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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아 힘내라 (습 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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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괜히 힘들고 어려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즉 기운 빠지고 힘을 잃을 때 말입니다. 누구나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40대 중년 그리스도인이 고향의 늙으신 어머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최근에 교회가 가기 싫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고 둘째는 요즘 장로님들의 기도가 너무 길어서 짜증스럽고, 셋째는 예배 봉사자들이 준비 없이 봉사하는 바람에 예배의 전체 분위기가 은혜롭지 못하여 교회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그의 노모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아들아 그래도 교회는 가야 한다. 이유는 세 가지,
  첫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네가 선택할 일이 아니다.
  셋째는 그래도 네가 교회의 담임목사인데 가야지 안가면 되겠느냐?

  때로는 교회의 목사도 교회가기 싫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권태와 탈진 낙심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도 그러니 여러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혹시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과 낙심에 빠진 분이 있습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기운을 읽을 수도 있고 낙심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왕상 19장을 읽다 보면 낙심과 절망에 빠진 한 선지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한 시대에 가장 용감하게 쓰임 받았던 선지자입니다. 갈멜 산 꼭대기에서 우상 정책을 펴는 아합왕과 그의 비호를 받는 850여명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 선지자들 앞에서 홀홀 단신 담대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어 불의 응답을 받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였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바알의 중간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우매한 백성들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지펴서 우상선지자 850명을 그릿 시냇가로 끌어다가 죽임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던 그런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후 승리에 찬 노래를 부르기 보다는  그는 지쳐 쓰러지고 낙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상 19:4절에 보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였습니다.
  엘리야 같이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던 위대한 선지자도 낙심하였습니다. 더 이상의 용기를 내지 못하고 좌절과 절망의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본문에서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는 이 말씀은 기운을 내라, 즉 힘을 내라는 말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 보니까 “시온아, 두려워 말라. 기운을 내어라.”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새번역 성경에서는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깨와 팔을 축 늘어뜨리고 힘 없이 있지 말고 힘을 내고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이 말씀을 주신 시대적 배경은 유대의 16대 왕인 요시아 임금 때에 되어진 일입니다. 요시아는 8살에 왕이 되어 32년을 다스린 왕입니다.
  요시아의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 왕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악한 정치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집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 태양신과 바알신의 우상을 가득하게 세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상은 우상숭배와 매춘행위가 나라 안팎에 기승을 부렸습니다. 국민들은 저마다 가난과 영적 혼란으로 저마다 낙망과 도탄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여덟 살 밖에 안된 요시아가 왕위를 잇게 되자 뜻 있는 사람들은 나라가 어떻게 될것인가에 대하여 불안해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민들은 경험도 없고 정치력도 없는 어린 왕에게 어떻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 것인가 염려하며 불안해하며 풀이 죽어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부르시어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즉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세 가지를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힘을 낼 수 있는 근거

  첫째는 하나님이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15절에 보면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형벌을 제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거두셨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벌을 주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두 친구가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걸은 후 그들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친구는 매우 아팠지만 아무 말 없이 모래 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뺨을 때리다."
  그들은 계속 걸어 오아시스에 도달했습니다.
  거기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전에 뺨을 맞았던 친구가 수렁에 빠져 점점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뺨을 때린 친구는 그를 서둘러 구해냈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 그가 돌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하다."
  그를 구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 글을 썼는데, 지금은 왜 돌에 쓰는가?"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할 때 그것을 모래에 쓰는 것은,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 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 그렇지만 누군가 내게 선을 행하면 절대로 바람이 지울 수 없도록 돌에 새겨 넣는 거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를 용서하십니다. 용서의 모래 바람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사 43:2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용서를 믿을 때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 때문입니다.
  15절 중간쯤에 보면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도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계시니....”  라고 했고 “너의 하나님은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으로 함께 계십니까?
  우리의 왕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함께 하십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데 우리가 힘을 읽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 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외쳐봅시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리빙스턴이 처음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배를 탈 때였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그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부두까지 나와 주었습니다. 몇몇 친구들은 그가 여행하게 될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상기시키며 조심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리빙스턴에게 영국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진지하게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은 성경을 펼쳐서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는 갈 길을 막는 그 친구를 향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보게, 이것이 주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이라네. 그러니 나와 주님을 보내 주게나." 

