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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사 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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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고 사명을 위해 일하는 선지자는 그 유형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죄를 범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마다 특징이 있고 나름대로 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두 가지 사명 모두를 맡아 한 선지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간 선지자로 부름 받은 이사야는 자신의 사명이 죄를 범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선포하는 것임을 알고 이 일에 전념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두 번째의 일을 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된 계획이 있어 곧 그것을 주실 것이라 선언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동안 전자의 사명에 충실했던 이사야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받습니다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떤 것을 어떻게 선포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전도하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도 무엇을 전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게 됩니다. 바로 이사야 선지자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치라, 가서 외치라”고 하셨을 때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러한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외칠 것인가를 일러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생하게 일어나는 장면의 묘미를 잘 살리지 못했지만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이 말씀은 원래 「시편」과 같이 시문체로 쓰였습니다. 헨델이 그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이사야 40장의 노랫말에 곡을 붙일 정도로 아주 생생하게 전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행복한 교회를 꿈꾸며 우리 모두가 하반기에는 전도에 전념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전도에 대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만 다만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전도의 전략을 갖추고 실천 가능한 전술을 만든 후에 꼭 실행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니다. 그리고 그 수고에 따라 많은 열매가 맺어지는 은혜가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물론 어떤 분은 ‘거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그냥 직설적으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읍시다” 하면 됐지’ 하실 분도 있으실 것이고, 혹은 ‘무엇이든 사용해서 효과만 거두면 됐지, 무슨 전술전략이냐’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작정하는 것보다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한 전술전략이 있어 전도대상자를 상대한다면 더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문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달하라고 하는지 통찰력을 가지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직접 우리 귀에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지 잘 듣고 이사야 선지자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대로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것입니다. 흡사 무엇을 전해야 좋을지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 답하신 것과 같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전도 사명이 무엇이며 또한 무엇을 외쳐야 할지를 찾아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눈 뒤에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이웃을 위로하며 삽시다
  본문 1절"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무엇을 외쳐야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 말씀의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부터 벗어났으므로 죄로 인해서 받아야 할 형벌은 충분히 받았으니 더 이상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위로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유다 백성들을 향한 중심이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가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할 사람 역시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죄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나는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가”, “나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을까” 하며 자신 없어 하거나,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여나 가족 중에 누가 병을 얻어 아프기라도 하거나 고통을 당한다든지, 다쳐서 고생한다든지, 사업장에 어려움이 닥치기만 하면 “내가 뭔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고생하나”, “나는 아무에게도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왜 이리 아프나?”, “에구 내 죄가 커서 그렇지” 등등 많은 것으로 자신을 비하하는데 바로 그런 감정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죄’입니다.

  심방하다 보면 더러 이런 분들이 계시는 데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모두가 한번씩은 겪어본 일이요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죄 때문에 가족이 다쳐야 하고, 내 죄가 커서 내 자녀들이 병에 걸려야 한다면 여러분, 예배드리는 이 시간, 이곳에 있는 우리 중 과연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계실까요? 간혹 조그맣게 손가락 끝에 가시가 박히거나 찔리기만 해도 “에구 벌 받았지, 어제 아내에게 큰 소리를 했더니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는구나”, “괜스레 죄 없는 아이들을 꾸짖었더니 그래 벌 받는 거지”하면서 모든 것이 죄의 결과 심판으로 이어진다면 정작 살 수 있는 분들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그런 죄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지고 씩씩하게 살도록 위로해 주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단점이 없는 사람도 없지만 또한 장점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언제나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의 장점을 찾아서 가르쳐 주고 용기를 북돋아서 그가 자신감을 갖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 닮은, 긍정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많이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질병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위로와 격려는 경제적으로 강한 사람들, 정치적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과연 ‘나는 건강합니다, 나는 많이 소유했습니다. 나는 권력이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먼저 가서 상대가 누구든 간에 위로하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와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늘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즉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가셔서 위로하셨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었던 그들을 사랑하셔서 죄를 사해주시고 은혜를 베푸셨고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직접 찾아주셔서 그때처럼 위로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면 오히려 당시의 이스라엘보다는 100배, 1000배는 더 충성하고 헌신하고 목숨도 내 놓을 수 있을 텐데 굳이 힘없고 능력 없는 나, 보잘것없는 우리를 보내시고자 하시는지 답답합니다. 그러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산에는 메아리가 삽니다. 그 메아리가 참 재미있습니다. 아! 하고 부르면 아! 하고 대답하고 어! 하고 부르면 어! 하고 대답합니다. 좋은 말을 내 놓으면 좋은 말이 되돌아오고 나쁜 말을 던지면 나쁜 말이 더 크게 돌아옵니다. 메아리를 생각하면 외치는 자의 소리는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데 세상을 향하여 어떻게 살 것이며, 세상 사람들을 통하여서 다시 돌아오는 내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볼 것인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해야 합니다. 눈물을 위로하고 슬픔을 위로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전도의 한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로하고 이웃을 위로하며 성도 간에 서로 위로하면서 사는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사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구원을 선포합시다
