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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휴가의 신앙적 의미 (막 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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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7월 넷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마을에 네 사람이 빵집을 개업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고 했고, 두 번째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고 했고, 세 번째 사람은 우주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네 번째 빵집으로 몰렸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있는 곳을 보다 좋게 만드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무더위와 함께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동안 삶의 자리에서 땀 흘리며 최선을 다하여 수고했던 사람들에게 휴가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시편 23편 1절~2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목자 되는 하나님은 양 떼들을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했으면 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휴식을 제도상으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제 4계명에서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는데 이 계명의 요지는 ‘일하라’와 ‘쉬라’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일하고 온전히 쉬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시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일의 노예가 되지 말며,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주셨고, 안식년울 주셨고, 희년을 주시고 장차 영원한 안식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휴식은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보내는 바캉스의 의미만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의 휴식입니다.

바캉스란 말은 프랑스어로 “비운다”라는 뜻입니다. 여름철이 되면 파리의 시민들이 거의 모두가 며칠씩 혹은 한달씩 집을 비우고 휴가 여행을 떠나므로 파리 시내가 텅비어짐으로 생겨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바킹스 바람이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 사회에 불어오면서부터 여름에 휴가를 못가면 무슨 큰 억울한 일이나 당하고 있는 양 부인들이나 아이들이 남편들을 들들 볶는 풍속도가 가정들마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휴가에서 돌아와서는 교통전쟁, 인파전쟁, 쓰레기전쟁, 무질서전쟁에 지쳐서 휴가가기 전보다 더 지치고 피곤하여 삶의 의욕을 앓어버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휴식은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의 휴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영혼의 상처와 피로한 심신을 회복하고 새 삶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복음 사역에 수고한 제자들에게 휴식을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쁘게 달려가던 길 잠시 멈추어 서서 휴식하므로 보다 더 슬기롭고, 건강해 지며, 새로워져서 영적으로도 성장하는 여름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도의 휴식은 안식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휴가는 휴식이 아니라 안식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쉬라는 명령이 많이 나옵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쉬라고 하셨고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같은 명절을 당하면 한 주간씩 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6년을 일하고 7년째 되는 해에는 안식년이라고 1년 내내 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안식년이 7번 반복되는 50년째 되는 희년에는 큰 안식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마음의 공간 혹은 마음의 여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기독교 작가는 성경적인 안식을 가르쳐 “창조적인 괄호”, 혹은 “창조적인 쉼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반드시 쉼표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쉬어야 할 때입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방글 방글 웃고 있는 아이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에 비치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고 전화도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슬픈 영화를 보아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슬픈 연속극을 보면서도 저것은 극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같고 맑은 날과 비 오는 날도 같고 산이나 바다에서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그 동안 당신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쉬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글은 읽으면서 아! 지금은 내가 쉬어야 할 때 이구나 느껴지지 않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부터가 해당 사항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잘 쉬는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한자로 휴가의 휴(休)자는 사람인(人)변에 나무목(木)자가 놓여서 된 글이고 가(暇)자는 여유롭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무 즉 자연과 함께 여유를 갖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옛 어른들은 휴가를 자연 속에서 조용히 묵상하고 나를 쉬게 하며 생각과 정서와 영혼의 여유를 갖는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휴가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자신을 학대하고 휴가후에는 더 피곤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이 잘 쉬지 못하고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탐욕입니다.
스스로 만족을 모르는 소유의 욕구가 탐욕입니다. 원한다고 다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야 말 것처럼 욕심을 부립니다.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 합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만족하며 감사하고 자족하는 비결을 깨우쳐야 참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늘 남과 나를 비교하는 데서 옵니다. 내가 특별히 못나지도 않았는데 남과 비교해보면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더 잘사는 사람들을 보면 배가 아프고 헐뜯고 깎아내리야 시원합니다.

셋째는 분노입니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혈기를 내고나면 며칠씩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나의 혈기로 상처받았을 상대방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고, 성숙하지 못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잠 못 이룹니다.

넷째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살면 되는데 스스로를 높이고 있는 체, 배운 체, 아는 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갈등과 공허는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내가 주 안에서 쉼을 얻기 까지는 진정한 안식을 얻지 못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곳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안에 있어야 평안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쉼을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홀로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진노와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곳에 가서 쉼을 구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의 휴가가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휴가는 하나님의 치유의 시간입니다. 출애굽기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톨스토이는 숲 속을 산책하며 살아있는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초목과 새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만족스럽고 평화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탐험가 문그파크의 <탐험일기>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며칠째 돌과 흙뿐인 황량한 광야를 걸어가던 파크는 문득 발밑에 아주 작은 파란 들꽃 한 송이가 피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큰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지위에 엎드려 작은 꽃에 입을 맞추며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휴식은 하나님의 치유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만 나면 한적한 산에 가셔서 지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삼림욕을 즐기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연과 흙 속
에 놀라운 치료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공기는 우리 폐에 알맞은 산소와 질소로 이루어져 온몸의 피로를 놀랍게 씻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가셔서 마음을 정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지셨기에 때로는 안타깝고, 속상화고, 분노심으로 시달리셨을 것입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섬기노라고 자부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모습 때문에 속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보내셨는데 그 독생자를 반대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모습을 보실 때 분노심이 넘치셨을 것입니다.

또한 군중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는 딴청을 부리다가 병고치고 기적을 행할 때는 열광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셨을 때에 실망감을 금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 중에 귀히 여겨 회계를 맡겼더니 은30냥에 팔아먹으려는 모습을 볼 때에는 배신감에 시달리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66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곤경에 처하자 떠나가려 할 때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탄식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마다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 곳에서 기도와 명상 중에 마음을 정리하
시고 새롭게 다짐하신 후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마음이 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마음에 낙심과 안타까움, 섭섭함과 분노로 가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상처 때문에 교회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직장 생활과 사업 경영에도 나의 선한 의지와는 관계없이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코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탄마귀가 다만 인간을 통해서 우리를 낙심케 하고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적은 사탄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때는 예수님처럼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위로받으시고,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는 하나님의 치료의 은총을 힘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삶에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있다고 할지라도 신앙의 멍에를 풀어놓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쓰고 노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한적한 곳에서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아름다운 산과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파도의 출렁임을 보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소유가 아니라 나눔입니다.
우리의 휴가에는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이 베어 나와야 합니다. 이 정신은 나눔과 회복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휴가는 소유지향적인 휴가입니다. 자연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고, 나만 즐겁고 편하면 그만인 것처럼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려합니다.
그러나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정신은 사람과 동물과 자연과 참된 쉼과 해방을 얻는 것입니다. 출23:11에 보면 “제 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내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급히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놀라 묻자 간디는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쓸모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발 한 켤레를 제대로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동안 미처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깨닫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만 즐거운 휴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우리의 휴가비를 아껴서 선교지에서 휴가도 없이 수고하는 선교사들에게 선교비를 보내주고, 휴가비를 나누어서 나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봄으로 휴가가 끝난 후에도 기쁨이 충만하고 삶의 보람이 넘치는 생명력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의 휴가는 노는 것이 아니라 안식입니다. 성도의 휴식은 단순한 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치유의 시간입니다. 또한 소유가 아니라 나눔의 시간으로 하나님과 가족, 이웃과 자연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휴가입니다.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름을 맞이한 여러분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 명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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