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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요 7: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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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굉장히 무더습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 강릉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덥습니다. 연일 온도가 섭씨 35도까지 올라가고 있습니다. 밤중에도 더위가 꺽이지 않아 많은 분들이 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이런 더위 속에서 우리 삶에 꼭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더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반드시 꼭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입니다.

사람과 물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 육체의 70%이상이 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람은 무엇보다도 물이 없이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물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이 얼마나 소중한 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까지 말한 것입니다.
일찌기 큰 강변에서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성지순례중에서 저는 아프리카 이집트의 카이로나 룩소에 피라밋이나 왕들의 무덤굴이나 태양신전들을 보고 놀랬습니다 B.C. 2,500년전에 그렇게 거대한 일들을 어떻게 했을까 불가사이한 일임을 생각하면서 나일강 변이 세계 최대의 인류문화의 발상지임을 생각했습니다. 중국의 황하유역 등이 문화 발상지였는데 다 강을 끼고 그렇게 발달된 줄 압니다. 그렇게 오늘날에도 선진화의 부흥을 나일강의 기적이니 한강의 기적이니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건설한 최초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에덴동산에도 물이 풍성했습니다.

창 2:10 이하에 에덴동산에는 4대 강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비손 (2) 기혼 (3) 힛데겔 (4) 유브라데 강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물이 많은 경우는 다행이지만 물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는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서 제일 감명깊에 본 곳이 맛사다라는 곳입니다.

'맛사다(산의 요새)'라는 요새에 오를 수 있었는데 참으로 더웠습니다. 이 요새의 높이는 사막에 약 400미터 높이의 바위로 된 요새입니다.이스라엘의 요나단과 헤롯왕에 의해 세워진 요새입니다. AD.66-73년 동안 유다의 열심당들이 로마를 반역하여 이 요새를 점유하고 7년 동안 대치하고 있었는데, 로마의 성벽을 깨뜨리는데 성공하므로 그 요새에 있던 반역군 960명이 자살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스라엘의 사관학교 생도들이 여기에 와서 정신교육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막 한 가운데 깍아지를듯한 바위 요새에 커다란 물탱크가 있습니다. 몇백명이 수년을 먹을 수 있도록 바위로 된 물탱크에는 사막에 만든 물 저장고에서 이곳까지 수로를 만들어서 보관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 곳에서 느끼는 것은 어떻게 이 사막 한 가운데 요새에 저렇게 물탱크를 만들어서 생활할 수 있을까 정말 놀아왔습니다. 그당시에는 기술이나 도구도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였을 것입니다.여러분 사람들이 다른 것은 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물이 없으면 우리는 죽고 맙니다.그래서 물을 찾고 구하게 됩니다.

유대땅에 오신 예수님은 물을 배경으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물을 통해서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4:14에서 “이 물을 주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우리 육체의 목마름이 있듯이 우리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육체의 목마름은 물을 마시면 해결이됩니다. 그러나 진작 문제는 우리 영혼의 타는 목마음 그 갈증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영혼의 갈급함 우리 마음의 목마음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1.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에게 나와야 합니다.

요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만일 물이 없어 목이 마른 사람이라면 먼저 물을 찾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물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물은 내 눈으로 볼 수 있고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목마음을 해결하고 인생의 갈증을 해결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 와서”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때의 상황을 보시기 바랍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라고 합니다.
여기 이 명절은 유대인의 대표적인 명절인 초막절입니다.이 명절을 우리는 수장절 추수감사절이라고 합니다.
레위가23:33-36절에 보면 초막절의 의미가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칠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것이요, 제팔일에도 너희이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 당대에도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명절은 8일동안 지켰습니다. 제 8일이 성회가 되고 그날에는 화제를 드리고 그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안식교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그러나 칠일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마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8일째 초막절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까? 8일째되는 날을 초막절로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쉬시지 않고 구속 역사를 위한 일을 계속 하셔야만 했습니다. 새창조를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예수님께 왜? 안식일에 일하시느냐고 묻자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쉬시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팔일입니다. 이 팔일이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문둥병에 걸린 자가 다 나았을 때는 제팔일에 제사장에게 가서 제사를 지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초막절을 팔 일에 지키는 것은 바로 완성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들의 대표적인 명절이 3가지입니다. 그중에 유월절이 있습니다.
유월절이 시작이라면 마침은 초막절입니다. 추수는 가을의 수확기인 초막절에 합니다. 이렇게 초막절과 유월절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을 지킬 때에는 유월절을 상기하면서 지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은 분명히 가장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집 밖으로 나가 초막을 짓고 거기 들어가서 지내게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거둔 수확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뿌린 것의 결실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으로써 절기를 설명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기를 유대인들이 지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마음이 공허하고 갈증이 많습니다. 열심히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데 왜 마음이 답답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의 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고 오히려 수고는 하면서도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짐 답답하고 껄껄한 심령을 향해서 주님은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유대인들은 주님에게 나오지 못했습니다.

