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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웃을 사랑합시다. (약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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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 여승진이란 이가 새 집을 샀습니다. 누군가 집값을 물으니 1천 1만 금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집이 그렇게 비싸냐고 하자, 1만 금으로는 집을 사고, 1천만 금으로는 이웃을 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과의 화목공존을 얼마나 중요시 했던가 손에 잡히는 듯합니다.

중종 때 학자 김정국도 `천금으로 밭을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시를 남기고 있다 합니다.

지혜의 글에는 "만일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고 가정해 봅니다. 이 아이를 두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아니면 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머리가 두 개이니까 두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몸이 하나이니까 한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합니다. 두개의 머리 중 한 머리에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부어 만일 양쪽이 다 뜨겁다고 놀라서 울면 바로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쪽은 뜨겁다고 우는 반면에 다른 한 쪽은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히죽 웃는다면 그것은 두 사람입니다.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도 강도만난 사람에게 진정한 도울 자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참된 이웃은 사랑하는 이웃이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달동네로 갔습니다. 집집마다 돌면서 기도하고 위로를 하는 등 구제 사업을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집에 가니까, 어떤 여자가 소아마비를 앓아서 온 팔과 다리가 마른 막대기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는데 너무너무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더럽고 냄새도 나지만, '저 사람이 언제 제 때에 따뜻하게 밥을 먹어 보았을까? 언제 따뜻한 물에 목욕 한 번 해 보았을까? 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저 사람에게 저녁을 따뜻하게 지어서 대접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언제 목욕을 제대로 한 번 했겠습니까?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씻겼는데, 제가 목욕을 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서원 기도를 하고 날을 잡아서 차로 그 분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와서 목욕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목욕을 시키면서 벌써 후회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 몰골이 너무 흉해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서원대로 따뜻한 밥을 먹여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 남편이, "당신 정말 천사 같구먼. 당신은 요즘 금세기에 보기 드문 천사 같은 아내야." 하고 칭찬을 하는데, 문제는 그날 저녁에 일어났습니다. 이 부인이 그 여자를 집으로 모셔다 드린 다음에 그 숟가락을 버리려고 하다가 꼭 저주를 받을 것만 같아서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밤새도록 씻은 것입니다. 물론 욕조도 밤새도록 씻었습니다.

  자기가 밥 먹고 난 다음에도 수저를 그렇게 씻습니까? 욕조도 그렇게 씻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욕조를 씻으면서, 설겆이를 하면서 이 부인이 '이것이 위선이구나. 내가 참 더러운 인간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남편에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추하고 악하더라는 고백을 했답니다.

  하늘나라 천사 둘이서 세상에 내려왔는데 한 천사는 가난한 노동자의 모습으로 또 한 천사는 부잣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몇 해 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두 천사는 서로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저 세상은 참으로 살 곳이 못되는 곳이야.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잘 사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힘들고 어렵게 살 수밖에 없었거든." 이 말을 듣고 있던 두 번째 천사는 이상하다는 듯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상하다. 난 강아지의 모습이었는데도 사람들은 내게 고급 음식을 아끼지 않고 늘 보살펴 주던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기와 어우러져 살아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첫 번째 천사의 탄식이었습니다.

요즘 각 가정에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외아들이나 외동딸인 경우 외로울까봐 일부러 그런 애완동물을 키우는 가 봅니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주위에는 생각 외로 어렵고 외로운 이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실 때 서로 도우며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정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향해 최소한 애완동물에게 기울이는 관심의 이상으로 사랑을 나누어야겠기에 하는 이야기입니다.(디럭스바이블- 노동자와 강아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나쁜 일이나 야고보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행위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왜 불합리한가를 설명하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라 합니다. '최고한 법'(노몬 바실리콘)은 '왕'의 법'이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에 의해 제정된 법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법이었습니다. 야고보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법은 그 자체가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이 하나님의 법은 다른 율법보다 포괄성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주장하는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레 19:18; 마 22:39). 곧 상대방을 외모로 구별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가족처럼 도와주며 사랑합시다.

