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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향존 (신 7:6~12, 롬 6:3~8,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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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신명기 7:6 ~ 12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벌을 내려서 그를 멸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늦추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야 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6:3 ~ 8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28:16~ 20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느 정신 이상에 걸린 사람이 갑자기 학교에 뛰어 들어서 총기를 난사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무고한 어린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미국에서나 이런 일이 있는 거겠지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얼마 전에 우리나라 전방에 있는 GP에서도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여덟 명이나 되는 젊은 동료들이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지금은 자식을 많이 낳아서 기르던 옛날과는 달리 자식을 적게 낳기 때문에 독자들도 많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자, 그것도 이대, 삼대독자가 군대를 갔는데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GP에서 무참하게 죽으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어머니 아버지의 원망과 분노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덟이나 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죽어갔습니다. 우리가 만든 무기가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저는 이런 아픈 가슴을 안고 수십 년 전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어제가 6.25였지요. 6.25 전쟁으로 인하여 남과 북의 우리나라 사람들,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외국 사람들을 다 합쳐서 수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차례의 전쟁이었지만 수백만 명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여덟 명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수백 명이 죽어간 그 전쟁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게다가 그 많은 사람들을 잃은 것도 모자라서 많은 가족들이 흩어져서 만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커다란 좌절과 분노 때문에 눈물마저 메마른 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극복이 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한국 교회가 출범할 때의 기도 제목 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를 제 2의 이스라엘로 축복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삼천리 반도를 택하여 주시옵소서. 그 선택의 축복, 선민의 축복을 오늘 우리도 맛보게 하옵소서.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민들이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항상 침략, 침탈, 억압, 수탈을 당하며 살아온 민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전쟁의 역사가 한 번도 아니고 역사 전체에 가득 차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민족의 역사를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선민은 치러야 할 값도 크지만, 그 값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 축복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선민으로 택해주셨다면, 우리가 기도한 대로 제 2의 이스라엘이 되었다면, 그것이 주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왜 이스라엘이 그렇게 훌륭하고 좋습니까. 오늘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란 나라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선택한 자가 선택받은 자를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신자가 되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그 분의 신자로 선택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약 성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선택받은 자에게는 무엇이 요구됩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하루하루 지켜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하면 그 분의 사랑을 지키는 것으로 알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계명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지키면 천 대에 이르러서 축복을 내려주시겠다고, 그러나 그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사랑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 징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으로 선택하셨다면 그 사랑에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6.25 전쟁을 겪었다 하더라도, 여덟 명의 젊은이들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축복을 간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선택한 자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십니다. 사랑의 선택은 곧 사랑의 책임입니다. 이 책임은 결코 사랑을 취소하거나 업신여기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연속과 단절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 하나님 사랑의 역사에 있어서는 단절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사랑을 단절시킨 적이 없으십니다. 잠시 유보한 적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책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인 사랑의 역사를 잠시 유보했다가도 결국 다시 살려내십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잠시 유보된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역사를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의 계약을 맺자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은 할례라 이름 하는 유형적 요식 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할례라는 예식은 세례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 계시는 세례 받으신 여러분, 또한 앞으로 세례를 받으실 여러분, 한 가지만 약속하십시다. 세례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세례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약속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우리들을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고, 죽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에도 동참하는 확실한 약속을 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서 싸웠다가 화해했다고, 다시 결혼식을 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자식과 부모사이에서도 한 번 부모자식 관계가 되면 그것을 갱신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도 이와 같습니다. 한 번 베풀어진 세례는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번이면 족합니다. 한 번 받은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동참하는 결단만 있다면 매일 재생될 수 있습니다. 한 번 받은 세례는 다시 살아나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고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생동하는 역사로 재생되는 것이지 역사적 행위 자체가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 일을 하십니까. 성령이 그 일을 해 주십니다.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라.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제가 어떻게 어미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옵니까. 이는 아주 인간적이며 초보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이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중생이 아닙니다. 현재에 있어서 거듭나는 결단을 하고 삶의 밑바닥부터 성질도 행동도 바꾸면 그걸 가리켜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세례를 또 다시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과 했던 약속이 성령을 통해서 되살아났을 때 새로운 삶을 살면 됩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2000년 전에 단 한 번씩만 갈보리에서, 무덤에서 생겼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반복할 생각도 없으시며, 반복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옛날에 한 번 있었던 역사가 지금 우리한테도 중요할까요. 한 번 있었던 사건일지라도 그 뜻과 역사는 계속해서 재현됩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once for all”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누가 합니까? 성령이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 세례 이야기, 할례 이야기 등 한 번 베풀어졌던 하나님의 역사들은 역사적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통해서 오늘 우리 안에 새롭게 태어납니다.