40-4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해 혹은 선지라고 합니다.혹은 그리스도인 것 아닌가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출신 배경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합니다. 그러면서 논쟁하고 오히려 그 중에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오는데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지식이 문제가 됩니다. 종교가 문제가 됩니다. 그릇된 신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돈이 없어서 나오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혹시 우리 중에 아직도 교회당에는 나왔지만 예수님에게로 나오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많은 경우에 현대인들의 경우에 스트레스가 문제입니다.
이 스트레스는 마음의 짐입니다. 마음의 고통입니다. 마음의 독입니다.

그런데 이 스트레는 그대로 몸에 치명적인 병을 가져다 줍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파의 활동을 바꾸어놓습니다. 면역기능을 떨어뜨립니다. 피의 공급과 혈압을 높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스트레는 모든 병의 50-80%가 스트레스로 온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의 대표적인 질병인 암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습니까? 휴가를 가서 해결이 됩니까? 노래방에 가면 해결이 됩니까? 잠을 자면 해결이 됩니까? 물론 부분적인 인생의 스트레스들은 이렇게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근본적인 마음의 짐 인생의 짐이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나오라고 합니다.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큰 짐이 나를 힘들게 할때에도 먼저 예수님에게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에 힘이 들고 방황하고 고통스러울때 먼저 우리 주님에게 나오시기 바랍니다.매일 매일 힘들고 어려운 삶의 자리에서 괴로워하고 눈물만 흘리지 말고 우리 주님에게 나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마음과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로운 인생길에서 주님에게 나오신 분들은 마음에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마음에 쉼을 얻을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영혼이 물댄동산같이 위로부터 주시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2.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37절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합니다. 여기 마시라고 하는 것은 38절에 믿는 자와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물을 마시듯이 내 안에 받아들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실 때 기갈이 해결됩니다. 이렇듯이 영혼의 목마름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 목마름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에게 나와서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받은 사람들은 전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믿음대로 병고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은 병을 고침받았습니다. 믿음대로 마음에 목말라하는 사람은 영혼의 치유를 경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보았듯이 38년된 병자가 목마음이 해결받았고 수가성의 만난 남편을 6명이나 두었던 죄인인 여인의 목마름이 해결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인생의 목마름 문제가 해결받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경우에 예수님을 믿는데 가장 방해물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의롭다고 믿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태도였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반응은 자기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치고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거역하고 죽이려고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히 자기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자기들에게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한마디로 우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기들에 대해서 의인이라고 하는 대단한 신념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태도를 잘 나타나는 내용이 말씀됩니다.
두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엿느니라“
여기 바리새인을 보면 “같지 아니하다”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란 뜻은 “구별되다”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지 않다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낫다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자기들이 우월하고 괜찮은 사람입니까? 자기들이 행한 행동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하지 않습니다.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금식했습니다. 우리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행동한 우리정도면 우리는 괜찮은 사람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대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거룩한 사람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삶은 항상 ‘나’를 앞에 새웁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금식하고 나는 십일조를 드리고 하면서 나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바리새인들을 평가하십니까?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잔과 대접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잔과 대접을 깨끗이 하는 것은 바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차다고 책망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안을 먼저 보십니다. 우리 마음에 먼저 믿음으로 채워지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먼저 주님이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누가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내 안에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먼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요 내가 못난이요 내가 부족한 자임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내가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 중에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 중에도 예수님을 마음에 믿음으로 어떤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복을 이땅에서 누리면서 살게 되니 얼마나 은혜입니까?

