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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약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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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 중에 약사가 한 명 있는데, 한 이십여 년 전에 그 친구가 거제도에서 약국을 하나 차리고 있을 때에 제가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약국에 어떤 아주머니가 한 분 들어와서 자기 의사에게서 받은 무슨 처방전을 보여 주면서 약을 사려고 했습니다.
  제 친구 약사가 그 처방전을 보더니 “아주머니, 지금 임신 중 아니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그렇다고 하자, 제 친구 약사가 “아주머니, 그 약은 임신부가 먹으면 부작용이 있어서 절대 먹어서는 안 되고, 그런 경우에는 이런 약을 먹어야 합니다.”하고 다른 약을 내놓았습니다.
  그래도 그 아주머니는 무언가 미심쩍은 듯이, “의사가 그 약 먹어라고 하던데.”라고 말꼬리를 흘렸습니다.
  그러자 제 친구는 “아주머니,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라는 말이 있지요. 제 말대로 하세요. 그 의사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라고 아주 권위 있게(?) 설득시켜서, 결국 그 아주머니는 제 친구 약사가 주는 약을 사들고 갔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떠나고 나자, 제 친구가 저를 보면서 싱긋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 섬에는 도대체 돌팔이 의사들이 많아서 말이야.”라고 하는 바람에 저도 함께 웃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는 서울 약대 출신이었는데, 그 약국에 걸린 졸업장과 약사 자격증이 그날 그 사건을 통해 제 눈에는 새롭게 돋보이는 듯했습니다.

  똑같은 약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약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는 것이 약의 성질입니다.
  아무리 보약이 좋다고들 하지만 그것조차 몸에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몸이 아주 약해서 처음으로 보약이라는 것을 먹어 보았는데, 정말 제대로 잘 먹은 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적어도 입맛 하나는 결코 떨어지지 않고 살아왔으니 그만해도 충분한 보약이 된 셈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어느 황제는 불로장생약이라고 먹은 게 잘못되어서 죽고 말았다지 않습니까?
  이처럼 약이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잘 먹으면 약이 되지만 잘못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때때로 직면하게 되는 시험도 바로 그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도 2절부터 4절의 말씀을 통하여 신자가 시험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일차적으로 잠깐 언급되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에 와서는 그 시험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더욱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잘 통과한다는 것은 성도의 성화 생활에 있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도가 받게 되는 시험은 어떤 양면성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1. 시험은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통과하기만 하면 상을 얻게 되는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약을 잘 받아먹은 사람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말씀하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12절에서 말하는 “시험”은 ‘테스트(test)’ 혹은 ‘시련(trial)’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내리시는 시험입니다.
  이런 시련이 찾아올 때 그것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는 일차적으로 “참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앞서 3절과 4절에서 “인내”라는 말로 꼭 같이 이미 언급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 와서는 그처럼 성도가 시험을 당할 때 만일 인내로 제대로 대응할 줄만 안다면, 그 결과는 오히려 “복이 있게” 될 것이라고 성령께서는 야고보서를 통하여 단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통의 생각으로는 시험과 복이란 결코 연관되어질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시험당하는 것은 재수 없는 것이고 시험이 없어야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 불신자에게는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바로 복으로 직통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일견 이 신기한 일이 그 시험이라는 약을 잘 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험이 복으로 이어지게 됩니까?
  본문 말씀에 보니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에”는 바로 그 테스트로서 주어지는 시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인정받다’는 단어는 ‘연단되다’는 의미로도 쓰이는 것인데, 합쳐서 생각한다면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여 인정을 받다’ 즉 그 테스트에 합격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란 성도의 성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전공과목에 해당됩니다.
  이 과목을 패스하지 않고는 절대로 ‘영화(榮化?)’라는 졸업장을 탈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테스트를 통하여 무엇을 인정받아야 합격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본문 말씀에 보니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라고 그 테스트의 내용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즉 시험이란 신자가 주님을 얼마만큼이나 사랑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 내는 테스트라는 말입니다.
  그저 평소에 그 입으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신앙고백을 드린다고 해도 그 심령으로 정말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험이 닥치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사자가 가라사대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자기 아들을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지, 그것을 테스트해 보시기 위하여 그런 시험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때로 성도에게 시련을 주시는 이유 역시 바로 이런 사랑을 체크해 보시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사랑을 더욱 확신케 하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일단 이 사랑에 인정을 받으면 그 다음에 약속된 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면류관’이란 권위의 상징인 왕관을 의미하는 경우와 경기의 승리자에게 영광과 명예의 상징으로 주는 월계관, 이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후자에 해당될 것입니다.
  ‘생명’이란 바로 그 상급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 목숨이 아니라 영생하는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계산된 욕심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신자의 영적 생활에서는 대표적인 금기입니다.
