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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걷고 뛰고 찬미하는 인생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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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는 우리가 잘 알 듯이 예수님의 행적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행적 가운데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는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을 고쳐 주었다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구걸하던 앉은뱅이의 정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구걸했다는 것은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기대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불쌍한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구걸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전처럼 좋은 곳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본문의 앉은뱅이의 경우, 그는 돈은 구걸했지만 단 한번도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를 기대하거나 바란 일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도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으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 문간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의 관심은 오로지 돈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을 그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처럼 교회에 나오고 봉사하고 일하는 것이 영혼의 문제 때문이라기 보다는 어떤 이윤 추구에 목적이 있지는 않는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이기보다는 육신에 속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아닌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드나들면서도 내 영혼의 감격을 상실하고 있다면 우리는 오늘 이 앉은뱅이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사람보다 더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성전 문간에 앉아 있으면서 돈이라도 벌었으니까 말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네 가지 중요성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장소 선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유대 나라는 기후 조건 때문에 지체장애자와 나병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나병환자의 경우는 가족이나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야 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에는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앉은뱅이의 경우는 아침이면 누군가가 메어다 주고 저녁이면 집으로 메어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구걸의 장소를 성전 문 입구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산헤드린 공회당 입구나 빌라도 총독 관저 입구를 구걸의 장소를 선택했더라면 걷고 뛰는 은총을 입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는 감격은 없었을 겁니다.  영혼이 구원을 얻는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나라에 많은 지체 장애자들이 구걸이라는 수단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본문의 주인공인 이 사람만 병 고침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성전 문 입구를 구걸 장소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전 문 입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 입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었고,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뛰고 찬양하는 인생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 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전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이야기하라면 다윗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자신은 호화로운 궁궐에 살면서 하나님의 성전은 초라한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모든 준비를 다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의 중심을 보셨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실수가 많았지만 왕의 자리를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시편 84편 3절을 보면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했고 4절에서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에 나오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이곳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나와서 예배 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십시다.  성전은 예기치 않았던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여러분에게 주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만남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날 그 때 거기서 그가 베드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베드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걷고 뛰고 찬미하는 역사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베드로의 만남은 인생을 바꾸는 축복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문에 두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때 성전 문에 앉아 있었고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타이밍이 맞은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그 앉은뱅이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만일 그 때 그 자리에서 내가 주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죄 많은 인생으로 불행한 죄인으로 살다가 절망과 좌절 속에 빠진 채 지옥 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그 위대한 만남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성전에서 행복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50억 인구 가운데 2분의 1은 가난과 기아에 눌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 2분의 1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지도자를 잘못 만났거나 환경을 잘못 만났거나 종교를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가깝게는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들, 더 가깝게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이 그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가수 노사연은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고 열창하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만남이야말로 결코 우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계에서 출입국 소속이 제일 까다로운 나라를 꼽는다면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입국은 비교적 쉽습니다만 출국은 까다롭기 짝이 없습니다.  성지순례의 감격이 송두리채 가실 정도로 까다롭게 군다고 합니다.  중동의 화약고 한복판을 살아가는 그들의 긴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마치 피의자를 다루는 듯한 출입국 직원들의 태도는 마땅치가 않습니다.  그들이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캐고 묻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잠을 잤느냐, 누구를 만났느냐, 맡은 물건은 없느냐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 때 이라크의 첩보원을 만났다든지 누구와 접선을 했다는 것이 실마리라도 잡히는 날이면 그 사람은 이스라엘을 떠날 수가 없게 됩니다.
누구를 만났느냐?  이것은 그의 인생 삶과 행로를 결정합니다.
그 날 거기서 그가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는 베드로를 만났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도중에서 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강도,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는 만나서는 절대로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만날 가능성이 많은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적 강도도 있습니다.  도덕적 강도도 있습니다.  경제적 강도도 있습니다.  우리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강도는 만나서는 안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뭔가를 기대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습니다.  기대해 볼 수 있고, 뭔가 아름다운 선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대와 바램을 무참히 깨뜨려 버리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이 사람은 솔직히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유는 평소 사마리아 사람을 멸시했고,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상처받고 쓰러진 유대인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정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을 진실로 만나 주었습니다.  만일 그 날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길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앉은뱅이 역시 그 날의 그 만남 때문에 구원받고 걷고 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만남도 이와 같이 소중한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미없는 만남이 아니라, 상처받고 찢겨지는 짜증난 만남이 아니라, 만나면 기분 좋고, 만나면 살맛 나는 그런 만남이 우리들의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를 만나면 용기가 나고 믿음이 생기는 그런 만남이 우리들의 만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만남이 저와 여러분의 만남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은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고, 7절을 보면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으십니까?

그 날 베드로는 그에게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전한 것입니다.  그 날 성전 미문의 기적은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 날 그 사건은 베드로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풍랑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위로받고 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면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십시오.  본문의 앉은뱅이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고침 받은 그는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은혜까지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은혜의 중요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은혜는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그는 한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을 보면 그의 나이는 40여세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40여년 동안을 걷지 못하는 불행을 안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은혜를 받는 순간 그의 전신의 기능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7절에서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고 말한 것은 모든 신체의 기능이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은혜에서 떠나면 되는 게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말이 정상화되고, 손과 발로 하는 일이 정상화되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화됩니다.  은혜를 받아야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즐겁고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 없는 봉사는 결국 짜증과 피로만 쌓이게 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모든 환경과 생각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앉은뱅이가 걷고 뛰기 위하여,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이 정상화되기 위하여, 육체적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오늘 여기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은과 금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주보 속지에 있는 ‘은과 금 나 없어도’를 힘차게 부르시겠습니다.  2절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은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뛰며 걸어서 성전으로 맨 먼저 들어갔습니다.  길거리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어나는 순간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한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감격하여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 명의 나환자가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렸던 사람은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다양하고도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보답하고 감사하는 현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각양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의 현장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전에서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거나 은혜의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위로부터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르고 흔들어 차고 넘치도록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걷고 뛰고 찬미하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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