  본문 3~4절"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업에 망하고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앉는 사람은 하늘이 무너진 듯 할 것입니다. 그 가족이 당할 피해와 아픔과 부도로 말미암아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상황들은 당사자로 하여금 살아 숨쉬기조차 힘들게 할 것입니다. 대학입시에 낙방한 학생이나 요즘 대학 입시 문제로 고통 받는 학생들 간에 목숨을 버리는 일들을 보면 모두 다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나버렸으면 하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끝날 때 세상도 함께 끝나주기를 바라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것 말고도 ‘차라리 오늘 세상이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극한의 경지로 몰아넣는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개개인의 책임이 너무 큽니다. 그 하나는 돈, 명예, 사업, 권력, 자식 욕심 등 허황된 것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미리미리 준비하지 못했던 연유에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바라보고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살 줄 아는 툭 터진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올 것에 대비해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며 장애물이 있으면 치우고 기다리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얼마 전 모 방송에서 미국 볼티모어 존스 홉킨스병원에서 수석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39세의 이승복이라는 한국인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후 의사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사람을 존스 홉킨스병원의 환자는 물론 모든 직원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위독한 상황 가운데 있는 환자와 어린 유아기에 암에 걸려 십수 년을 병과 싸워오고 있는 환자에게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말하면서 환자와 부모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애기 때 혹은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되어 자라온 40명의 학생들이 미 해군 사관학교를 다니는 데, 그 중 일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면서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면서 겪은 여러 가지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가운데 그들이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장애인 의사입니다. 그는 대한민국 체조선수로 15세 때에 올림픽경기 출전권을 획득합니다. 그러나 연습 도중에 목을 다치면서 양팔과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고 18세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 이민을 떠납니다. 그 후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콜롬비아대학 의대에서 공부하고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가 콜롬비아대학 의대에서 공부하던 때 그의 지도교수였던 현 의대 학장은 공부하던 시절의 그를 회상하면서 “다른 사람 같았으면 포기했을 텐데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정상인들도 힘들고 어려우면 포기하거나 꾀를 부리든 했는데, 그는 장애인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정상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서 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당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오래 전 겪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것 그것이 참 승리요 기쁨이기에 그는 그 고통 뒤에 찾아올 행복을 위해 자신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더 큰 일을 하고 싶어 준비 중에 있습니다.”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승리의 면류관을 위해, 구원의 달음박질을 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달음박질하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생각하며 회개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상당히 바쁘다고 합니다. 혹 부인들은 집안 일로 인해서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아이를 돌봐야 한다든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며 전도자의 전도를 거부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삶 가운데 펼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기에 마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뭐가 그리 바쁘던가요? 여러분의 옛 일을 돌아보아도 어디 그렇습니까? 그때 그 일로 인하여 뒤집어질 만큼 대단한 일이 벌어지던가요? 그때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변화가 오고 가정에 역사가 일어나고 집안이 바뀌고 나라가 확 바뀌던가요? 절대 아닙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그 구원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도 준비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웃에게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구원을 선포하여 하나님을 믿게 하십시다. 그리고 세상에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십시다. 이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본문 7~8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는 여기 인간의 무상과 나약함을 묘사함으로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포로 되어 간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원주민들에 비해 정신적인 면에서나 문화생활 등 모든 면에서 위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이사야는 다윗의 시(시 103:5)를 인용하여 인간의 모든 영광이나 부귀는 초로 같으니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이 세상 모든 것 중에서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이기에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꽃같이 아름다웠던 여인의 용모도 세월이 흐르면 볼품없어지고 얼굴 가득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등은 굽게 되어 있고 모든 뼈들은 그 기능을 잃어버려 결국 걷기도 조차 힘들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밟히고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잡초 같이 강인하고 기개 있던 남성들의 젊음도 한낱 꽃처럼 시들고 풀처럼 말라 사그라지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또 평소 그렇게 중요하다고 아둥아둥 모으고, 지키고, 쫓던 것들도 알고 보면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영원히 곧게 서서 영원토록 변함없으실 뿐만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좌절하고 지치게 되는데 그것은 허망한 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은 다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있기에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 말씀을 따라 살면서 인생길을 걸으면 결국 새 힘을 얻게 되어 ‘날아오르는 독수리같이’ 힘차게 승리하며 살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한한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힘은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있다고 해서 감이 떨어져 그 입에 들어가지듯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욱 그 힘은 하늘에서도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 당시부터 내 안에 잠재해 있었던 힘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새 힘은 무궁무진하게 용솟음칩니다.
