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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압의 충정 (삼하 12: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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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을 맞이한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에 진정한 쉼을 누리는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써 휴가를 다녀오신 가정들도 있고, 오늘 예배를 마친후 휴가를 떠날 계획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들에겐 더욱 귀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한 주간은 무척 큰 일들이 많아 매우 분주했던 주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우리 평안의교회가 창립된 이래 한 주간에 3번의 장례가 있기도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전도는 어려운데 가시는 분들은 많으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부평 화장장으로, 서산의료원으로, 대구 경북대의료원 등으로 장례를 위해 섬기신 성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지난 주간에는 임진강에서 훈련 중 4명의 장병들이 순직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JSA 즉 비무장지대 안에서 훈련 중이던 한 사병이 임진강에 빠졌는데 전우를 구하기 위해 장병들이 뛰어들었다가 모두 귀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증언을 들어보면 장병들은 물에 빠진 전우를 구하기 위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급류가 흐르는 임진강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 사실 우리가 수영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만한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게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내 전우가 위험에 빠졌다고 하는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었던 그 장병들의 순수한 전우애와,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은 수도통합병원에서 거행된 합동장례식에서 보여주었던 부모들의 의연한 모습이었습니다. 혹시나 의롭게 죽음의 길을 선택한 아들들에게 흠이 될까봐 절제된 모습으로 장례식에 임하였다는 소식은, 지난 28사단의 총기 사건때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요압의 충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충성된 사람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도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것 같아 보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무슨 일을 해도 끝까지 헌신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기업의 기밀들을 돈을 받고 유출하려는 사람들이 국정원에 적발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성도가 되고, 나아가 제자가 되되 충성된 제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12명의 제자들을 키우셨지만, 그 중에서 가룟유다는 절제되지 못한 야망과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 충성된 자리에 남아 있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지요.

21세기 미국교회의 영성을 주도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인 새들백 교회의 릭워렌목사는 교회 안에는 신앙정도와 헌신에 따라 다섯 종류의 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지역주민(The Community)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같은 지역에 살고있는 주민들로서 전도 해야할 대상자들이요, 잠재적인 교인들입니다. 2. 마당교인(The Crowd)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소속감과 부담감 없이 예배에 출석하는 명목상의 교인들로서 군중과도 같습니다. 3. 교회원 (Congregation)입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교회원이 되어 교회의 모든 예배와 행사에 참여하며 교회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회중들입니다. 4. 헌신자 (The Committee)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사역과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제자훈련을 통해 헌신된 위원들입니다. 5. 핵심교인 (The Core)입니다. 이들은 주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과 교사들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교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충성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피스토스인데, 이 말은 화산이 폭발하여 뜨거운 화산재가 날아오자 모두 자리를 피했지만, 자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사명의 자리를 지켰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피해가면서 너는 왜 피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저는 아직 자리를 피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며 끝까지 사명의 자리를 지킨 어느 초병의 모습이 바로 충성의 순수한 모습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충성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를 가리켜 충성된 사람이라고 우리는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충성된 사람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해관계에 따라 약삭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계시는 중이십니까? 우리는 이 시대에 진정으로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죽하면, 빗나간 충성이기는 하지만 충성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사람들은 5 공화국의 실세였던 장세동씨를 떠 올릴까요? 왜냐하면 그는자신이 섬겼던 대통령을 위하여 목숨을 걸은 듯 처신했기 때문입니다.

신군부의 음모로 시작된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의 문제,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발생한 수없이 많은 시민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문제, 무리한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생긴 비리, 권력층에 기생한 부정축재자들과의 연계 등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 터질 때마다 그는 언제나 대통령을 위하여 몸으로 문제들을 틀어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을 수없이 오갔지만,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의 집으로 직행해 큰 절을 올리면서 이렇게 인사했다고 합니다.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 빗나간 충정이기는 하지만 충성된 사람이 목마른 시대이기에 사람들은 그를 연민의 정으로 바라봅니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겠노라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미 사무엘하 10장에서 이스라엘은 암몬과 1차 전쟁을 했습니다. 다윗이 왕의 죽음에 대한 사신을 정성을 다해 보냈지만 암몬의 신하들이 다윗의 마음을 왜곡하고, 그 사신들에게 수염을 자르고, 엉덩볼기의 옷을 잘라서 치욕적인 모욕을 주어서 돌려 보냈습니다.

사신을 그렇게 대한다고 하는 것은 전쟁을 하자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사람이 모자라서 주변에 있는 수많은 아람사람들과 돕사람들을 3만3천명의 용병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적으로 부족했습니다만은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는 자신이 두 그룹으로 군대를 나누어서 만약 네가 부족하면 내가 돕고, 내가 부족하면 네가 나를 도우라고 형제 간에 우애를 나누면서 형이 동생에게 아주 감동적인 권면을 하고 있지요?

