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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감을 가져야 승리한다 (왕상 18: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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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저도 역사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요즘에 주말에 하는 ‘제 5공화국’이라는 드라마를 흥미 있게 봅니다. 옛날 궁궐이나 왕능이나 사적 같은 역사적 흔적들에 대하여도 궁금증이 많습니다. 역사(歷史)란 무엇입니까? 어느 역사학자가 이렇게 정의를 내린바 있습니다. ‘역사(歷史)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보는 거울이다.’ 그렇습니다. 

1. 역사(歷史)란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이 말은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의 세대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나침반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여러분, 조선역사에 나오는 신숙주라는 인물을 아시지요. 그분의 묘가 우리고장에 있는 것도 아시지요. 저는 얼마 전에 계획도 없이 그곳을 지나다가 가보았습니다. 송산 의정부교도소 맞은편에 보면󰡐신숙주 선생의 묘󰡑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그 길을 쭉 따라 들어가서 고산초등학교를 지나 구성말로 가다보면 왼쪽에 ‘신숙주 선생의 묘’가 부인 윤씨의 묘와 함께 나란히 있습니다. 단장 공사 중이었습니다. 

  그때 그 묘를 바라보는 제 마음이 그야말로 착잡했습니다.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분이 남긴 역사적 교훈 때문입니다. 사람은 가도 역사적 교훈은 이렇게 생생하게 남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번 남겨진 역사는 지울 수 없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역사관, 혹은 역사의식을 바로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삶이 역사가 되어 후세에 생생한 교훈을 주듯이 나와 여러분 또한 훗날 생생히 남게될 역사를 지금 만들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역사가 나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 되는 겁니다.       

  나는 ‘제 5공화국’을 보면서 전두환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들이 일말의 역사의식만 있었어도 저런 악행을 저지르지는 안 했을 것이다라는 생각합니다. 저들은 역사의 거울로 자신들의 불행한 미래를 보지 못하였기 그런 만행을 서슴지 않았던 겁니다. 한마디로 역사관이 전혀 없는 사람이지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요.

  여러분, 신숙주가 누구입니까? 그는 사육신을 대표하는 성삼문과 라이벌 관계이자 아주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둘 다 세종대왕에 총애를 한껏 받았던 인물이며, 집현전 학자로써 한글을 만드는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하므로 금이 가게 됩니다. 수양대군(후에 세조(世祖)가 됨)이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때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비롯한 충신들을 제거하고 조카인 단종(端宗)을 협박해서 마침내 왕위를 빼앗았습니다. 이것을 역사는 소위 계유정란이라고 적고있습니다. 

  제 5공화국에 12. 12사태와 같은 거지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역사적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똑같은 죄를 반복하여 짓습니다. 낚시에 날린 미끼를 따먹고 죽어 가는 물고기를 보고 또 자기도 먹다가 죽습니다. 물고기 IQ가 1.5라고 하던가요. 

  어떻든 이런 역사의 기로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갈라졌습니다. 신숙주는 쿠데타 세력인 수양대군, 즉 세조(世祖)의 편에 서므로 훗날 영의정까지 하며 세도를 누립니다.

  한편 성삼문은 단종(端宗)에 편에 서서 충절을 지킵니다. 성삼문을 비롯한 소위 사육신들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잔인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世祖)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습니다.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다.󰡑다시 말해서 ‘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끝까지 세조를 반대한 겁니다. 결국 이들 모두가 처참한 죽음에 이릅니다. 

  그때 이후로 신숙주 하면 변절자(變節者)로 낙인이 찍히게 된 겁니다. 신숙주 부인 윤씨는 친구였던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모두 신의를 지키다가 죽었는데도 남편 신숙주만이 살아서 귀가하자 그의 욕된 처신을 나무라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여러분, 숙주(宿主)나물 아시지요? 콩으로 키워 만든 나물을 콩나물이고 녹두로 만든 나물은 녹두나물인데,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부르는 연유가 있습니다. 숙주나물은 너무 쉽게 상해요. 백성들은 이것을 보고 변절한 신숙주를 떠오르며,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신숙주의 후손들은 숙주나물을 안 먹는다고 합니다.

  어떻든 신숙주는 변절자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그는 한 임금에 대한 신의와 충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육신의 안일과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죽는 길보다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안일 때문에 믿음과 신의를 저버리고 죽음을 피하려던 신숙주는 잠시는 살았으나 역사는 그를 변절자로 영원히 죽였습니다.