날씨가 매섭게 추웠던 겨울날 하필이면 실외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열차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중 옆에서 함께 열차를 기다리던 젊은 어머니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추운 날씨 탓인지 꼬옥 끌어안고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간 열차가 들어오고 추위에 떨고 있던 엄마와 아이는 황급히 열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아이의 어머니는 연신 아이를 쳐다보며 밝은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엄마와 아이가 스쳐 지나간 곳에는 손에서 떨어져 나간 목발을 다시 짚고서 약간의 통증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부끄러운지 이미 닫혀버린 열차 문을 뒤로하고 유유히 다음 칸으로 몸을 옮겼습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 틈에서 아이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미쳐 목발을 짚고 있던 청년을 밀친 것을 느끼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살 인 줄 믿습니다.

  이웃의 사랑을 체험한 어떤 분의 간증입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12시가 다 되어 늦게 집에 돌아오면 꺼져있는 연탄불. 아무리 해봐도 16시간 동안 연탄을 갈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내가 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 집에 돌아오면 아내의 환한 반겨 맞음은 참으로 따뜻함이었는데 아내가 없는 집은 연탄불까지 꺼져버린 싸늘함입니다. 오늘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열쇠로 문을 따기보다 먼저 아궁이 뚜껑부터 열어봅니다. '아! 그런데 웬일이냐?' 빨갛게 이글거리며 타고 있는 연탄불. 그리고 따뜻한 열기. 향긋한 냄새(?)...이건 아니고, 누군가가 연탄불을 갈아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3일이나 천사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하 할머니가 갈아놨나? 아니면 옆방? 아니면 인택이네 식구들 중 누구? 아니면 연탄들이 내가 불쌍해서 자기들끼리 스스로 회의를 해서 임무교대를 한 건지...'  누군지도 모르는 분으로부터 3일간이나 따뜻한 도움을 받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삶이란 다른 여러 '정의'가 많지만 나는 이렇게 삶의 정의를 내려 봅니다. “방 구들장 선뜩선뜩. 그 싫은 느낌을 연탄은 제 몸 살을 따끈따끈하게 해주지 않는가. 매일 세수하고 이빨 닦고 발 닦고 걸레 빨 따뜻한 물도 데워주고, 된장찌개 보글보글, 밥해 퍼먹으면서도 연탄의 희생을 생각이나 해 봤는가.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은 나를 산산이 부수는 것이 아닌가. 눈이 내린 아침에 예쁜 아가씨 뾰쪽구두 신고 가다가 미끄러져 엉덩이 깨지면 안 된다고 그나마 남은 재마저 빙판 길에 팍팍 부딪혀 부수어지는 연탄재 같은 것 아닌가. ‘그래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과 연탄이 되어라.’ 고맙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시지만 연탄을 갈아주신 분이어. 부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그리고 연탄 계속 갈아주소서!”( 누구일까, 이 고마움)

두 화가가 기독교 진리의 두 가지 양상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두 화가 모두 휘몰아치는 폭풍과 성난 파도에 휩싸인 커다란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위기에 빠진 어부가 두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단지 자기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그림이며, 다른 하나는 어부가 한 손으로는 십자가를 꽉 잡고서 바다에서 헤어나려고 애쓰는 동료를 구하려고 다른 손을 내미는 그림이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삶이라는 고해'의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그리스도인이 지향할 바를 더 생생히 표현했을까요?  한 손으로 '험한 십자가를 꽉 붙들었다'면 다른 손은 물에 빠져 애타게 구원을 바라는 내 이웃 사람들에게 내밀어 '바다를 놀랍게 지배하시는'예수께로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겸손히 내가 먼저 이웃을 사랑합시다.

유명한 흑인 교육가 부커 워싱턴 박사가 앨라배마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후 그 지역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백인 부인이 그가 워싱턴 박사인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흑인이려니 해서 멈춰 세우고 몇 달러 줄 테니 장작이나 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총장은 그때 특별한 일이 없었고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서 그녀의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 그가 돌아간 후 그 집 흑인 하녀가 그를 알아보고 주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그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해서 다음날 아침에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부커 워싱턴 총장은 “부인, 괜찮습니다. 저는 가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 그뿐입니까. 이웃을 위해 돕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요”하며 위로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을 세워주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2)