우리 하나님의 성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우리가 행동하자.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여한이 없다. 형으로써 동생에게 그렇게 신앙적인 권면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압과 아비새의 군대, 곧 이스라엘의 군대를 승리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1차 전쟁은 끝을 내렸습니다. 우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새해가 돌아오고 왕들이 전쟁에 나아갈 때 곧 건기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과 암몬은 2차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요압장군은 승승장구했습니다. 암몬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었다고 26절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왕궁이 있는 성, 수도입니다. 수도를 함락했으니 이제 전쟁은 끝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자를 다윗에게 보냅니다. 왕에게 사자를 보내서 이제 우리가 전쟁을 거의 마무리 하려고 그러는데, 제가 생각하기는 이제 이 성을 내가 완전히 점령해서 거기에 이스라엘의 왕의 기를 꽂는다면 사람들이 이 성을 내가 점령한 성이라고,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영광은 다윗왕께서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저 암몬의 왕성 랍바를 점령한 사람이 누구냐고 했을 때 요압장군이 아니라 다윗왕으로 남기를 저는 원합니다. 수고는 내가 하지만 영광은 왕께서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서신을 보냈습니다.

왕이 그 서신을 보고서 군사를 모아서 암몬자손의 왕성 랍바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요압의 마음이 얼마나 왕을 위해서 배려하는 겸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충성이라고 하는 말을 서두로 했습니다만은 충성과 겸손은 이웃사촌과 같은 것입니다. 저 사람은 충성스러운데 교만하다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겸손한데 충성스럽지 않다라는 말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충성과 겸손은 언제나 함께 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언제나 충성된 뿐 아니라 겸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겠다. 반대로 교만한 자는 내가 대적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적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적이라고 하는 말은 의도적으로 물리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요압장군은 성경에 보면 여러 모양으로 다윗에게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기도의 생활, 영적인 생활이 조금 나태해 있을 때 그 때에 사탄 마귀가 틈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항상 깨어서 기도하도록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깨어있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의 사람이지만, 아무리 성령의 사람이지만 영적으로 기도생활이 나태하면 그에게 사탄이 틈탈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영적인 생활에 나태하면 사탄이 틈탑니다. 장로님들도 기도생활에 소홀히 하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아무리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도행활에 소홀히 하면 사탄이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가끔씩 목회자들도 잘 못된 일을 하지 않습니까? 가끔씩 뉴스를 보면 기가 찰 뉴스가 나오는데 왜 그래요? 그거 영적으로 나태해서 사탄이 틈탔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고, 아무리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영적인 생활에 나태했을 때 사탄이 그의 마음을 틈탔습니다. 역대상 21장에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케 했다고 그랬습니다. 다윗이 기도생활에 소홀해서 사탄마귀가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다윗이 격동케 했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까?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열두지파에 모든 지파의 수를 계수하도록 요압장군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에 요압장군이 다윗장군에게 충고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합니다. 일단 왕 앞에서 왕을 계수하려고 하는 이 이스라엘의 백성의 수보다 백배나 더 많은 수를 하나님이 주실 줄로 그렇게 저는 믿습니다라는 축복과 기원의 말을 한 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왕은 어찌하여 이스라엘백성을 계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윗은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역대상 21장 7절에 보면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괘씸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괘씸히 여겨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잘못했는데, 지도자가 잘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속장님 하나가 영적으로 나태하면 그 속회가 시들시들 죽어갑니다. 지역장 한 분이 영적으로 나태하면 그 지역이 시들시들 죽어갑니다. 장로님 한 분이 영적으로 나태하면 교회가 시들시들 죽어갑니다.

하물며 목회자가 영적으로 나태하다고 하면 그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죽어가는 교회가 목사님 한 분이 제대로 오시면 교회가 생기가 넘쳐서 부흥이 일어나고, 어떤 교회는 700명이 넘는 교회가 목사님 한 분이 잘 못 와서 시름시름 교회가 죽어서 300, 200명까지 줄어들고 그랬어요.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한 사람 이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라고 생각이 되신다면 깨어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깨어있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을 받는 사람들도 함께 죽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교만함을 괘씸히 여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잘 못 범했을 때 나단선지자를 보내셔서 깨닫게 하셨는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갓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세가지를 골라라. 성경 66권 중에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시면서 선택권을 주신 유일한 장면입니다. 세 가지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 백성에서 삼년동안 기근을 내가 내릴 터이니 3년동안 기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두 번째는 삼개월동안 이 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여러분, 전쟁에서 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이 30절 중반에서 31절 초반에 보면 다윗이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려오고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무슨 이야기예요? 당시에 전쟁에서 지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을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석 달동안 노예생활을 해 보았냐는 거예요.

