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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7대표적(3) : 38년된 병자의 치유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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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7대 표적 중 세 번째 사건의 기록입니다. 첫 번째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고,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오늘 살펴보는 세 번째 표적은 무엇입니까?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먼저 이 사건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은 고대의 성들이 대개 그렇듯이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출입할 수 있는 성문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양문(Sheep Gate)이라 불리는 성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성전에 속죄 제물로 드릴 양들을 인도하는 통문이었습니다. 그 부근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가에 행각(정자 비슷한 것)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 행각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3절 보니까 많은 병자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 등입니다. 한 마디로 난치병, 불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셨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누워 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된 질병을 한 순간에 고치시다니, 그것도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시다니! 예수님은 그런 기적을 통해 당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 증거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당신이 절망 중에 있는 자에게 소망이 되심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중에 이런 저런 일들로 절망 중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랜 세월 고질적인 문제로 고통을 당하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어 체념하고 주저앉아 있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잘 안 되서 고민 중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소망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 새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본문을 자세히 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고 은혜를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1] 예수님이 계시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한 마디로 ‘절망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유명하다는 병원, 용하다는 의사 다 찾아다녀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좋다는 약은 다 써봤을 겁니다. 그러나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의술로는 가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베데스다 연못가는 마지막으로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얽힌 전설이 있었는데, 무슨 내용입니까? 3절(하)~4절. “ ...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 연못은 가끔 물이 솟아오르는데, 천사가 내려와서 목욕을 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구든지 물 속에 뛰어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 고침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건 아마도 미신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요즘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간헐천(Intermittent Spring, 이따금 물이 솟아오르는 온천)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혹 그 온천수 때문에 병을 고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상황으로 추측컨대 물이 솟아오르는 것도 드문 일이고, 그런다 할지라도 불치병 환자를 고치는 치유의 역사가 나타날지는 미지수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단 한 명만 고침 받는다는 겁니다. 마치 로또 복권 맞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이 815만분지 1이라고 하죠. 수학적으로 제로나 마찬가지의 확률입니다. 전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헛된 소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현실이 어려워도 견딜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장 비참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소망이라고 붙들고 있지만, 그 소망은 성취하기도 어렵고 성취해도 나중에 헛된 것임을 알게 될 때 더욱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막장과도 같은 그곳에 온 사람들인데, 거기서도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같은 처지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마땅한데, 살벌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해야 됩니다. 그것도 ‘헛된 소망’을 위해서 말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란 뜻이건만, 자비는커녕 살벌한 경쟁만 난무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남을 따돌려야 살아남는 경쟁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합니다. 1등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유지하기는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될 수 없기에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을 당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바닥 인생들이 모인 그 틈바구니에서도 밀려버린 꼴찌 인생이었습니다. 해보나마나 그는 항상 꼴찌입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고 누워있으니 혹시 물이 동한들 어찌 1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옆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아마 가족이이 친지들도 이제는 다 떠나버리고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 속에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체념과 자포자기, 원망과 한탄,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과 저주로 가득했을 겁니다.

만일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지 않으셨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졌겠습니까? 그는 절망 중의 절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에 한 줄기 빛이 비춰지듯이 절망의 인생에 소망이 싹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인간 생각에는 아무리 비참하고 처절한 절망적 상황이라도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소망이 전혀 없는 곳은 오직 지옥밖에 없습니다.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는 언제 어디서나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을 빼놓고 어느 곳이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명을 쓰고 억울하고 지하 감방에 홀로 감금되었습니다. 절망과 고독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과 친구들도 외면합니다. 그는 분노 가운데 어느 날 감방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휘갈겨 씁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아무도 날 돌아보지 않는다. 내 인생은 끝나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감방의 바닥 한 구석에 시멘트가 갈라진 틈새로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향해 자라난 것입니다. 너무 신기하게 여긴 그는 마음 속에 자잔함 감동을 느낍니다. 그는 그 새싹을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간수가 갖다 주는 물을 아껴서 새싹에 물을 줍니다. 한참 지나서 거기서 파란 꽃이 피어납니다. 그는 그 꽃을 보며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가슴 벅차게 감격합니다. 그는 거기서 소망을 본 것입니다. 그는 벽에 써두었던 글을 지워버리고 새로 글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셨다.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 소망이 있다.”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의 싹이 트고, 소망의 꽃이 핀 것입니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방에도 빛이 비취고 새싹이 돋아나듯이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 비참한 곳, 고통스러운 곳, 슬픈 곳에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혹시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낙심 중에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나에게도 찾아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절 보면 본문의 배경은 유대인의 명절 때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에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이 있었는데, 정확히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명절 때면 예루살렘은 수많은 순례객으로 북적거립니다. 심지어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에수님이 거기서 하실 일이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만날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을 제쳐놓고 예수님은 외진 베데스다 연못가에 오셨습니다. 거기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도 에수님이 찾아오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디 베데스다 연못가에 찾아가셨던 예수님, 38년된 병자를 찾아가셨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모시고 소망 중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절망 중에 38년 된 병자의 영혼과 육신을 모두 살려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그의 심령도 고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육신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방식입니다.

① 먼저 심령을 살려주시는 예수님 :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다가오셔서 보시고 그의 상태를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뜸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6절. “ ...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은 오해하면 꼭 놀리는 것 같습니다. 병자치고 낫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다 대고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결코 허튼 소리를 하는 분이 아니라 항상 의미 있는 말씀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불쑥 던지셨을까요? 그것은 그의 심령을 치유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7절에 기록된 병자의 말을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이 낫고 싶으냐고 물으시니까 뭐라고 대답합니까? “ ...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옆에 도와줄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병자의 심령 상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랜 세월 질병이나 문제에 시달리면 스스로 마음 속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고정되기 쉽습니다. 자기의 한계를 딱 그어놓고 그 이상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심령의 병입니다. 그의 심령은 깊이 병들어 있었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설사 육신이 건강해져도 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심령을 치유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겁니다. 예수님을 그 말씀을 통해 그 마음 속에 꺼진 믿음의 불씨를 살려 주십니다.