  한 번 일어났던 6.25 전쟁은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으로 인해 죽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여덟 명이 죽은 사건도, 수백만이 죽어간 사건도, 그래서 가슴이 찢어지는 일도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사건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훈은 매일 살아서 오늘 우리에게 와야 합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물로 세례를 받았으면 이제는 다시 물로 세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세례 받은 것을 계속 재생 시키십니다. 그것은 불로 받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제는 물로 받은 세례와 성령으로 받은 세례를 구분하지 마십시오. 이제 성령을 통해서 계속 세례 받는 놀라운 역사가 생깁니다.

  제가 로마서 12:19-20절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면서 제일 극복하기 힘든 것은 아마도 원수를 갚고 싶어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기쁜 일을 즐기는 것은 쉬운 일이나,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노는 우리가 이기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천사 같은 마음을 가져도, 분노와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을 없애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 갚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제안하십니다. 세례를 받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나와 역할 분담을 합시다.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원수를 갚을 테니 다른 일을 하십시오. 전쟁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려고 하십니까. 전쟁을 전쟁으로 갚으시겠습니까. 전쟁, 소총 전쟁, 탱크 전쟁, 이제는 핵전쟁을 통하여 갚으시겠습니까. 그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살아가면서 원수진 것, 미웠던 것, 모두 내려 놓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방식대로 원수를 갚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로마서 12:21절을 보면 악에게 지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단코 악에게 지지 말라. 악에 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겨야 한다. 그런데 이길 때에는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축복을 주시는데, 21절에서 말하는 평화란 악에게 지지 않게끔 스스로 결단과 무장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란 악을 이기되,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전쟁을 전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북한에 쌀을 보내곤 합니다. 배고픈 공산주의 체제는 조금 더 넉넉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이겨야 합니다. 진실로 배고픔이 있는 곳에 배부름으로 이깁시다. 억압과 인권유린이 있는 곳에 인권과 자유로 이깁시다. 그래야 선이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선이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선이 크고 강하고 위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전쟁이 아니라 힘 있는 평화이자 힘 있는 선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땅에 평화가 오기를 진실로 기도해야 합니다.

  적과의 동침은 영화 제목에나 나오는 말입니다. 적은 이겨야 합니다. 악은 이겨야 합니다. 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이겼듯이, 악은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불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힘 있는 정의입니다. 억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보다 힘찬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힘찬 정의와 자유와 신앙과 평화를 이루려는 우리의 결단에 오늘날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보내며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나가서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라. 우리는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례를 몇 명에게 베풀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언제 받았는가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례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상징된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으며 항상 함께 계시다는 약속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현실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같이 계시다는 약속 하나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성경말씀에서 하나님은 오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미래의 하나님이십니다. 미래는 오늘이나 내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시간적인 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불의 대신에 정의가, 전쟁의 참화 대신에 평화의 힘이, 죄 된 자리에 사죄와 용서가 넘쳐나는 삶이 바로 내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산술적이고 시간적이며 계산적인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고 삶의 질로서의 미래를 살아가야 합니다. 내일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합니다. 미래가 현재화 된 하나님의 진실은 기쁨과 찬송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기념일을 맞을 때마다 기념일 속의 옛날을 회고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날을 기념식의 주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깁시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합시다. 부활이 십자가의 죽음을 삼켰듯이, 우리도 선으로 전쟁의 죽음과 참화를 삼킵시다. 힘 있는 평화를 위해서, 힘 있는 말씀을 위해서 다시 한 번 결단합시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된 선택들이 바로 우리의 선택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모든 분들이 이 축복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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