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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다 많이 드린 자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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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합니다. 이왕이면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다가 끝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여 세워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녀답게 살아야 하며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려야 될 모든 복을 또한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녀다움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도 포함이 됩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은 말씀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으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여 수고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야 함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할까요?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중심은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가운데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는 곧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향해야 될 우리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지쳐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험하고 위험하다고 해도 아무리 가진 것이 없고 삶에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담대히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1장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우리는 조금도 의심치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다 보면 성전 제일 바깥쪽으로 이방인의 뜰이 있고 그 안으로 여인의 뜰이 있는데 그 여인의 뜰에 헌금 궤가 놓여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정성스런 손길로 헌금 궤에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다가 부자들이 헌금 궤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틈에 어떤 가난한 과부도 렙돈 두 닢을 넣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여기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분명 부자들이 헌금 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지위를 나타내듯이 상당한 액수였을 것입니다. 반면 가난한 과부는 찢어질 듯이 가난했기에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극빈자였기에 저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겨우 렙돈 두 닢이었습니다. 이건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아니 비교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액수만 가지고 따진다면 부자가 드린 것은 이 가난한 과부가 드린 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부자는 넉넉한 가운데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다고 해서 생활에 어떤 영향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그만큼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는 어떻습니까?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 드린 헌금은 렙돈 두 닢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가 렙돈입니다. 그냥 쉽게 말해서 오백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렙돈 두 닢이라야 1000원인데 1000원이 하루 생활비의 전부라니요? 그러니 이 과부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루 천원이라면 한달 3만원입니다. 한달 생활비가 3만원인 여인입니다. 도무지 저의 형편으로서는 단 한푼의 헌금도 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루종일 굶을 것을 각오하고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드린 그 마음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가 부자들보다 더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은 마음입니다. 자기의 가진 것 전부를 다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온 종일 굶을 것을 각오하고 가진 것 모두를 드리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어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이 하루를 굶는 것이 쉽겠습니까? 부자가 하루를 굶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기야 누가 더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돈이 그 삶의 전부였던 사람입니다. 돈밖에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건 말건 상관치 않고 돈을 모으는데 온 힘을 쏟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는 세리로 일하면서까지 돈을 모았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 보니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돈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 전부를 드리게 되면 주님 앞에 아까운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 것도 부러운 것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즐겁고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것처럼,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되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 예물도 드리게 되고, 시간도 드리게 되는 것이요, 예배하며 찬양하는 그 시간이 그렇게 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도 헛되이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찬양을 드려도 내 마음을 다 바칩니다. 말씀을 들어도 한 말씀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들려지는 말씀마다 한 말씀이라도 놓칠세라 그저 아멘 아멘입니다.

그래요 예물 드리는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 주님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드리고 싶어 못 견디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인 것이요 그게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누구보다도 더 많이” 라고 하는 개념이 단순한 액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액수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내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이 사랑은 곧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에 대한 신뢰입니다. 따라서 나의 믿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이렇듯 나의 마음을, 나의 사랑을, 나의 믿음을, 예물에 담아 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나의 삶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과부의 드린 예물을 칭찬하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녀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는 단순히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너무나도 가난한 과부입니다. 가진 재산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그녀가 수고하여 얻은 소득이 그것밖에 안 될 정도이니 남들처럼 하루 온 종일 노동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렙돈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 품삯의 50분의 1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생활비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그나마 그녀가 무언가 그래도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너무 힘도 없고 할 줄 아는 것 역시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수입이 두 렙돈밖에 안 됐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뜩이나 힘없고 힘겹게 살아가는 그녀가 하루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녀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입을 생각해 보십시다. 수입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땀흘려 수고하여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단 한푼의 수입에도 우리의 수고와 정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속에 우리의 땀이 배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가난한 과부가 주님께 하루의 생활비 전부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곧 그녀가 하루 종일 굶을 수밖에 없다는 뜻도 됩니다. 결국 그녀의 하루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예물에 담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물을 통해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물을 주님께 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의 삶을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어떤 삶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기쁘신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사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우리의 삶의 현장에 우리 믿음의 고백이 담겨져야 하고 우리의 찬양이 담겨져야 하고 우리의 사랑이 담겨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서로를 섬기며 봉사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아 기쁨으로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곧 화해와 용서, 끊임없는 칭찬과 격려 그리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고백을 통해 이런 사랑이 넘쳐나게 될 때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드려지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 나의 삶을 이 예물에 담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영광 받아 주옵소서” 하는 고백을 담아 예물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의 고백이 여러분의 삶 속에 아름답게 펼쳐지게 하십시오. 항상 여러분의 입술에서 이런 사랑의 고백이 그리고 감사와 찬양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그 사랑의 고백 안에 여러분의 그 믿음의 고백 안에 여러분의 마음을 담으십시오. 힘들 때 더욱 사랑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괴로울 때 더욱 사랑의 고백이 있게 하십시오. 지쳐있을 때 더욱 사랑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사랑은 희생입니다. 헌신 역시 희생입니다. 여기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하루를 전부 주님께 드린 것처럼 나의 삶을 나의 시간을 나의 마음을 다 드려 섬기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상대방이 힘들어하기에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들기에 더욱 다른 사람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피곤하기에 더욱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내가 지쳐있기에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나 너무 힘들어 누가 나 좀 붙들어 주지 않나” 하고 바라기보다 내가 힘들기에 내가 도울 사람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극한 가난 가운데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고 바울 사도를 도왔던 마게도냐 교회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그들이 무슨 힘이 있어 다른 교회를 도울 수가 있고 바울 사도를 도울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희생적인 사랑인 것이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주님께 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귀한 축복의 말씀이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이요 빌립보 교회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펼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의 희생은 곧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또한 보여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기를 아까워합니까? 이는 곧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길 아까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서야 어찌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이 넘치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심은 것이 없고서야 어찌 열매를 거둘 수가 있겠으며 심은 것이 적고서야 어찌 많이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은 목숨까지도 버리는 것이라고 했고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했는데 주님 앞에 우리의 목숨은커녕 삶조차 드리지 못한다면 어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의 삶이 담겨있는 예 조차 제대로 드릴 수 없다면 어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누가 많이 드린 자입니까?
넉넉한 가운데 예물을 드린 부자들이 아닌 렙돈 두 닢을 하나님께 드린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래요.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결코 풍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가 너무도 힘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풍성히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결코 단순히 액수로 드러나는 예물이 아닌 우리의 시간과 정성 우리의 삶 전부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한 시간도 헛되이 살지 않도록 해야 하고 말 한 마디에도 우리의 믿음의 고백, 사랑의 고백이 담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힘들고 지쳐있는 나 자신을 보지말고 밤새 기도하시고 지친 몸을 가지고도 오히려 풍랑 속의 제자들을 돕기 위해 물 위로 걸으셨던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고백을 담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무시해 버리고 싶고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까지도 사랑으로 감싸 안는 그런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너야말로 너의 삶 전체를 나에게 드렸구나 주님이 말씀하시며 기뻐하시도록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 인 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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