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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구원 (삼상 14:1-15, 롬 8:26-30, 눅 22: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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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죽음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합니다.

사실 인류가 이 땅에 살아온 이래 죽음보다 더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상 삶에서 죽음을 초월한다든지 극복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작년에 작고한 구상(具常, 1919-2004)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 인격이나 삶 특히 신앙이 마치 수도사나 성직자와 같다고 할 만큼 고결한 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사랑했고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그가 별세한 후 정부에서는 “국민금관 문화상”을 추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분은 한평생 질고와 싸웠습니다. 수없이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삶이 바울이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고 했듯이, 그리고 “내가 약할 때 주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했듯이 그의 인생을 더욱 거룩하고 값지게 연단했습니다.

그분은 평소에 “나는 오늘 죽어도 후회 없이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겠습니까? 그의 대표 시 가운데 “오늘”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좀 길지만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신비의 생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 아득한 큰 바다에 이어져 있듯 /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 부터가 아니라 /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을 체득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인이기 때문에 “나는 오늘 죽어도 후회 없이 갈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미 죽음문제를 해결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사울이라는 이 사람은 그가 왕으로 국민 앞에 그야말로 화려하게 데뷔함으로 모든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정상에서 자기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서 까지 지상의 권력에 집착하여 모든 인간관계가 파탄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종말은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죽음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삶에도 실패했고 결국 죽음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요나단이라고 하는 훌륭한 왕자가 있습니다. 저런 아버지 아래 어떻게 저토록 훌륭한 왕자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라고 할 만큼 요나단은 훌륭한 왕자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신앙에 있어서 투철했고, 그 신앙을 토대로 아버지가 원수로 여기는 다윗과 형제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서 신앙으로 대처하고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존중했기 때문에 그는 나중에 비록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기는 했지만 그의 죽음은 아버지 사울의 죽음과는 또 다른 숭고한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그의 훌륭한 신앙에 근거한 다윗과의 인간관계는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죽음도 그토록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죽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즉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야 삶도 죽음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 1절에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로 건너가자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 즉 사울과 요나단을 대조적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신앙에 있어서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사울은 오직 자기가 절대군주로 군림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왕을 구한 것이 죄였듯이 사울은 하나님이 왕으로 계셔야할 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다윗을 그토록 박해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가 왕이 되려고 하는 거기에 온갖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이 아버지가 그토록 미워하는 다윗을 옹호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통해서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이 자기 왕국을 세우려고 했으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먼저”의 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 사울과 요나단은 그 확신 또는 소신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2절에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군 사령관으로 확신을 가지고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하고 통솔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다”고 했다. 여기 “변두리”라는 말이 귀에 많이 거슬립니다. 중심에 서야할 사람이 변두리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지휘해야할 장군이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러있다”고 했습니다. 도무지 전쟁할 의욕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말에 “강장 밑에 약졸 없다”고 했는데 지휘관이 저 모양이니 군대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전국에서 모병한 군인들 가운데 다 도망가고 불과 6백 명만이 사울 곁에 있습니다. 적군인 블레셋의 군세는 어떠합니까? 13:5에 “병거가 3만, 마병이 6천,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고 했습니다. 이러니 더군다나 믿음 없는 사울로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모습은 이런 사울과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본문 1절에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 보좌관 한 사람만 데리고 단신 적진으로 들어갔습니다. 왜 왕인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아버지는 전의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의 이 일은 무모하고 위험한 돌출행동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요나단의 신앙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결단하고 취한 순교적 용기였습니다.

요나단이 막강한 적군의 사정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승패가 군대의 많고 적음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존재의 근거요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6절에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a.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한 것은 나중에 다윗도 역시 골리앗을 향하여 나갈 때 한 말인데, 감히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데 대한 의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런 따위의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b.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 하신다!” 이 보다 더 큰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c. “여호와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요나단은 먼저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아니 지금 이스라엘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에는 전혀 문제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블레셋의 군세가 이스라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막을 수는 없다는 확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숫자 놀음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로 하여금 대제국 애굽의 바로를 물리치고 탈출에 성공하도록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5천명 이상 되는 군중을 먹이신 주님이십니다. 120명의 예루살렘 교인들이 성령 충만 받고 나서 3세기가 다 가기 전에 로마를 정복하도록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우리 능력의 결핍은 결국 우리 믿음의 결핍을 말합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3) 사울과 요나단의 차이는 기도에도 나타납니다.

사울과 달리 요나단은 일을 하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10절에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표징을 요구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 주세요”하고 표징을 구했을 때 그 구하는 대로 표징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도 턱없는 적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모한 것 같으나 그가 한 일은 철두철미 믿음에 입각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 복음 성가에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 오늘 받을 은총위해 기도했나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먼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 일을 하면서 기도 없이 나서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잘못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기도와 함께 순종을 했습니다. 그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적군에 비하여 중과부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표징을 주셨을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4절 마지막에 “이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고 했습니다. 보세스는 “미끄럽다”는 뜻이고 세네는 “가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요나단이 손발로 기어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군세에 있어서만 절대 불리 할 뿐 아니라 진영도 블레셋이 절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순종하여 수행한 전쟁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그 믿음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14-15절에 보면 단 두 사람이 적진에 뛰어들어 엄청난 전과를 거두었으며 그 결과 블레셋 진영에 큰 공포가 임했고 심지어 땅도 진동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믿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그리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은총과 능력으로 구원의 큰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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