 
  인간은 자기가 타고난 잠재 능력의 10%만 활용하고 죽어도 천재라고 평가 받는다고 합니다. 7% 정도만 활용해도 그 사람은 수재로 분류됩니다. 반면에 보통 사람은 겨우 5% 정도 활용하는데 그것조차도 쓸데없는 곳에 쓰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똑바로 한 길로만 걸어가기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여기 저기 헤메봐야 결국은 이루어질 것이 없습니다. 길은 오직 하나 뿐,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이 궁극적 목표가 될 때 내 안에서 저절로 힘이 용솟음치고 많은 일을 해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끄트머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볼 수 있었던 하나님 나라입니다. 또한 그 분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셨습니다.

  나를 향해 한번도 실망시킨 적 없으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 영원히 그 말씀에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으신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그리고 세상에 선포합시다. 함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자. 그래서 승리의 면류관을 얻자고 말입니다.
  P.B. 셸리가 쓴 ‘오지만 디아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고대 대륙에서의 한 여행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막을 여행하던 중 하나의 커다란 석상을 발견했습니다. 발견 당시 그 석상은 돌로 된 커다란 다리가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고, 머리는 몸체와 분리되어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을 뿐 아니라 아주 보기 흉하고 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석상의 주춧대 표면에 쓰여 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왕 중의 왕인 나는 오지만 디아스다. 나의 과업과 이 강대함을 보라. 온 인류가 나를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석상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람세스 2세를 가리키는 이 위대했던 왕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자신의 위대함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누가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한 분이라도 그를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인간은 죽으면 물론 얼마간이야 가겠습니만 영원히 기억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의 부귀와 영화 또한 한때 피었다가 지는 들풀과도 같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허탄한 인생 가운데 홀로 변치 않고 영영히 서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참 지났습니다만 본당 로비에 어느 그룹에서 아주 훌륭하게 꽃꽂이를 한 후 예쁘게 자리를 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애기들의 손바닥보다 더 자그마한 해바라기 꽃이 함께 어울려 있었습니다. 앙증맞을 정도로 아주 작은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주 작은 이 꽃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해를 바라봐야 해같이 빛을 발하고 방긋방긋 웃는 자신의 모습을 뽐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해바라기가 원하는 해가 그 시간에는 없었습니다. 이렇듯 한낮 미물도 해를 바라보지 못하면 고개를 숙이고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이치일진대 가장 훌륭하게 지음 받은 인간은 더더욱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는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는 믿겠다. 몸과 영혼이 갈라질 그날까지, 모든 것은 다 지나가 버릴지라도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번동 가족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세우신 몸된 교회를 중심으로 산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내 중심적으로 살아왔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지나온 세월들을 돌이켜보며 자만과 교만에 빠진 사람은 필경 내가 많은 일을 했노라 하겠습니다만 정작 하나님과 세상을 전도시키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세월만 보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라도 말로만 하나님의 나라와 몸된 제단의 부흥과 성장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십시다. 물론 하나님의 음성 이상의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입술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이웃의 아픔과 눈물을 위로하며 사십시다. 구원의 하나님과 좋은 소식을 전하며 사십시다.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살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과 가정과 교회 위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문대식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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