예수님을 내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삶 속에서 인정하면서 살게 되면 우리에게 오는 가장 큰 복이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삶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삶이 두렵지 않습니다. 물로 이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부분적인 불안한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모든 삶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시간 아직도 내안에 마음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마음에 믿지 못하신 분들이 있다면 지금 나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믿으시기를 축원하겠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기도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습니다.

3.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영혼의 생수인 성령을 통해 해결됩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의 갈증이 어떻게 해결이 될까요?
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성경에서 주시는 신령한 복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십니다. 이미 구약성경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이 바로 심령의 복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수같이 주어질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구약 에스겔 47장에 보면 생수의 강의 환상을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환상을 보여 주시므로 생수가 흘러 넘쳐야 이스라엘 이 살 수 있다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포로가 되어 영혼의 목마름이 있었고 삶의 간절한 목마름이 있엇을 때입니다.
그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환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에스겔 47장 1절에 생수가 오직 하나님 성전 성소에서 흘러 나왔습니다.그리고 흘러가는 생수가 일천척을 측량하니 물이 발목에 오릅니다. 그리고 다시 일천척을 측량할 때 물이 무릎에 찹니다.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니 물이 강이 되어서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됩니다. 그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습니다. 이 물이 흘러가 닿는 곳마다 강물이 살고 바닷물이 소성케됩니다. 이 생수의 강물로 말미암아 어부가 살고 고기가 살고 각종 나무가 살고 과일이 살아납니다.

여러분 이 생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생수는 말세 성도에게 주어진 성령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7장38절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우리가 에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을 성령은 마치 생수와 같습니다.
여러분 생수는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까?생수는 살리는 기능이 있습니다. 생수가 닿는 곳마다 강이 살고 바다가 살고 고기가 살고 나무가 살고 과일이 살아나듯이 성령은 생수와 같습니다. 성령의 생수가 닿는 곳에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심령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생수와 같이 우리의 심령에 닿을때 우리의 감정이 살아나서 기쁘고 즐거워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생각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의지가 살아나서 하나님의 의지가 있는 새사람으로 새로워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다음에 생수의 기능은 더욱 충만할 수록 그 능력이 배가됩니다.
여러분 생수가 발목에 있을때와 허리에 있을때에와 온몸에 차고 넘칠때에 그 힘이 다릅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가 더욱 충만하게 받아 충만한 상태가 되면 더욱 풍성한 삶을 우리 삶에서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성령이 충만하여질때 마음에 갈등이 없습니다. 목마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풍성한 생수와 같은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내가 믿고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면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령의 생수를 풍성하게 먹고 마시면서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으셨다면 이제 구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이땅에서 그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풍성함이란 마치 차고 넘치는 강물에 내가 헤엄을 치면서 강물과 함께 하는 것처럼 성령과 함께 행하면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성령님으로 우리가 채워지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태도가 달라집니다. 사용하는 말들이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해서 태도가 달라집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죄에 대해서 달라집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서 죄를 짓겠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향해서 욕을 하고 범죄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풍성한 삶은 우리 성령의 능으로 할 수 있습니다.스가랴4:6에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충만한 말과 행동과 삶으로 살아가는 곳마다 생수같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이 일어나게 될줄 믿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위해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요즘 성령운동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베니힌이라고 하는 분의 성령운동을 동경합니다. 그분은 ‘안녕하세요 성령님’이라고 하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분이 성령충만을 말하면서 보트의 비유를 말합니다. 우리가 항해를 위해서 보트를 타야 합니다. 보트를 타기 위해서는 보트를 먼저 잘 준비해야 합니다. 잘 준비된 보트에 올라타면 함께 하나가 되어서 바다 위를 잘 항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트에 올라탄 사람이 하는 역할은 보트를 유연하게 순응해야 합니다. 바로 내가 그 보트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안에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내가 항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완전한 항복은 완전한 충만함을 가져옵니다. 완전한 순존은 완전한 친교를 가져옵니다.예수님 내가 항복합니다. 성령님 내가 항복합니다. 그분에게 나를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나를 맡겨야 합니다.오직 성령님께서 나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그분이 가는대로 나를 항복하고 위임할 때 여러분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갈급함 인생의 모든 목마름들이 믿음 안에서 성령충만함으로 날마다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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