여러분, 심령이 치유되는 게 왜 중요합니까? 사람의 심령 속의 생각은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잠23:7 말씀을 보십시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 ” 무슨 뜻입니까? 심령 속의 생각대로 인생이 결정됩니다. 심령 속의 생각이 그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만들어갑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봅니다.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답니다. A 그룹 100명과 B그룹 100명으로 나누어 실험을 했답니다. 사람들이 잠들기 전에 A그룹의 100명에게는 커피 석 잔을 마시게 하고, B그룹의 100명에겐 우유 석 잔을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물어봤습니다.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그랬더니 A그룹 100명 중에 65%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17%는 날밤을 세웠고, 18%는 간신히 잠을 청했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B그룹은 모두 다 편안히 잘 잤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커피에서는 카페인을 제거하고, 우유에는 카페인을 주입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약리 작용보다 심리 작용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커피는 마신 사람은 으레 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잠을 못 잤다는 것입니다. 우유는 마신 사람들은 으레 잠이 잘 올 것으로 생각했고 정말 잠을 잘 잤다는 겁니다. 이처럼 생각은 우리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또 이런 예가 있어요. 곤충학자가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벼룩은 자기 키에 비해 엄청 높이 뜁니다. 벼룩을 항아리에 넣었더니 너무 뛰어서 자꾸 밖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투명한 유리 뚜껑을 덮었습니다. 그랬더니 벼룩이 유리판에 부딪칩니다. 몇 차례 그러더니 이제는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뛰어오릅니다. 놀라운 사실은 나중에 유리판을 치웠는데도 벼룩이 조금씩만 뛰어올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한계(limitation)를 그어놓는 습성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기 고정시켜 놓습니다. 자기 조건을 따지고 환경을 따지면서 움츠러듭니다. 그러다 보면 그 심령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고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므로 그 한계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게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생길 때 심령은 살아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 뭐라고 말합니까? 빌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의 육신은 비록 갇혀있었지만, 심령만큼은 무한한 믿음의 세계에서 마음껏 헤엄을 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의 부정적인 생각의 틀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령에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그러자 그의 심령이 치유되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에 심령을 먼저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 예를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한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막10:46 이하를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달려갑니다. 제자들이 재수 없다고 제지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뜸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막10:51 “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면 모릅니까? 소경이 예수님을 찾아왔으면 눈 뜨고 싶지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경은 고침받기 위해 왔지만,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부정적인 생각과 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이제껏 못 고쳤는데 ... ”

예수님은 그 질문을 통해 바디매오의 심령을 치유하시는 겁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그의 심령에 믿음을 불어넣으시고 살려내십니다. 그런 후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막10:52 “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디매오는 심령이 치유되어 그 말씀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그때 기적이 나타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질병보다, 문제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바로 심령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디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심령이 치유되고 살아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육신을 고치시고 살려주시는 예수님 : 

심령이 살아나니까 38년된 병자의 마음 속에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8절. “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도 얼른 보면 황당합니다. 아니, 38년 동안 누워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라니 도대체 말이 됩니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미 그 사람의 심령이 살아났으므로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 ” 그가 믿음으로 몸을 움직여 봅니다. 그 순간 몸에 이상한 변화가 감지됩니다.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어났고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심령이 치유되고 살아나니까 육신의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가 또 한 가지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고(No) 하나님을 긍정하는(Yes) 겁니다. 자기 자신의 조건을 보고 형편을 보면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긍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긍정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마른 뼈가 살아있는 사람이 된 기적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골짜기로 이끌어 가는데, 거기에는 해골과 뼈다귀가 수북합니다. 그걸 가리키면서 하나님이 에스겔에 게 질문합니다. 겔37:3 “ ...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여러분이라면 그런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체면 생각하면 긍정해야 되는데, 솔직히 내 체면 생각하면 부정해야 됩니다. 에스겔은 절묘하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 다.” 자기로서는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긍정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대언을 시킵니다. 해골과 뼈를 향하여 외칠 때 뼈가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붙습니다. 그리고 생기가 들어갑니다. 마침내 살아있는 큰 군대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긍정할 때 나타난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프로 골퍼 최경주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미국 PGA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죠. 그 직후에 신앙 잡지에 썼던 간증문을 읽어봤습니다. 그는 그 대회를 앞두고 마음 속에 우승에 대한 소원이 생겼다고 합니다. 우승해서 인터뷰 할 때 첫 마디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부인은 금식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결과는 우승입니다. 여자 LPGA에서는 한국선수들이 여럿 우승했지만 남자 PGA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우승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도 섬 촌놈인 내가 도저히 우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도 모두 내게 No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은 내게 Yes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소망을 주시고, 정상에 올려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심령 속에서는 항상 두 가지 생각의 싸움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안 된다고 부정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긍정합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No일 때 No라는 생각을 를 부정해야 됩니다. 그러면 Yes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Yes 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망의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새로운 시작을 하십니다. 부디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셨던 예수님을 만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 앞에 Yes로 긍정하고 순종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도 주님의 기적과 승리의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부디 우리의 삶 자체가 절망 중에 있는 세상을 향해 ‘살아있는 소망의 증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 문 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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