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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고상한 지식 (빌 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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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은 사람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말하라면 이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성이란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는 능력. 또는 논리적․개념적 사유의 능력”을 말합니다. 동물은 아무리 지능이 발달한 원숭이라도 한갓 본능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며,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원숭이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먹는 생활을 하고 있을 뿐, 주거 환경을 개량한다거나 식생활을 개선한다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원숭이에게 그러한 개념을 떠올릴 능력인 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박물관에 가 보면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돌칼이나 질그릇, 움막 등을 시대별로 전시해 두고 있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문명의 발전 과정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지속적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이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지식을 찾아내고 이를 발전시켜 나갈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 종류의 지식

지식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대영 박물관에 가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출간된 책을 무려 천만 권이나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많은 노력과 비용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문이나 책을 보는 것에서부터 학자들이 밤잠을 설쳐 가면서 연구에 몰두하는 것도 알고 보면 지식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식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지식이 있는가 하면 고상한 지식도 있습니다. 전자는 이 세상에 속한 지식을 말하고, 후자는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이 세상 지식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식이 부족하면 불편할 뿐이지 치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다릅니다. 이 지식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세상 지식을 얻는 데는 그렇게 열심을 내면서도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신령한 지식을 얻는 데는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세상 지식의 한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엘리트로 꼽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이스라엘인의 혈통을 타고났고, 율법대로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엄격한 계율로 인해 유대인들 가운데 그 수가 겨우 6천명에 불과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또 당대 최고의 율법 학자였던 갈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일컬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한 것은 이 같은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긍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또 그는 유대교 뿐 아니라 헬라 철학에도 정통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당시 로마가 지배하던 세계 어디서나 신분이 확실하게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유대교의 수장인 대제사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에, 그는 이 같은 배경을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그 사건의 증인으로서 자처했던 일이나, 대제사장에게서 공문을 받아 다메섹까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달려갔던 그의 행적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과단성 있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행동은 젊은이의 만용이나 타고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지적인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배우고 연구한 율법 지식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은 잘못되어도 너무나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전하는 자들을 근절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지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철학이나 종교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그것 같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 지 못합니다.

만약에 세상 지식이 많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면 공부를 많이 한 석․박사들은 다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또 철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도 다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완고하게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령한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사람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지식이라면, 사람들이 무슨 방법으로 이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하신 말씀과 같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지식은 아무나 가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야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를 타고난 사람은 누구나 그 영이 죽은 자요, 본성이 부패한 자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죄와 허물로 그 영이 죽은 사람이요 영적으로 소경이기 때문에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9절로 11절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조상 대대로 유대교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살고자 힘썼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악한 그를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광채로 인해 그는 그만 시력을 잃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진 바울의 귓전에 주님의 위엄찬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제야 그는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고 유대 민족이 수천 년 동안 고대하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육신의 눈은 멀었으나 그의 영안은 어둠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밝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주님께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으며,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는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바울의 변화는 마치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는듯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사울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은 180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대적하고 복음에 원수 노릇하던 사람이 예수의 종이요 복음의 전파자가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의 지위, 학식, 로마 시민권, 종교적인 열심 등을 자랑하면서 살았으나,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 결과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이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저와 성도님들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그늘에 처해 있던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을 열어 복음을 듣게 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야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벅찬 감격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누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 보면, 남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짓던 한 농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밭을 갈다가 보화가 땅 속에 묻혀 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두고는 집에 돌아와서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또 귀한 진주를 찾아 헤매던 어느 진주 상인이 마침내 최상품 진주를 발견하고는 자기의 전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밭에서 보물을 발견했을 때 농부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최상품 진주를 발견한 상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덤덤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격과 환희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이 두 비유에 나오는 농부와 상인은 그리스도인들을, 보화와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주님을 믿으면서도 감격과 기쁨이 없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 “나도 과거에는 그런 적이 있었노라”고, “누구나 처음 믿을 때는 다 그런 법이라”고 말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마는,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몇 년 만에 바닥이 날 정도로 빈약한 것일까요?  주님께서 베푸신 천국 잔치가 그토록 초라한 것일까요? 그럴 리 만무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샘물은 한 평생 길어서 마시고 또 마셔도 영원히 마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천국 잔치는 온 인류가 다 참여하여도 조금도 축나지 않을 만치 풍성한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그 즐거움을 누리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다 통달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지식은 한없이 이어진 금맥과 같아서 우리가 일생 동안 힘써도 그 분량을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성도님들께서 누리시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더해 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마음속에 신앙생활의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권태와 불평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2-5)

이 말씀 속에는 칭찬도 포함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썼으며,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정작 성도가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을 상실했습니다. 오늘날도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랑은 곧 감격과 기쁨을 수반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이 다 구비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는 베풂은 값싼 동정에 불과하고, 사랑 없는 봉사는 자기만족과 과시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이 권면은 말세에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의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지적하실 때에 겸손히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안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그 가치관과 인생관에 변화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후에 현세 지향적이던 가치관이 내세 지향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며 살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은 곧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는 이 정도면 됐지 하는 계산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드리고 또 드려도 부족하게 생각되는 것,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생명을 희생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분량이 결코 큰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날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또 지난날 그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사도 바울은 사회적인 지위를 다 버렸습니다. 권리도 다 포기했습니다. 안일함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과 비교할 때에 세상에서 애지중지하던 것들은 냄새나고 더러운 배설물과 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면, 그토록 좋아하던 술이 보기도 싫어집니다. 술이 바뀐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이 바뀐 것이지요.

과거에 그토록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자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우상과 부적과 우상 숭배에 소용되던 기구들을 다 내다 버립니다.  그 우상 물건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젊고 장래가 촉망되던 상원의원이 그 자리를 박차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세와 명예와 부가 뒤따르는 상원의원 자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더 고귀하고 보람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였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가치관과 인생관이 새롭게 바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힘씁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내세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현세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천국 복음만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들을 치료하셨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 주셨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 되는 복을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바꿀 수 없는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먼저 영적인 복을 받는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 되는 복을 받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순서가 뒤바뀌면 문제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 많은 재물 때문에, 그 육신의 건강 때문에 정욕을 따라서 살다가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이 땅에서 잘된 것이 도리어 영적인 복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영적인 것을 택하고 육적인 것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 것은 잃어버려도 괜찮지만 영원한 천국을 상실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큰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때를 대비하여 분명한 태도를 정해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소유한 성도님들은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가장 복되고 고귀한 행복을 소유한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8-10)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성경을 읽으십시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스러운 인격적인 만남을 갖기 위해 복음서를 많이 읽으십시오. 이 세상의 그 누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하고 의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신비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후 시장끼를 느끼신 것이나, 갈증을 느끼신 것이나, 오랜 여행으로 인해 피곤함을 느끼신 것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참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다 위를 걸으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 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갈릴리의 어부들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는 마태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사상 이처럼 자기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을 당당하게 요구한 위인은 없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더 큰 감격과 경이로움을 더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이 지식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만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알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성도님들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버리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요, 천국을 상속할 사람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이 고귀한 진리 위에 굳건히 서서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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