑은 어떤 불가능도 뛰어넘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내 되신 여러분,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남편 되신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정도가 아닙니다.  엄청난 손해입니다.  남편 되신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 되신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자녀들도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사랑만이 영원하며 내게서 떠나지 않는 유일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소망하는 아름다운 교회를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한 나그네가 이 세상에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영원한 세계로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걷다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 강을 지키고 있던 천사가 나그네를 보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 강물을 마시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나그네가 묻기를 “이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천사가 대답을 합니다.
“만약 이 물을 마시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기억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나그네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러면 이 강물을 마시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실패를 경험했거든요.”
천사가 경고하기를 “그러나 실패의 경험뿐만 아니라 성공했던 기억도 모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는 몹시도 배고픈 인생을 살았습니다.  내 슬픈 기억을 모두 잊고 싶습니다.”
천사는 또 다시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어느 날 빵 한 조각을 맛있게 먹었던 기쁨도 같이 잊게 됩니다.”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당한 비참한 수모와 배신감을 다 잊고 싶어요.”
천사가 말합니다.
“당신이 신뢰하던 사람들로부터 얻었던 기쁨의 추억도 다 잊게 됩니다.”
“그래도 좋아요.  이 세상에서 흘렸던 눈물도 모두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누렸던 기쁨과 행복도 잊습니다.”
“아뇨.  이 세상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깊은 미움 또한 기억조차 하기 싫어요.”
천사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동시에 당신이 사랑했던 추억도 모두 망각할 것입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깊은 생각에 몰두하더니 이윽고 “그렇다면 나는 이 강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지상에서의 모든 추억을 안고 가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쓰라림을 안고 삽니다.  많은 실패와 좌절과 깊은 한숨과 고통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빼앗길 수 없는 것,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했던 기억입니다.  사랑했던 것은 영원합니다.  사랑했던 것만 진실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했던 것은 영원한 가치입니다.  빛나는 보석이 되어서 내 인생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이 사랑은 내 마음을 밝혀서 저 천국에서도 나의 인생을 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수치를 당하는 사람은 사랑해 보지 못한 인생입니다.  사랑에 인색한 인생은 가장 큰 것을 놓치는 인생입니다.  다른 것에는 실패해도 사랑에 성공한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위대한 것은 다 놓고 갑니다만 이 사랑은 영원토록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나와 함께 설 것입니다.

여러분, 하비브 나자르를 기억하십시다.  그 사람들은 비참하게 인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그들이 살았던 산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10년 후에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우리가 살고 간 자리에 그들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는 흔적이 남는다면 우리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산”,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님을 열심히 사랑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에 부요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은 내가 쓴 것만큼만 내 것입니다.  내가 사용한 것만 내 것입니다.  인생의 부요는 내 사랑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에 비례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소유를 가지셨습니까?  그러나 사랑할 줄 모르는 냉혈성을 소유하셨다면 그 냉혈은 저주입니다.
높아지셨습니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습니까?  그러나 그 가슴에 사랑의 불길이 타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지옥에 살고 있는 인생입니다.
인생은 사랑 때문에 빛이 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은 항상 있을 것이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다같이 일어나시겠습니다.  일어나서 주보 속지에 있는 복음성가 ‘우리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런 빚도 지지 말자’를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하는가, 그러한 교회를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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