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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넉넉히 이기는 비결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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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경기 중에 우리 나라하고 이탈리아와 경기가 있었다. 1:0으로 지고 있다가 결국에 2:1로 역전승하였다.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교회 뒷 마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보았다. 이탈리아의 감독이 물병을 걷어차고, 옷을 집어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로마에서 유학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때의 경험을 이야기 한다. 한국 사람들은 집안에 숨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슈퍼에 가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몇일 동안 보내지도 않았다고 한다. 왜 그랬는가? 패배한 분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해서 얼마나 기뻐했는가? 공짜로 설렁탕을 대접하는 식당도 있었고, 선착순 몇 명에게 갈비를 무료로 주는 식당도 있었다. 기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고, 자동차 경적을 울리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패배의 아픔과 승리의 기쁨이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난다. 한번 밖에 살지 않는 인생. 길지 않고 짧은 인생을 사는 사랑하는 성도여! 패배의 인생이 되지 말고, 승리의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로마에 해골사원이라는 곳을 방문하였다. 이곳은 4천명의 유골로 장식해 놓은 특이한 곳이다. 이 사람들은 수도사들이었다. 입구부터 해골과 다양한 뼈들이 가득하다. 나는 내 몸에 이렇게 큰 뼈가 있는 줄 몰랐다. 이렇게 큰 뼈가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았다. 이것이 바로 골반뼈라고 한다.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이 골반뼈는 제법 크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산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사원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신의 지금 모습은 지금까지 살아온 결과입니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내일은 결정됩니다. 100년 내에 우리 모두는 이렇게 이름 모를 뼈로 변할 것이다. 내가 과연 승리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패배의 삶을 살 것인가는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사는가?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나는 이 해골을 보면서 내가 좀더 진지하게 살아야겠다. 좀더 의미있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패배의 인생을 살지 말고, 승리의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패배의 삶을 살게 하는 환경인가? 환난과 곤고함이 우리의 인생을 패배의 삶으로 마무리 짓게 하는 환경이 될 수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하루 아침에 장애자가 될 수도 있다. 건강하게 살 줄 알았는데 몸에 이상이 생겨서 불치의 병이라는 진단을 받을 수도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닦았다. 그런데 원하는 대학 입시에 떨어졌다. 환난을 당해서 패배의식에 젖어들 수도 있다. 이태리에 성악으로 유학온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학교를 졸업해도 그들은 계속해서 고민을 한다. 좋은 성악가가 되었는데 진로 때문에 힘들어 하는 유학생들이 그렇게 많다. 여행사 가이드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기도 하고, 여학생들은 배낭 여행온 학생들을 위해서 도시락을 싸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도시락 20-30개를 들고 버스타고, 전철타고, 걸어서 약속장소까지 배달해 준다. 너무나도 힘이 들고 지친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면서 패배의식에 젖어들기 쉽다.

환난과 곤고함은 우리를 패배의식에 젖게 하는 환경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패배의식에 젖게 하는 또 다른 환경은 핍박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한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의 박해가 너무 심했다. 불에 태워 죽이고, 껍데기를 벗겨서 죽이고, 말할 수 없는 핍박이 벌어진다. 이러한 핍박받는 모습을 보고서 베드로는 패배의식에 젖어서 로마를 피해서 도망간다. 도망을 가던 베드로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난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ㅆ이 말이 바로 쿼바디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피해서 도망간 로마로 내가 들어간다. 그곳에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로마로 돌아간다.” 이 음성을 듣고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다시 로마로 들어간다. 결국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다. 핍박은 우리의 인생을 패배의식에 젖어들게 하는 환경이 된다.

기근이나 적신. 즉 배고픔의 문제이다. 물질적인 문제이다. 돈이 좋기는 좋다. 돈이 많으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산다. 돈이 많으면 사람들이 무시하지도 않는다. 돈이 힘이다. 돈이 성공의 기준처럼 보인다. 돈이 없으면 실패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배고픔. 아무것도 걸치지 아니한 붉은 몸. 가난이라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패배한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환경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의 말씀을 하셨다. 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연다. 고급 옷을 입었다. 궁궐과 같은 집에서 음식을 잔뜩 차려 놓고서 매일같이 잔치를 벌인다. 그런데 이 주변에 나사로라하는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대문에 누워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한다. 개까지 와서 아픈 데를 핥고 지나간다. 부자와 거지를 보라. 부자는 성공한 사람이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거지는 망한 사람이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기 쉬운 환경이다. 노숙자들에게 가서 물어보라. 당신은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면 패배한 사람인가? 이렇게 물어보면 어느 한 사람도 승리한 인생이요,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많은 물질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위험한 순간. 내 앞에 칼이 있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없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승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칼을 앞세워서 쫓아왔다.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나는 이제 할 일을 마쳤으니 이제 죽여 달라고 애원한다.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이겼지만 이세벨이 칼을 앞세워서 죽이겠다고 좇아오니 로뎀나무 밑에서 나를 죽여 달라고 말한다. 이같이 우리 앞에 놓여진 위험한 순간. 우리 앞에 놓여진 칼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낀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는 환경이다.