  그러나 성삼문을 비롯된 사육신은 육신의 안일을 포기하고 신의를 지키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충신(忠臣)으로 영원히 살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으로 알려지지요. ‘必生卽死요, 必死卽生이라.’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입니다. 역설(逆說, paradox) 같지만 진리입니다.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입니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러분, 목숨이 귀한 겁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겁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목숨을 함부로 굴리면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목숨을 영원히 잃습니다. 신숙주의 경우가 그런 겁니다. 성경은 목숨이 영원히 살려면 죽는 길을 택하라고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죽으면 살리라!’입니다. 

(요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 또한 아주 중요한 역사적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였던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하여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마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심을 맨 처음 발견하고 고백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는 너무 기뻐하시면서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마 16:17).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3일 후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마 16:21).’ 참으로 꺼내기 힘든 말씀을 비로소 하신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화창한 날씨가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방금 전에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던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간청을 하였습니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무슨 의미입니까?

2. 베드로는 처음에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고난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의미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용감하게 주님의 길을 가로막은 겁니다. 이런 어리석은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 16:23). 

  여러분, 방금 전에 그렇게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지금은 뭐가 되었습니까? 사단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사람의 일이 될 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할 때 명심해야될 말씀입니다. 교회일 한다고 하면 사단이 시키는 일을 하고 예수님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 일을 하는 그런 사람되면 안됩니다. 분별력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의연하게 가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십자가의 길이라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원이라면 그 길을 가겠노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피땀을 쏟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때도 베드로를 비롯한 3제자는 잠만 잤습니다. 드디어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지러 가셨습니다.

  이때 가롯유다를 앞세워 주님을 포박하려는 병졸들이 왔습니다. 이들을 막으려는 제자들과 한바탕 폭력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내 예수님은 스스로 결박을 당하셨고 빌라도 총독과 가야바 제사장 앞에 차례로 끌려가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도망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차마 도망은 못 가고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여자가 베드로를 보고 ‘당신 예수의 제자 베드로 맞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지체 없이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며 부인했고 그 다음에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였고 세 번째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4).’ 완벽하게 3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겁니다.

  신숙주와 다름없는 변절이요, 배신입니다. 베드로 역시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리고 세상에 대한 욕망도 있었구요. 

  그러나 베드로의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한 후에 닭울음소리를 듣고 통회 자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배신했던 가롯유다는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자살을 하여 저주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회개(悔改)가 이렇게 좋은 겁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생명을 얻고 쓰임을 받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일대 일로,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강림을 약속하고 기다리라고 하시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와 부활의 목격자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면서 성령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행 2:1).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새 힘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가르쳐주셨던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어도 사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부활의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 되어 세계선교를 주도하는 큰 일을 하였습니다.

말년에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당당하게 순교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요 21:18)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전해내려 오는 말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위해서 죽는 길을 선택한 겁니다. 

  그 결과 지금 베드로가 어떻게 살아있습니까?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천국 열쇠를 맡은 자로서 제 1대 교황으로 추앙을 합니다. 그보다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얼마나 귀하게 쓰임을 받았는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는 지금 살아있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의 길을 선택했기에 그는 영원히 산 겁니다. 베드로 역시 처음에는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고 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을 때 주님은 그를 한없이 높이시고 영원히 살게 하신 겁니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성도 여러분, 어떤 길을 원하십니까? 내가 살려고 하는 길입니까? 주님 위해 죽으려고 하는 길입니까? 베드로가 처음 가고자 했던 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까? 만약에 맨 처음 베드로가 원하는 대로 갔으면 지금쯤 뭐가 되어있을까요? 갈릴리 수산업협동조합의 조합장 정도는 됐겠지요. 그것에 비하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겁니다. 

  여러분, 고난이 축복입니다. 죽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잠시 살고 영원히 죽겠습니까? 잠시 죽고 영원히 살겠습니까? 결론은 났습니다. 
     

3. 우리도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을 때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마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면서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 날에 영광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좇기 위해서 얼마나 나를 부인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처음 베드로처럼 자기의 뜻과 주장을 앞세워서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오늘 날 왜 교회마다 문제가 있고 갈등을 겪습니까?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과 고집을 깨뜨리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예수를 시인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 안에서 존귀하게 됩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빌 1:20)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뭡니까?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나는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게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가령, 오늘 교회 오기 싫었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를 왔다면 그것도 작은 십자가를 진 겁니다.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눅 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날마다 져야할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 뜻을 포기해야하는 십자가가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 말은 ‘내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내놓고 죽인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날마다 죽지 않고는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매일, 매순간 죽여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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