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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그날에 (삼상 14:16-30, 고전 3:10-15, 마 25: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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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젊은이가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한참 바라보던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앞을 못 보게 되었습니까?”  그 시각장애인은 “젊었을 때 눈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젊은이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지금 눈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던 청년은 안대를 마련하여 한쪽 눈을 가리고 한쪽 눈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젊은이에게 “왜 한쪽 눈을 가리고 다니느냐?”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우선 한쪽 눈을 사용하고 아껴 두었던 다른 한쪽 눈은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이 젊은이는 그동안 보호해 두었던 눈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껴 두었던 다른 눈의 안대를 끌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계속해서 사용해 온 눈의 시력은 오히려 더 좋아졌는데 여러 해 동안 빛을 보지 못한 그 다른 한쪽 눈은 이미 완전히 시력이 망가지고 말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란 무작정 아껴 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눅12:에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 현재 창고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부자는 창고를 확장신축하고는 자기 재산을 그 창고에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독백을 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잔뜩 쌓아 놓았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러나 바로 그날 밤 하나님은 그 부자를 향해서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취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해 놓은 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자는 그날 밤으로 하나님께 소환 당하고 말았습니다. 인생이란 무작정 쌓아두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달란트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체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에 대하여 주님은 달란트로 표현하셨습니다. 이럴 테면 주인에게 탕감 받은 빚이 일만 달란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는 주인이 종들에게 나누어 준 달란트가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달란트는 얼마나 되는 액수이겠습니까? 새 번역 성경 난외주(欄外註)의 설명을 보고 저는 놀랐습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엄청난 돈입니까? 그리고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도 역시 상상을 넘는 액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은 어느 것이나 우리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것도 그렇고 받은 은사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5달란트 받은 종이나 2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잘 활용했습니다. 그 결과 또 5달란트, 2달란트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할수록 그 능력이 배가되어집니다.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잠재력은 무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수건에 싸가지고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랬다 결국 그 한 달란트도 빼앗기고 자신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여기 주님이 말씀하시는 한 가지 하나님의 경제원리가 있습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서는 그 있는 것 마저 빼앗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되고, 안 하면 안 할수록 기왕에 할 수 있던 능력도 소멸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에서 저자 오스틴은 “모든 변화는 우리 마음의 생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생각을 바꾸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바꾸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군계학(群鷄鶴)처럼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성령의 능력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암몬과의 전쟁에 출전했을 때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들이 “사울 왕 만세”를 외칠 정도로 그들로부터 지도자로서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도력의 검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울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위해서 선용해야 할 권력을 이기적으로 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란트 비유의 저 악하고 게으른 종과도 같이 전락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처음의 그 용맹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쟁에 나가기는 했지만 적을 보고 주눅이 들어서 오금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옹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의 그 당당하던 기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달란트를 회수 당합니다. 이것이 사무엘로부터 받게 된 폐위 선언입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는 은혜롭고 부흥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섬기는 과정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방법으로가 아니라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니까 온갖 몹쓸 짓들을 백주에 하나님의 전에서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한국 교회의 명예를 도매금으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이가봇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붙잡히지 아니하면 결국 사탄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빈 집에 주인을 모시지 못하면 일곱 귀신이 들어오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울은 하나님 손에서 벗어나고 서서히 사탄에게 사로잡혀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무력하게 되고 그 대신 자신을 위해서는 마치 권력에 굶주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집착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가 하나님을 떠난 이상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위루라”고 했습니다.

3. 그런데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은 사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요나단의 믿음은 큰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믿음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금 왕자라고 하는 자리, 그리고 장차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위치에 있다고 하는데 대하여 전혀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요나단은 그 모든 세상의 영광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에게는 왕의 자리보다 더 소중한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보화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먼저” “신앙만능”의 확신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막강한 적군에 비하여 아군의 지리멸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적어도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것은 아무계산도 없는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 백성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 요나단과 함께 하셔서 놀라운 승리를 주셨습니다.

(2) 요나단의 믿음은 적군에 혼란과 함께 자중지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여기 믿는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십시오. 요나단의 행동으로 인하여 적진에는 떨림이 있었고 공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16절에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저리 흩어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요나단의 사기는 그야말로 충천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적진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적군은 한 길로 쳐들어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한 사람이 백 명을 대적하고 두 사람이 천명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 백성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불과 300명의 기드온 용사가 메뚜기 떼와도 같은 미디안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3) 요나단의 믿음 있는 행동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결속시켰습니다.

사울이 불신앙과 무기력으로 전의를 상실했을 때 이스라엘 군인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불과 6백여 명 만이 겨우 사울 곁에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숫자 가지고는 바닷가의 모래 같은 적과 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무엘서 21-22절을 보십시오.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이스라엘과 합하였고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싸우러 나왔다”고 했습니다. 요나단의 확고한 모습이 두려움에 떨고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남보다 앞서있는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확고하게 그 자리를 지키면 성도들은 안심하고 교회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게 될 때 성도들은 불안하게 되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우리 서부교회 모든 성도들이 요나단과 같은 자세로 이 큰 일들을 앞장서서 감당해 나간다면 반드시 “여호와께서 그날에” 우리에게도 놀라운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4. 하나님을 떠난 사울은 하는 일마다 비정상적인 일만 하게 됩니다.

(1) 다급할 때는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해놓고 다시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니까 당장 마음이 바뀝니다. 사무엘서 본문 19절 마지막에 보면 제사장에게 “네 손을 거두라”고 했습니다. 이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물론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평탄할 때는 하나님이 필요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평탄한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인 줄 알고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훼퍼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 삶의 변두리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표현으로 복덕방망이가 아니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전부이십니다. 언제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주 없이 살 수 없네”라고 하는 것이 우리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사울은 또 백성들에게 금식령을 선포했습니다. 전쟁이 한창일 때 금식령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혼인집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어떻게 금식을 하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나니 그때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기를 분별할 줄 알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현실에서는 무엇보다 성도 여러분의 합심과 기도와 헌신이 요청됩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축복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찬송가 가운데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 자녀들이나 후배들이 “그때 우리 부모님들 선배님들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물을 때 “그때 나 거기 있었었노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고 물으실 때 “주여, 내가 그때 거기 있었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날에” 여러분이 행한 것 보다 넘치는 것으로, 겨자씨 같은 수고에도 태산 같은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김 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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