  하지만 장차 내세에서 얻을 상급을 바라보며 오늘 주님을 바로 따르는 힘을 얻는 것은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8장 18절에서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치 승리의 월계관 얻기 위해 모든 육체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견디고 뛰는 운동선수처럼, 성도는 바로 이 영생의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오늘도 모든 시련을 인내하며 통과해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시험은 그 약을 잘 받아먹을 만한 성도에게는 오로지 주님 사랑하는 테스트로 주어지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제가 만화책에서 본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그 아버지가 공사장의 막노동 일을 낮에 뿐 아니라 밤에도 연이어 하게 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희미한 등불 밑에서 곡괭이를 내리치면서 “내 아들을 위한 것이라면...”하고 속으로 되뇌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땅의 부모 된 자라면 고된 일터에서 그런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군대 생활은 젊은이들에게는 시련의 연속으로 보내는 삼년입니다.
  하지만 야전에 나가 추운 밤에 보초를 서면서도 내 작은 수고를 통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내 가족들이 지금도 평안히 잠들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제법 가슴이 뿌듯해져 왔던 기억이 제 자신에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면 시련이란 사실 별 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 자식이나 내 나라 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도 그 정도라면 우리에게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로 있을 때에야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시련을 이긴 성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영광과 명예의 면류관이 따라옵니다.
  예수 믿고 육신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되어나가는 성도 역시 남들 앞에 덕이 되고 본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고난과 시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 사랑을 더 뜨겁게 달구어 가는 성도와 비교해 볼 때, 그 아름다움은 훨씬 더 빛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의 명예뿐 아니라 영생의 면류관의 상급까지 있으니 그 복이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약을 잘 받아먹은 성도만이 누리게 되는 이 축복을 반드시 누릴 수 있도록,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그 주님께서 주시는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시험은 원망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죄에 빠지고 사망에 이르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약 잘못 먹고 그 때문에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상반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13절부터의 ‘시험’이란 단어는 바로 ‘미혹’ 혹은 ‘유혹’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12절의 시험은 ‘trial’(시련)이라 번역했고 13절 이하에 나오는 시험은 ‘tempted’(미혹 당함)라고 번역함으로써 그 뜻을 정확하게 구분해 둔 것입니다.
  그 나타나는 모습, 즉 면모는 꼭 같은 환난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는 자세에 따라서 한쪽은 테스트로 끝나지만 한쪽은 미혹당하는 즉 죄의 유혹에 빠지는 시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죄에 빠지는 대표적인 최악의 경우가 바로 자기가 당하는 시험을 두고 그것을 모두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는 말은 곧 ‘내가 이렇게 시험에 빠진 것도 다 하나님 때문이다.’라고 원망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교리를 배웠다는 교인들이 하기 쉬운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내가 죄를 지어도 그 탓은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악한 교인들이 있는 까닭에 성령께서는 강한 어조로 ‘신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하나님 때문에 시험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아예 단단히 못 박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시험에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부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시험 당할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야말로 약을 잘못 먹어도 엄청나게 잘못 먹은 것이고 그 결과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은 그런 따위의 생각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어지는 본문 말씀이 그 세 가지 이유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첫째로, 죄와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상관없으신 하나님의 본성 때문입니다.
  13하반절에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라는 말은 “받으실 수 없고”(cannot be tempted)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원래 속성 그 자체가 그 어떤 악으로부터도 절대로 영향을 받으실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니 다른 사람을 시험, 즉 죄를 짓도록 충동하시는 유혹을 친히 내리실 리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사람이 시험, 즉 죄에 빠지는 시험을 당하게 되는 진짜 이유 바로 사람 그 자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원래 ‘욕심’(desire) 그 자체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육체적이고 이기적이며 악의적인 욕망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고 거기에 미혹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자기 욕심에 끌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끌려”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을 분해해 보면 ‘강하게 끌어당기다’라는 뜻의 어근과 ‘미끼에 현혹되다’는 뜻의 어근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과정이 꼭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치 미끼가 달려 있는 낚시 바늘에 고기가 걸리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죄는 먼저 미끼를 가지고 사람을 유혹하고 끝내는 사람을 끌어당겨 완전히 낚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성장 사이클’이 시작되는 순간이 됩니다.
  욕심에 끌려 죄에 넘어가면 그 죄가 점점 자라서, 그 죄에 점점 익숙해지고 능숙해지고 뻔뻔스러워지고 둔감해져서 결국은 그 영혼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바로 시험에서부터 비롯되는 최악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죄에 빠지는 미혹의 원인은 오로지 사람 자신 속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결코 하나님께 그 책임전가를 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 셋째 이유는, 하나님께는 오로지 모든 선한 것들의 원천이 되실 뿐이기 때문입니다.
