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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킨 아브라함의 제물 (창 22:1-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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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 오셔서,“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네가 그 소중한 것을 내게 가져올 수 있겠느냐? 내게 바칠 수 있겠느냐?”라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재물이 가장 소중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자녀나 가족이 가장 소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일하는 직장이나 전공, 재능이 가장 소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시간이 가장 소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좋아하는게 천양지차입니다. 어떤 이들은 취미가 참 독특해서, 어디 가서든 좋은 것만 보면 모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림만 보면 그것을 수집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분 집에 가면 당연히 그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집 팔고 논 팔아서 그림 사들여도 아까운줄 모릅니다. 수석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나다가 좋은 돌만 있으면 주워옵니다. 쌀을 한 말 지고 가다가도 좋은 돌을 발견하게 되면 쌀을 버리고 수석을 들고 와야 할 정도로 그렇게 돌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모으는 취미가 있습니다. 어디 가서 좋은 고서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구해서 옵니다. 조선시대 어떤 분은 상복을 구하는 취미가 있었다고 하는데, 누군가 장례만 치루면 가서 상복을 얻어다가 쌓아놓곤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참 취미가 다양합니다. 그만큼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실 때에, 우리는 그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자 , 성경 속으로 여행을 떠나 봅시다. 오늘 이와 같은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내게 바치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청천 벽력같은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나...'그 마음의 고민은 미루어 짐작도 어려울만큼 힘겨운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아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입니다. "내가 애초에 아들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내게 아들을 주셨지. 그러면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지 않는가. 아들을 주신 그 분이 다시 달라고 하시는데 내가 못 드릴게 어디 있겠어..."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는 정도의 '드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잡아서 번제물로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결단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 역시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거짓믿음이다. 죽은 믿음이다.”라고 증언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쪼갠 장작을 사환의 등에 지게 하고 모리아 산을 향해서 올라가는 도중에 아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에 있는데,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차마 아브라함은 ‘그 번제물은 바로 너 이삭이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준비 하실거야.”라고 말합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사환들은 다 돌려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올려놓고 그를 칼로 찌르려고 하면 사환들이 그냥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 주인이 너무 더워서 정신이 돈 모양이구나.’하고 아브라함을 만류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에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 생활에 방해되는 것들을 미리 다 제거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들 이삭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칼을 들어 아들을 찌르려고 했을 때, 누가 다급해 했습니까? 하나님이 다급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십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 네 마음을 알았노라.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 줄 내가 알았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돌려 보니 수풀에 수양이 걸려 있습니다. 그 수양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리고 아브라함은 산을 내려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들 이삭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나를 더 경외하는 것을 내가 이제 알았기에 내가 너에게 복을 준다.”하시며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보다 더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할 것이다. 네 몸에서 나는 씨를 통해서 해적의 문을 열게 될 것이고, 네 후손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영적 우승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이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구원받을 것을 우리에게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본문 이야기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제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하나님을 감동 시킨 아브라함의 제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의 예배, 예물, 오늘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몇 년 전만해도 많은 기업들이 고객들에게 좋은 물건들을 공급하고 그들로부터 호감을 받으려면 고객을 만족시켜야 된다는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바로 ‘고객만족’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고객을 만족시켜야 우리 물건을 계속 살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몇 년 지나더니 이제는 고객 만족 가지고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이 생겼습니까? 고객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고객을 감동시킬까. 이것을 밤낮없이 연구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도 노트북을 삼성 서비스 센터에서 수리해 왔습니다. 그랬더니 어김없이 이틀 후 전화가 왔습니다. “노트북 괜찮습니까? 잘 쓰십니까? 문제가 없으십니까? 혹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오세요. 다시 수리해 드릴께요.” 이렇게 친절합니다. 여러분들도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산다면 아마 며칠 후에 꼭 전화가 올 것입니다. 문제가 없느냐고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고객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가면 쳐다보지도 않고, 텔레비전, 신문 보느라 “어이 왔어요? 뭐 살래요?”할지언정 큰 슈퍼마켓등을 가면 얼마나 친절한지 모릅니다. 고객을 감동 시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한 번 온 고객을 영원한 고객으로 모시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객감동가지고도 안된다고 합니다. 요즘은 ‘고객졸도’가 목표라고 합니다. 고객이 졸도할 정도로 그렇게 서비스를 베풀어야 된다는 뜻이랍니다. 

  여러분, 일개 회사도 그 제품을 팔기 위해서 고객을 감동, 졸도시키는 차원까지 이르렀는데, 우리는 일생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이 예배가, 우리의 헌물과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고 있느냐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제물, 아브라함의 예배는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바꾸셔서, 이삭 대신 수양을 준비시키셨고, 이삭의 생명을 살려 주시고, 아브라함의 마음을 칭찬하시고, 그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감동받으시는 제물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첫째는 순종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1절, 2절,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멘.