  자신이 가는 곳 어디에나 주님이 계실 것을 믿었기에 나와 주님을 보내주게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리빙스턴은 다음과 고백도 했습니다.
  "내가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가 때로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던 사람들 틈 속에서, 포로생활과 같은 나날을 살아가면서 용기를 잃지 않고 위로 받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아들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위로 받을 수 있고 신날 수 있으며 힘이 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셋째로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본문 17절 하반을 보십시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여러분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사랑을 듬뿍 안은 연인처럼 찾아와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사랑의 꽃다발을 가득히 안고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영원토록 함께하고 축복하리라” 
  얼마나 달콤한 사랑의 고백입니까?
  사랑의 고백을 날마나 듣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의 고백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힘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중학교 여학생이 백혈병에 걸려 항암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그 여학생은 가발을 쓰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모두는 아니지만 반 친구들이 가발을 벗기며 놀려댔습니다. 가발을 쓰면 벗기고, 또 벗기고….
  그 여학생은 학교 가기를 거부했고 늘 자살할 생각만 했으며 병은 더욱 깊어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학교 한 남학생이 뇌종양이었습니다.
  그 학생도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 때문에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습니다. 그 학생은 머리카락이 없는 모습을 다른 친구들에게 보이기 싫었습니다. 학교 가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한 친구가 병든 친구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같이 나누고 싶었지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 셋…. 그 반 학생들은 앞을 다투어 머리카락을 깎았습니다.
  며칠 후 뇌종양에 걸린 남학생 반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머리를 깎았습니다. 뇌종양에 걸린 학생은 의사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함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고통을 나누고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욕을 먹음도 침뱉음 당하는 것도 심지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잡혀가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의 병든 것, 약한 것 보다 못해 당신이 다 짊어지셨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분의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분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우리가 힘을 내야 하는 것은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힘을 내서 그분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조건을 따져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힘을 내어야 합니다. 힘을 내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받는 다는 느낌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힘을 냅시다. 주의 일을 합시다. 주의 길을 갑시다. 십자가의 좁을 길이라도 ...  주님을 따라 갑시다.

  소금 인형이라는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소금 인형은 여행하기를 무척 좋아해서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바다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본 바다에 놀랐지만 친근감이 들어 '소금인형'은 살며시 왼쪽 발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왼쪽발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소금인형'은 겁이 났지만 조금 더 들어와 보면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바다의 말을 믿고 오른쪽 발도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오른쪽 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다에 닿는 즉시 자신의 것이 없어져 버리는 '소금인형'은 그렇게 오른팔과 왼팔까지 바다 안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자신의 몸이 사라질수록 소금인형은 바다를 조금씩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주 작은 알갱이 하나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알갱이 하나마저 사라지려고 하는 순간 '소금인형'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 질렀습니다.
  "난 이제 바다야.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바로 나란 것을."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뛰어듦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말은 감미로운 언어가 아니라 그의 눈물에. 그의 십자가에 나의 몸을 담그겠다는 선언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없어지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되어지는 것 말입니다.
 
  오늘로서 금식 15일째를 맞습니다.
  15일 내내 생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저런 기도제목들을 제시하고 말했지만 내가 무슨 욕심으로 금식을 하며 떼쓰겠는가?
  그저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받은 은혜, 축복, 사랑이 감당치 못할 정도인데 더 무슨 욕심으로 이것저것을 구하겠습니까? 다만 기도하는 것은 내가 주님의 은혜에 바다에 녹아진 소금인형이 되길 바랄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없고 오직 내 안에 주님이 살아서 주님의 힘으로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녹아집시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에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힘을 내어서 주의 길을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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