  16절부터 18절의 말씀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가리려고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이며, 그 결과는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니, 결코 그런 자기합리화에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처럼 죄와 아무 상관이 있을 수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욕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독하는 범죄가 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은사’란 말은 좋은 것을 내려 주시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며, ‘선물’이란 좋은 것 바로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만 내려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나쁘고 악한 시험이라는 것을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빛들의 아버지”란 말은 하나님께서는 빛들의 창조주 되시며 동시에 결코 그 어떤 어두운 일에 관여될 수 없는 분이심을 가리킵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라는 말은 해, 달, 별들이 회전, 즉 공전과 자전을 하면서 그 위치나 밝기나 모양까지도 변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그 선하심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신실하신 존재임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첫 열매” 즉 당신의 창조하신 것들 중에 가장 좋은 존재로 만들고자 하시는 선한 의도를 세우셨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 즉 복음으로써, 우리를 “낳으셨던” 즉 중생케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심을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발휘하셨고,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내려 주신 가운데 특히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 앞에서도 가장 귀한 존재로 삼으려 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사람 내부의 악한 근성과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다 살펴볼 때,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나쁜 일이 일어나게 하셨다.’라는 말과 생각을 감히 꺼내지도 떠올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어떤 괴로움과 고통의 시험을 두고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벽하게 거룩하신 성품과 우리 자신의 본색을 비교해 보기만 해도 너무나도 확연한 것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나 자신만을 솔직히 살펴보아도, 그 근본이 얼마나 악한지는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일인데, 어떻게 내게 벌어지는 악한 일, 나쁜 일이 하나님 쪽에 원인이 있다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마치 순진한 갓난 아이 하나를 앞에 두고 어른이 그 아이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과 꼭 같이 어처구니없는 철면피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유혹에 잘 끌리는 본성, 그 시험에 빠져 죄를 낳는 생산력, 그 대가로 이르게 되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원인과 책임은 오직 사람, 미혹 받는 시험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자연 발생시킬 능력을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사람 그 자신 쪽에만 전적으로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인되는 일들이란 전부가 다 선한 일, 좋은 일들뿐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일용할 양식이나 행복한 가정이나 매일 누리는 학창생활이나 자유롭게 영위하고 있는 교회생활 등, 일단 세기 시작하면 열 손가락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 생길 때 하나님께 감사 한번 제대로 드릴 줄 모르는 인생들이, 오히려 궂은 일만 생기면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참으로 얼마나 낯 두껍고도 배은망덕한 행위이겠습니까?

  인간관계에서도 열 가지 다 잘해 주어도 하나도 기억하거나 감사할 줄은 모르면서, 한 가지 자기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오히려 그 원인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대개 그런 경우의 나쁜 일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잘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꼭 그와 같이 행하는 못된 교인들이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일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걸핏하면 “아이구,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못 살겠습니다.”라고 함부로 내뱉는 것은,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하는 우리 인생의 못된 근성을 하나님 앞에서까지 감히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약을 먹게 될 때 그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독하는 독이 되지 않도록, 항상 좋은 일에는 잊지 아니하고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 모든 원인과 책임이 자신 속에 있는 줄을 바로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 각자의 인생에 꼭 같은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것을 잘 받아 소화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심한 부작용만 일으키게 되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같은 시험이라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테스트로 받아 합격하면 아주 좋은 약이 되지만, 바로 그 꼭 같은 시험을 사단의 미혹으로 당할 때에는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이 시험이라는 약을 정말 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게 좋다고 여겨지는 것만 하나님께 달라고 떼를 쓰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해 주시는 것이 지금 보기에는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무조건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전적으로 믿고 무조건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후자의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처럼 보이십니까?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부모에게 제 욕심대로 해달라고 졸라대고 칭얼대고 부모가 그대로 해 주지 않으면 당장 그 부모를 욕하는 자식을 우리가 보게 될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문자 그대로 후레자식이며 사람 취급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버지가 “그건 안 돼.”라고 말하면 그저 “예, 알겠어요.”라고, 왜 허락해 주지 않으시는지 이유는 잘 몰라도 일단 그처럼 공손함과 순종을 보여 주는 자식들도 가끔 보게 됩니다.
  정말 남의 집 아이라면 잘 키운 자식이란 칭찬 한 마디 꼭 해 주고 싶고, 자기 아이라면 다 자란 자식이라는 만족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도 꼭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자란 영적 적자(嫡子)’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다’라고 하셨던 대로 ‘유기(遺棄)된 영적 서자(庶子)’가 될 것인지를 판가름하게 되는 시금석입니다.
  우리에게 약으로 주어지는 인생의 시험을 당할 때마다, 어찌하든지 주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의심치 않고 그것을 인내로 통과하여, 끝내 주님 사랑하는 자로 인정을 받고, 그 시험을 인하여 오히려 영광의 면류관을 확실히 붙잡게 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 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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