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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 사랑(3)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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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평화에 대하여 계속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가 요즘 우리에게 주시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도 서로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가득하고도 서로 다투는 것 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보편적인 관심은 경제입니다. 경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경제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모든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그렇듯 옳습니다. 물론 마른 떡 한 조각도 없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만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다면 육선이 가득하고도 서로 다투는 것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도 서로 화목 하는 것이 천 번 만 번 낫습니다. 평화는 그 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소원과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반대는 불화인데 우리는 지난 주 설교를 통하여 불화의 원인이 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뜻과 말씀에 예민하여 정직하고 바르고 반듯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적당히 대충대충 세상 식을 따라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마음 자세에서 불화가 일어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사랑하며, 자신이 속하여 있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매우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불화의 원인이 죄인데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3:23)라고 아주 단정적으로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원칙적으로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불화는 우리의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으며, 우리의 절망이 있는 것입니다.

불화는 원죄와 같은 것입니다.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안에 불화가 일어날 때, 아무리 그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여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불화는 옳은 일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니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이고 당연한 일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든지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모든 불화의 원인이 타자에게만 있고, 자신에게는 없는 것처럼 착각한다면 그는 정말 심각한 트러블 메이커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평화는 원천적으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가 비록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평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운명적인 불화에도 평화의 길이 있고 식이 있습니다. 그 길과 식은 사랑입니다. 평화의 식과 길은 법과 사랑입니다. 법과 사랑은 서로 모순 되어 보이는 개념이지만 둘이 다 함께 공존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이루어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속성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공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법 없는 사랑이 아니라 법이 있는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없는 공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함께 하는 공의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평화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의 없는 사랑>과 <사랑 없는 공의>가 모든 불화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지난주에는 <공의 없는 사랑>에 대한 문제점에 대하여 설교하였습니다. 오늘은 <사랑 없는 공의>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오늘의 주제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우리가 아무리 옳은 입장에 서서 일을 한다고 하여도 그 마음속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의는 잘못된 의라는 것입니다. 의를 의되게 하는 것은 의뿐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에 사랑이 더하지 않으면 그 의는 이미 의가 아니라 불의라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교인들 중에 보면 정의파들이 있습니다. 옳은 것을 좋아하고 좋아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정의파들이 좋습니다.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저도 정의파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와 같은 정의파들이 좋아하는 말이 하나있습니다. 잘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라는 말입니다. 저희 돌아가신 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자주 하시던 말씀 중에 하나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저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좋습니다. 그래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라는 말도 좋아합니다.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다. 비겁하지 않고 당당하며 옳고 바른 말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제 짧은 경험을 통하여 보면 저들이 교회나 직장과 세상에서 언제나 트러블 메이커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짜 트러블 메이커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 불법을 저지른 사람, 옳지 못한 행동과 일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것을 그냥, 무조건 덮어 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정한 피스 메이커가 되려고 할 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른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사랑으로 하느냐, 사랑으로 하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하여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또 다른 불화를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더 심각한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오히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바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옳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옳은 말과 행동을 한다고 하여도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 옳은 생각과 행동과 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결국 틀렸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옳은 것이 틀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옳고 바르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착하기 때문입니까? 그 의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죄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아무리 징계를 하셔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하나님께 매를 맞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매를 맞음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에 하나님은 펄쩍 뛰시면서, 정말 펄쩍 뛰시면서 ‘내가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1장 1절에서 보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고 범죄 할 때 그냥 넘어가시지 않으십니다.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벌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십니다.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벌하시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공의와 정의의 입장에 서곤 합니다. 그 입장에 서서 옳지 못하고 잘못된 일과 사람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문제는 그와 같은 비판을 하면서 그와 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쉽게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부로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미워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7절과 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대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롬 5:7-8)

피스메이커가 되려면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만 합니다. 사랑은 평화에 있어서 공의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어쩌면 공의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공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 한 마리가 어머니가 차려 놓은 밥상에서 생선 한 마리를 물고 마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막 새끼 티를 벗은 고양이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야단을 치며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고양이도 자기 잘못을 알기 때문에 매를 맞을까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아마 한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고양이와 씨름을 한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할 수 없이 고양이가 나왔습니다. 기가 팍 죽어서 완전히 슬로우 비디오처럼 나왔습니다.