중고등학교 때의 경험이다. 시장 한 복판을 걸어가는데 몸이 좋은 어느 청년이 내 옆으로 다가온다. 칼을 꺼낸다. 그리고 내 허리에 갔다 덴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 그것도 바로 집 앞에, 아무런 일도 없는 것 처럼 걸어간다. 그런데 내 옆에 이 나쁜 사람이 칼을 대고 있다. 얼마나 내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그래도 길을 잘 아니까 얼른 도망가서 피해를 보지 않았다. 힘이 없어 당하는 칼의 위협 앞에 우리는 패배의식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일본의 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치욕의 역사가 흘렀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았다. 6.25의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폐허가 되었다. 전쟁의 잿더미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패배의식에 젖어드는 환경이었다.
이같이 우리가 살면서 환난을 당할 때 있다. 핍박을 당하고, 돈이 없어서 배고프고, 가난을 면치 못하는 아픔을 경험할 수 있다. 강한 힘 앞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결박당하는 패배의식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패배의식을 갖게 하는 환경이다.

이렇게 패배의식에 젖어든 환경은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반항을 하지도 못하고,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죽음을 면치 못하는 환경이다. 환난 때문에, 가난 때문에, 여러 가지 위협 때문에 꼼짝 못하는 “도살할 양”같이 패배의 인생으로 끝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복음의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의 환경을 보라. 패배의식에 젖어들게 하는 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넉넉히 이기는 비결이 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다윗이 전쟁터에 심부름 때문에 나갔다. 가서 보니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일대 일로 싸우자고 제안한다. 어느 누구도 골리앗과 싸우려 나가지 않는다. 이 모습을 본 다윗이 사울왕을 찾아간다. “내가 나가겠습니다.” 다윗을 향하여 사울왕이 말하기를,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이라.” 다윗이 당차게 이렇게 대답한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다. 어떻게 곰의 위협으로부터 양을 지킬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양을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측량할 수 없는 에너지가 나온다. 원자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엄마가 밭에 일하러 간 사이에 딸이 큰 돌에 깔렸다. 장정들이 구하려 해도, 소방대 직원이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었다. 잿더미 속에서 살아나온 엄마가 딸이 큰 돌 밑에 깔린 모습을 보고 그 돌을 들어낸다. 엄마의 힘이 들어냈는가? 아니다. 엄마의 사랑이 큰 돌을 들어냈다. 다윗이 곰을 좇아가서 곰의 입을 벌리고 어떻게 구해냈는가? 다윗이 힘이 세서 그런가? 양을 향한 사랑 때문에 구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빈스 롬바디는 미국 프로 미식축구 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꼽힌다. 승률이 10%도 안 되던 ‘그린 베이 패커스’팀은 그가 지휘봉을 잡은 1959년부터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 60년대에는 승률 74%로 슈퍼볼 챔피언에 등극했다. 가장 위대한 코치로 기억되고 있는 롬바디는 선수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에게 무엇이 팀을 승리로 이끄느냐고 질문했더니 ‘뛰어난 선수들’과 ‘뛰어난 감독’ 그리고 ‘선수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느냐’라고 대답했다. 프로선수들은 승리의 상금, 우승팀의 영예, 유명세 등은 모두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결판이 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상대를 막지 않으면 내 사랑하는 동료 폴의 다리가 부러지겠지?’하는 사랑의 마음이 가장 강한 동기를 불어넣는다고 한다. 그래서 롬바디를 ‘사랑의 코치’로 불렀다.

이 세상은 환난을 당하면, 곤고한 일이 생기면, 가난하여 돈이 없으면, 위협이나 칼을 통해서 무기력해지면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다르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인생 승리와 패배의 차이는 지금 잘 나가는가? 아니면 환난을 당하고 있는가? 여기에 있지 않다. 내가 지금 많은 돈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가? 여기에 있지 않다. 내가 지금 안전한 곳에 있는가? 아니면 위험한 곳에 있는가? 여기에 있지 않다. 어떤 환경에 있어도 내가 지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확신한다면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될 줄로 믿는다. 세상에서는 넉넉히 이기는 비결이 많은 것을 갖고 안정적이면 거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주시는 메시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다. 이것을 붙잡으라. 이것을 놓치면 많은 것을 가졌어도 패배의 인생을 산다. 예수의 사랑을 붙잡으라. (곽 주 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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