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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가지 문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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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부터는 산상보훈의 결론부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가지의 대조된 은유로 결론적인 교훈을 하고(13-27), 무리의 반응을  서술하면서(28-29) 마무리 됩니다. 이 네 가지 결론적 은유들은 매우 직설적이며 상당히 충격적인데, 오늘은 그 첫 번째 은유인 ‘두 가지 길’에 대한 보고자 합니다.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에 대한 몇 가지 미묘한 오해를 바로 잡으면서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기 힘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충실 한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우리의 선택과 노력 역시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구원받고 하나님 백성이 된 사람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좁은 문을 선택하고 좁은 길을 걷습니다.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써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선언해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참 하나님의 백성도 이 땅에서는 완벽하게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 길이 협착해서 자주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방향성입니다. 그는 실패하지만 이미 좁은 길로 가기를 결정했고, 그의 마음은 좁은 길을 걷기 원합니다. 좁은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기에, 넘어지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좁은 길을 제대로 걷고 있지 못한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슬퍼하며, 회개하고, 회복되기 원합니다. 좁은 길을 제대로 걷고자 하는 갈망으로 주리고 목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는 그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한 순간 멸망 길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두려워합니다.

반면에, 넓은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런 일로 마음 쓰지 않습니다. 그는 좁은 문을 분별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행여나 넓은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주의하지도 않습니다. 그에게는 좁은 길을 걸으려는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해도 마음이 태평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떠는 마음이 없으며 당당하고 담대합니다. 슬퍼하며 회개하지 않습니다. 좀 더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는 갈망도 없습니다. 자기는 이미 생명 길을 확보했다고 확신하므로 자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한참은 버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처럼 삶의 방향에 있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둘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소수 공동체에 속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외적인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좁은 문을 분별하려는 태도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단들도 대부분 소수공동체였습니다. 이는 소수 공동체에 속했다는 것 자체가 바른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어떤 시대든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았던 사람들의 수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남은 자’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힘없는 소수에게 다수의 무리가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과거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회가 되어갈수록 법은 힘없는 소수를 보호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소수를 존중하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이제 힘없는 소수라는 것을 내세워 동정표를 얻고 다수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동성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성적 소수자라는 것을 강조하며 법과 대중들에게 호소합니다. 묘하게도 ‘힘없는 소수’라는 자체가 굉장한 힘과 정당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외적인 숫자 자체가 평가의 기준이 되면 공의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작기만 하면 바른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다수를 따르지 않고 저항하기 때문에 자기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어리석습니다. 작지만 큰 교회보다 훨씬 부패했을 수도 있고, 소수의 의견이 다수보다 훨씬 잘못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 베드로의 설교 한 번에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꺼번에 3,000명이 좁은 문에 들어간 셈입니다. 이것을 보면 반드시 한 명씩 1:1로 붙잡고 회개시켜야 건전하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1:1로 역사하실 수도 있고, 1:3,000으로 역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3,000명 이하의 교회는 건전하고 3,000명 이상의 교회는 불건전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의 수가 25%라고 해도 여전히 전체 국민의 수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이처럼 “좁은 문”이라는 것은 외적인 수를 보고서는 전혀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좁은 문”은 무엇입니까? 만약 우리가 좁은 문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문으로 들어설 수 없을 것이고 좁은 길을 걷지도 못할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좁은 문으로 들어서지 못한 결국이 멸망이라는데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13-14) 이 말씀은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인데 그 문을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혹 이 말씀을 보면서 두 개의 문 앞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을 연상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좁은 문에도 넓은 문에도 들어서지 않고 중간 지대에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데, 아주 사단적인 생각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넓은 길에 태어납니다. 믿는 부모를 둔 사람이라고 해도 처음부터 좁은 길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일단은 넓은 길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13-14절 에서 넓은 문에 대해서는 찾는 다는 말이 없는 반면, 좁은 문은 ‘찾아야 하는’ 문으로 말씀합니다. 좁은 문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넓은 길을 걸으며 살다가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좁은 문은 찾지 않으면 찾기지 않는 문입니다. 또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 땅에는 좁은 문이 많지만 그 모든 좁은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아닙니다. 소수만이 걷는 협착한 길이라고 해서 모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아닙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분별력을 가지고 찾아야 합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좁은 문인 줄 알고 들어섰다가 멸망하는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날에 ‘아! 주님 좁은 문인 줄 알았는데 실수했네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며, 자신이 좁은 길로 걷고 있다는 분명한 확증을 주는 근거를 발견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좁은 길을 걷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확증이 없다면 안일하게 지내서는 안 되며, 찾기까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좁은 문”을 무엇을 말할까요? 어떤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길입니까?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 부분이 산상보훈의 결론부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좁은 문은 산상보훈의 모든 가르침과 관련이 있습니다. 결론부의 다른 말씀들을 보면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산상보훈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좇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삶’을 살기로 선택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서는 것이며,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과정이 좁은 길을 걷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신 뜻에 순종하여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하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애서 그 뜻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그 뜻을 지원해주시도록 요구합니다. 철저히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자기를 점검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서 ‘이만하면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라고 생각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직장인으로서, 학생으로서, 주부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울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주변 사람들이 보여준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서 삽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연 그 말씀이 옳은지 고민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는 예배 형태와 설교를 받아들입니다. 좋은 설교를 듣긴 했지만 가볍게 은혜 받은 후에 가볍게 잊어버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사는 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놓인 여러 선택들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분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기 원하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확신하는 과정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단 한 차례 말씀을 읽음으로써, 혹은 단 한번 기도함으로써, 혹은 설교 한 번 들음으로써 확실해진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하며, 부단히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고달프고 힘겹습니다. 한두 번 그렇게 해볼 수는 있을지라도 일생 그렇게 산다는 것은 정말 협착한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했습니다. 핍박은 꼭 외부적인 핍박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좁은 길을 걷기에 따르게 되는 내적으로 외로움과 고독의 형태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명하신 좁은 길을 걷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불멸의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비록 입구의 문만 좁은 것이 아니라 그 과정도 좁은 길이지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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