  여기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순종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이 상황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바치라는 주님의 요구가 무리한 요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국 순종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자발적인 순종의 표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일 것입니다. 가기 싫은 곳에 억지로 가려하면 자꾸 늑장을 부리게 되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자자.’하고 말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면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가 없기에 아들과 함께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불쏘시개를 준비하느라고 시간을 지체할 수도 있었을테지만, 그는 장작을 다 패서 불쏘시개를 다 준비했습니다. 그리곤 사환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이렇듯 순종은 지체없어야 합니다. 늑장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왕 할 일이라면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순종은 반문없이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10년 전에는 아들 준다고 하시더니, 이젠 다시 아들 달라고 하시니 그 무슨 뜻입니까?” 반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진정한 순종은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투덜댔다는 소리가 없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분들은 내 의지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면 불평할 것입니다. 투덜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순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순종했습니다. 반문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18절 후반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말에 그대로 순종하고, 내 말에 그대로 복종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제물이 하나님 앞에 순종의 제물이 될 수 있기를, 또 여러분의 삶이 순종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감동받으시는 제물은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그 제물은 희생의 제물이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막 찌르려고 하는 순간에 천사를 보내셔서 “그에게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 줄 내가 이제 알았노라”라고 말씀을 전하며 막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게 무엇입니까?  그 가정에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당연히 자기 아들 이삭입니다. 그 아들은 25년 만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기다리는데, 한해 두해 손꼽아 기다려서 25년만에 얻은 아들이란 얘기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요, 가장 귀중하고 소중한 아들이요, 자신의 생명과도 맞바꿀 수 없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도 하나님 앞에 아끼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아까운 것이 있습니까? 시간이 아깝습니까? '주일 예배만 나오면 되지뭐' 하는 마음이 있으신지요. 주일 오후 예배, 수요 예배 드리려니 시간이 아깝다 싶으십니까? 그래서 많은 분들이 수요예배나 오후예배는 못 드립니다. 시간이 아까워서 낭비하는 것 같아서 주일날 얼굴만 보고, 출석만 부르고 오면 되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떤 귀한 것이라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거기엔 엄청난 희생이 동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자기 부인 사라에게도 아마 이 문제를 의논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종들도 다 떨쳐버렸습니다. 자기 혈육을 끊어야 되는 이 엄청난 결단 앞에 그는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예배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축도하면 끝이지만, 구약의 제사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라는 것은 피의 제사요, 희생의 제사입니다. 누군가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사람 대신 양 한마리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어찌 보면 희생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가 진정 희생의 예배입니까? 여러분들이 드리는 헌금이 희생의 헌금입니까? 여러분들이 봉사할 때 그것이 희생의 봉사입니까? 이것은 내가 봉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원리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헌금하기 위해서 다른 생활을 줄이고 희생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희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체면치례 정도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반문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제물은 희생의 제물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독자 아들까지 하나님 앞에 내 놓는 희생의 결단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예배가 희생의 예배, 희생의 제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감동 받으시는 제물은 어떤 조건이 필요 할까요?

  그것은 사랑의 제물이어야 합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사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오늘 12절에 보니까 후반 절에 “오늘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네가 너무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고 높이는 것을 알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배, 봉사, 제물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가인과 아벨 형제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열납 하셨습니다. 아벨의 제물이 꼭 양을 잡아서 피 흘림이 있는 제물이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벨의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이 받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을 받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은 딴 데 가 있는데, 제물만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윗 왕을 보십시오. 그는 어떻게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가지게 되어서 그 마음을 나단 선지자에게 고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아직 재물은 드리지도 않았고, 건축은 벽돌 한 장도 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기쁘게 여기신 것입니다. 다윗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네 몸에서 날 자 가운데 왕위를 이을 자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불행히도 다윗은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솔로몬이 건축하고, 다윗은 그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다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하신 것입니다. “나는 네 제물이 아니라 네 마음을 원한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그 마음을 드렸습니다. 세상 어느것 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뜨거웠기 때문에 아들 이삭마저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세상과 하나님 중 누구를 더 사랑하십니까? 오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25년 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었더니 아브라함 너무 좋았습니다. 100세가 된 노인이지만, 그저 아들 자랑만 하고 다닙니다. 아들하고 지내느라 하나님 앞에 기도도 안하고, 예배도 소홀히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오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이삭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가족과 친척까지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녀를 사랑하는 일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지내는 분은 없습니까? 재물과, 명예와 건강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상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그 제물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의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순종과 희생과 사랑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이 예배를 어떻게 받으셨고, 응답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숫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13절 14절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까지 미리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숫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뿔이 수풀에 걸린 양이 있었고,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다가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은 ‘산에서 하나님이 준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준비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시고, 이삭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릴 숫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이십니까!

중국에서 일생을 바쳐 헌신했던 허드슨 테일러란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분의 좌우명 중 하나는 ‘에벤에셀’입니다. 그 뜻은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셨다.”입니다. 그가 살아온 생애를 돌아보면 이 자리까지 나를 인도해 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 일생을 준비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셨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여러분의 생애도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건축하는 것도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를 다 준비해 주실 것을 믿고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드리는 것이 진정 순종의 제물, 사랑의 제물일 때 하나님이 그 위에 더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숫양만 준비하신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축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오늘의 성경 17절, 18절을 읽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제가 오늘 16절을 읽지 않았습니다만, 천사의 두 번째 말이 반복됩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독자를 아끼지 아니했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아들 독자 이삭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을 축복하시기 전에 그를 먼저 시험하십니다. 요즘은 국무총리, 대법원장 같은 사람들을 임명하기 전에 국회에서 청문회를 합니다. 이 사람이 정말 하자가 없는지, 옛날에 살아온 삶이 올바른지 검증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또 부동산 투기를 하지는 않았는지 이런 것을 다 검증합니다. 검증 절차가 다 끝나면 그를 국무총리로, 장관으로, 대법원장으로 임명 합니다. 하나님도 한 사람을 축복하기 전에 그를 검증하십니다. 정말 이 사람이 복 받을 만한 믿음이 준비되어 있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테스트입니다.

성경에는 보통 3가지의 시험이란 말이 나오는데, 일반적인 시험은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주는 시험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한 시련이 있습니다. 세 번째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더 한 단계 높은 믿음의 단계로 세워 주시고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주시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정말 내 사랑하는 독자,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는 아브라함의 마음,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제물, 우리의 예배, 봉사가 순종과, 희생과 사랑의 예배와 재물이 되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복을 받기에 합당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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