어느 동네에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 어디론가 이사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식구들을 다 이끌고 다른 동네로 떠나갑니다. 그는 그 동네를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동네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식하고 가난하고 예절도 모르고 욕심은 많고 싸움질만 하고... 그래서 우리는 생각다 못하여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같은 시간에 다른 한 사람은 식구들을 데리고 그 동네로 이사해 들어옵니다. 역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가는 그 사람이 살던 집을 사서 그리로 이사를 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많이 앓기도 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볼까 하여 이 동네로 이사 오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그들을 힘자라는 대로 도와 볼까 합니다" 그 동네를 떠나는 첫째 사람은 좋은 이웃을 찾아서 이사를 가는 것인데, 아마 모르긴 해도 그가 바라는 좋은 이웃을 영원히 찾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끝없이 헤매거나 실망의 쓴잔을 마시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둘째의 이사 오는 사람은 짐작컨데, 어디를 가든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맡기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부산 사상구 엄궁동의 '외갓집 사골 해장국' 주인 박기인(40)씨는 요즘 손님을 맞을 때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합니다. 박씨에게는 '손님'이라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라 합니다. 개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는 박씨는 남들처럼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을 위해 하룻동안 해장국을 서비스했습니다. 그리고 출입구 옆에 성금함도 갖다 놓았습니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돈을 내라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나가도 되는 '자율 모금'이었습니다. 행사 당일 주방에서 나간 해장국은 모두 200여 그릇. 한 그릇에 4천원이니 어림잡아 80여만 원 어치입니다. 손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모금함을 제대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영업이 끝난 뒤 함을 열어보니 무려 103만 5천원이나 들어있었다 합니다. 박씨는 이날 자선 행사를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쓰려고 했지만 그마저 동네 새마을 부녀회원들이 몰려와 설거지, 홀 서빙을 무료 봉사를 해준 덕분에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동사무소에 "의탁할 곳 없는 어르신네들을 위해 써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 온 박씨는 요즘 30여평 가게에서 사골 해장국보다 더 구수한 인정과 사랑의 내음을 맛보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어느 작가는 말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이 우리에게 준 예기치 않은 선물은 어려운 이웃을 한 번쯤 더 돌아보며, 그들을 돕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삶의 기쁨은 지극히 평범하고 상투적인 모습을 빌려 우리에게 찾아오곤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삶의 기쁨을 찾아가는 모습도 그러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성경은 말씀 합니다. (행20:25)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전 재산이 반 크라운(2실링 6펜스)밖에 안 되는데, 마침 가난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어머니가 몸져 누워있었습니다. 하룻밤을 넘기기 힘든 엄마와 아기였습니다. "이 돈이 1실링짜리 동전 3개와 6펜스 동전 하나라면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 텐데!"하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라고 권면하면서도 속에서는 "이 위선자, 이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반 크라운을 움켜쥐고 있다니!" 하는 소리가 그의 가슴속에 울려왔습니다. 마음에 가책을 받은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반 크라운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골길을 지나 단칸방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은 그의 빈 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빌려드린 것이 오래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내일 점심부터 굶어야 합니다." 다음날 우체부 편으로 반 소프린(10실링)의 금화 하나가 우송되어 왔습니다.

쟝발장이 빵 하나를 훔쳐 감옥에 가서 몇 번 탈옥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19년 형을 살고 출옥을 했는데, 그날 밤에 갈 곳도 잘 곳도 없어 길거리를 헤매다가 한 성당에 들어가 “19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나왔는데 아무도 받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신부님이,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식사를 하시오”하며 금 그릇에 은촛대를 켜고 최고의 대접을 하며 새 이불을 깔아 주니 잠을 자다 새벽에 깨어 어떻게 살까 생각하니 막막합니다. 아무도 오라는 사람도 없고 밑천도 없습니다. 은촛대와 금 그릇이 눈에 아른거리며 ‘저것만 가져가면 밑천으로 해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신부를 배반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생각하다가, ‘어차피 버린 몸인데 도둑인데’ 하고 은촛대를 들고 나가다 경찰에 잡히고 끌려와 “이것, 신부님 것 맞죠?”하니 “그것은 내가 준 것이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 나갔는데요.” 하자 경찰이 나가자 “쟝발장, 나는 은촛대로 당신의 영혼을 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세요.” 이 말을 듣고 쟝발장은 뉘우치고 참된 사람이 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성도로서 이웃을 사랑합시다. 가족처럼 도와주며 겸손히 먼저사랑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사랑합시다.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라고 합니다.
(강 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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