그 놈을 잡아서 야단을 쳤습니다. 한 대 때려 주려고 손을 드니 눈을 꼭 감고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때리려는 손을 멈추고 그냥 꼭 안아 주었습니다. 꼭 안아 주면서 사람에게 말하듯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리고는 땅에 내려놔 주었습니다. 그날로 우리 고양이가 거듭났습니다. 고양이가 변하여 강아지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본시 고양이는 사람을 강아지처럼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양이는 그날부터 저에게 강아지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에게 매달립니다. 목 위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제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닙니다. 새끼를 낳을 때도 저 있는데서 낳았습니다. 고양이는 개보다 야성이 강해서 좀처럼 아무리 주인이라고 하여도 사람이 있는데서 새끼를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게 컴컴하게 해 주어야 그곳에서 새끼를 낳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양이는 제가 보는 앞에서 새끼 세 마리를 낳았습니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용서 때문이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나중에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향유를 부은 여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사랑으로 용서 받았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삶을 살 수 있는 감동과 감격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의인을 사랑함에서는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사랑함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죄인을 사랑함에 도전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은사와 능력을 받으면 가능합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큰 은사를 사모하라 말씀하십니다. (고전 12:31) 그 큰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면 그 은사를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그 은사를 받으면 죄인까지도,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될 줄로 저는 믿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어느 분으로부터 심한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었는데 그 상처 때문에 주일 새벽이 다 되도록 설교 준비가 되지 않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제 마음 속에서 찬송가 434장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로 족한 은혜 주시네.’라는 가사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때마다 족한 은혜를 주셔서 그 문제들이 해결되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의 앞의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라며 찬송하니 그것이 또 그렇게 은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혼자서 그 찬송을 계속해서 반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찬송으로 시작된 은혜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기 시작하였습니다. 은혜가 허리에 차자 나에게 상처를 준 교인이 이해되고 용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은혜가 머리 꼭대기 차게까지 되자 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벅차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은혜스럽게 준비되었고, 주일날 저는 그 교인을 끌어안으며 화해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삶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 제게 상처를 주신 분이 원수는 아니었지만 저는 그 때 이만한 은혜만 늘 내게 충만하다면 정말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믿지 않는 집에 시집을 가서 제사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놓고 늘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로마서 12장의 말씀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 중에서 그 며느리라 주목한 단어는 ‘산제사’였습니다.

죽은 제사를 드리지 않으려면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려면 살아있는 조상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물론 본문에 합당한 바른 주석과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고 해석한 며느리는 그날부터 시어머니에게 제사를 드리는 심정으로 효도를 하였답니다.

그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한 시어머니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네가 믿는 예수 나도 믿을란다.’하시더랍니다.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제사가 그치게 되었습니다.

피스메이커가 되려면 사람에게 산제사를 드리는 심정으로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의인만 아니라, 옳은 사람만 아니라, 훌륭하고 근사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장로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와 털썩 앉으셨습니다. 장로님에게 제가 무슨 언짢은 일이 있으신가를 물었더니 ‘요즘 젊은이들이 버릇이 없어서 자기 장로를 보도 인사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 제가 그 장로님에게 농을 하였습니다. ‘애들 자장면도 한 그릇 안 사주고 애들보고 인사만 안한다고 하면 됩니까? 애들 자장면 사줘 봐요 인사 얼마나 잘 하나? 자장면도 한 그릇 안 사주는데 애들이 장론지 집산지 어떻게 알아요?’

사무실에서 설교 준비하고 있었는데 옆 방 아이들이 얼마나 떠드는지 설교 준비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도 떠들어서 아이들을 제 방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중, 고등부 아이들이 임원수련회를 한다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장난을 치다가 담임목사 방에 붙잡혀 온 아이들이 머리를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또 예뻐 보여서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지 않고 자장면 사먹으라며 몇 만원 돈을 쥐어 주었습니다. 야단맞으러 왔다가 자장면 값을 받은 아이들의 얼굴이 얼마나 밝아지는지, 활짝 웃으며 허리를 거의 90도 가까이 꺽으며 인사하고 같습니다.

그러더니 옆방에서 찬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방해 받지 않았습니다. 제 방과 옆 방 사이에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로 그 아이들은 저만 보면 인사를 잘 하더라는 것입니다. 신세대 아이들과 기성세대 목사 사이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한다고 하여도, 개인적으로 출세하고 성공을 한다고 하여도 평화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 교회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목회하는 교회가 된다고 하여도, 우리 교회 안에 주님의 평화가 없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 사랑의 은사를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사랑의 은사를 받아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죄인까지도 사랑하며 모든 사람에게 산제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 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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