세 번째는 뭡니까? 이 땅에 온역이 가득하리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하리라. 다윗은 고민했습니다. 삼 년동안 기근을 택할 것인가, 석달동안에 전쟁에 패해서 고통을 받을 것인지, 삼일동안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을 것인지, 그래도 다윗은 고민 중에 삼일동안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것이 그래도 낫다라고 생각을 하고, 내가 삼일간에 온역을 택하겠나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칠만명이었어요. 다윗 한 사람이 교만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무고한 7만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지도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충고합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 거기서 선생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책임이 있는 일입니다.

그 때에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이여, 백성을 계수케 한 자는 나인데, 어찌하여 이 양무리에게 고통을 주십니까?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눈물로 호소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냉정하게 그들에게 온역을 주셨습니다.

3일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합니다.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으라. 회개의 단을 쌓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회개의 단을 쌓았습니다.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저 7만명이 죽은 것은 바로 나의 교만함 때문입니다. 그 회개의 제단이 곧 예루살렘성전의 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압은 이렇게 시시때때로 자신에게 있어서 왕을 향해서 때로는 목숨을 걸고 전쟁에서 충성을 하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잘 못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라는 신앙적인 충고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미움을 받는다면 죽음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요압은 전쟁에서도 목숨을 걸었고. 왕에게 충고를 하는 일에도 사실상 목숨을 걸었습니다. 목숨을 건 충성된 사람 요압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충성된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계시록을 한 번 볼까요? 다같이 성경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한 번 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중반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충성하되 그 충성의 수준을 말씀해 주셨어요. 어디까지입니까? 죽기까지 충성하라. 약삭빠르게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그렇게 하지 말고 충성하는 흉내만 내지 말고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평안의 성도들이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주의 종을 위해서 정말 생명을 거는 성도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손해가 되는 일이 있어도 싹싹 비켜가지요. ‘누가 그랬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 목사님이 그랬을걸요?’ 그러면서 자기에게 오는 공격과 비난의 화살을 싹싹 피해 다닙니다. 그리고 목사에게 비난과 어려움과 곤란한 것은 다 가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제가 어떤 생각이 들어요? 저 사람은 일꾼 되기는 어렵겠구나. 함께 오래도록 하기는 어렵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떤 어려움과 수모와 손해가 있어도 자기 선으로 다 감당하려고 할 때 저 사람과는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 저런 충성된 사람과 헌신된 사람과는 무덤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부목사님에게 그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담임목사에게 헌신적인 사람이 좀 되어보라. 부서에서 일하다가 애로사항이 있으면 싹싹 피해서 담임목사에게 화살 피하지 말고, 온몸으로 막을 그럴 마음을 가지고 있어보라. 저는 장로님들에게 그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당신들 선에서 온 몸으로 그 문제를 감당하라. 담임목사에게까지 그 문제가 오지 않도록 한 번 그렇게 충성해보라. 그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충성된 사람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충성을 해도 감동이 옵니다. 잘못된 충성한 사람을 보아도 얼마나 충성된 사람이 그리운지 오히려 연민의 정이 생겨요. 우리에게도 저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물며 정상적이고 온전한 하나님의 의에 기초한 충성된 사람,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을 걸기를 다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그것은 우리의 약삭빠른 우리의 삶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생명을 다해서 이 요압장군이라고 한다면 이 전쟁에서 육신의 생명을 다해서 왕에게 충성을 하고, 마지막 영광의 자리에 있을 때 그 영광을 가로채지 않았어요. 그냥 밀고 가서도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이지만, 그는 마지막 그 영광의 자리는 왕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암몬왕이 사역했던 면류관을 다윗왕이 쓰도록 했습니다. 그 왕의 면류관이 금 한달란트의 중량이라고 했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임금이니까 6000데나리온은 엄청난 양이지요. 한 달란트를 요즘 우리의 무게로 보면 37㎏입니다.

그러니까 그 왕관은 왕이 평소에 썼다기 보다는 왕권에 대한 왕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의식이 있을 때에만 한 번 써보고 이렇게 왕권을 상징하는 그 나라의 국보와도 같은 것이지요.

그 왕관을 다윗왕이 사용합니다. 그 왕관을 다윗이 씀으로써 암몬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 왕관을 요압장군이 목숨을 걸고 자기가 싸웠노라고 1차, 2차 전쟁에서 자기가 생명을 걸고 싸웠노라고 그 왕관을 자기가 쓰지 않았어요. 다윗왕에게 그 왕관을 쓰게 하고 자기는 자기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는 내가 하지만 영광은 주님께, 오늘날 우리가 온갖 생명을 다해서 헌신하지만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는 그 고백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되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진정으로 이 시대는 충성된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이해관계에 약삭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충성된 사람인가, 주님 충성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 요압은 다윗에게 면류관을 양보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했지만 면류관은 왕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의 겸손, 그의 충성, 그 아름다움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진정으로 충성됨을 간직하게 하옵소서. 어떤 자리에서도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셔서 교만이 틈타지 않게 하시고 겸손의 자리에 서게 하옵소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충성과 겸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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