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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다루는 지혜(왕하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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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누구에게나 입합니다. 고난의 종류기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은 욥, 바울, 다윗 등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크면 축복도 큽니다. 이것은 축복의 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당하는 고난도 있는데 예수님, 스데반, 바울과 주의 제자들 등이었습니다. 고난이 크면 상급도 큽니다. 이것은 하늘 상급의 길입니다. 그러나 나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나와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고난이 크면 죄도 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과거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나라에 다녀갔습니다. 영국 여왕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역시 전 세계인의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에 보니까 짓궂게도 여왕의 그늘진 부분을 기사화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여왕의 자녀 문제였습니다. 찰스 왕세자의 이혼, 다이애나 비의 염문과 교통 사고사, 왕자들의 스캔들, 그로 인해 한때 왕실 폐쇄 여론이 비등했던 일 등,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역시 걱정, 근심.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업ㅆ습니다. 그래서 알고 보면 사람마다 가정마다 숨은 속사정인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일생 동안 수많은 고난과 역경과 마주치며 살아갑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1절에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나아만! 그의 경력 프로필을 보면 대단합니다. 그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아람, 즉 시리아는 당시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의 국방부 장관이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실세'인 것입니다. 그는 과거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구국 공신입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고민 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치명적인 불치병으로 당시에 천형으로 여겨졌던 문둥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처럼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습니다. 걱정, 근심거리가 나름대로 말못할 사정이 있는 게 인생인 것입니다. 다만 그 종류와 정도가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차피 고난이 있게 마련이라면 그 '고난을 다루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동일한 고난이 찾아 와도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인생이 전혀 달라집니다. 고난을 잘못 다루면 곤욕을 치르고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반대로 고난을 잘 다루면 오히려 큰 축복이 됩니다. 이것이 고난의 양면성입니다.

저는 고난을 바람에 비유해 봅니다. 바람을 잘못 다루면 어떻게 됩니까? 큰 피해를 봅니다. 건축물이 부서지고, 선박이 유실되고, 나무가 절단되는 등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바람을 잘 다루면 어떻게 됩니까? 큰 유익이 있습니다. 새가 날개를 쫙 펴고 활공할 때 바람이 꼭 필요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풍차를 돌려 제분을 했고,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풍력 발전 시설도 있습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두 번이나 성공한 사람을 신문 기자가 만나 물었답니다. '항해 중 뭐가 가장 힘들었나요?' '바람이 불지 않을 때였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 같지만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고, 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고난을 잘 다루면 됩니다.

나아만을 통한 교훈은 우리에게 귀한 지혜를 얻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고난을 요리 조리 피해 가는 얕은꾀가 아니라 '고난을 다루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고 값지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만 터득한다면 세상에 뭐가 무섭겠는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런 지혜를 잘 터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 많은 우리 인생이지만 그 고난 때문에 오히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더 아름다워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에 등장하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고난을 다루는 지혜를 살펴봅시다.

1. 고난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고난이라는 것 자체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거기는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2:11절에 보면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 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고난의 양면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인생에 닥쳐온 고난을 통해 오히려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온 소녀의 말을 믿고 이스라엘을 찾아갔다가 문둥병의 고난을 잘 다룸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 문둥병을 치유 받을 뿐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았습니다. 그의 기쁨에 가득 찬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이것은 그의 영적인 눈이 확 떠지며. 터져 나온 감격적인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그에게 문둥병의 고난이 없었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요? 아마 그럭저럭 육신적으로 안일하게 살았을 뿐,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부귀영화가 아무리 대단했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영혼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신령한 눈이 떠져서 천국을 바라보고, 소망하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자체는 불행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다루는 지혜가 없는 것이 불행입니다. 이런 시각을 갖지 않는 한 우리 인생이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디 고난에 대해 이와 같은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고난을 잘 다루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고난을 다루는 지혜를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1)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대개 낙담하고 좌절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잘 다루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다루기는 힘들지만 전혀 다룰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문둥병은 요즘도 고치기 힘든 병이지만, 나아만 장군 당시에는 1%의 치유 가능성도 없는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데려온 소녀가 하는 말을 아내로부터 전해 듣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허락을 받아 멀리 이스라엘까지 달려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가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아직 하나님을 만난 것도 아니고,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그를 고난에서 건져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성도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그런 상황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는데 과연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우리가 고난의 상황에서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일까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렘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했고,

잠언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고난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임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 인물을 봐도 그렇고, 역사 속의 인물을 봐도 그렇고, 우리 주변의 인물들을 봐도 역시 그렇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중학교 시절 3번이나 낙제했습니다. 육사에 못 가고 포병학교에 보결로 입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수상이 되어 명문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연단에 올라가 '포기하지 마시오. 포기하지 마시오.' 두 마디만 외치고 내려 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 간증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앞으로 고난이 올까봐 걱정되십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꼭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창 3장에는 인간의 고난의 시작이 죄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6-19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범죄 한 후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에덴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온갖 고난이 존재하는 삶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이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해답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면 불치병을 고침 받을 수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녀의 전도를 통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는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아랍 왕이 준 선물과 친서를 갖고 먼 길을 떠납니다.(4-5절)

물론 이런 것들이 그의 치유를 위해 직접적인 도움이 된 것은 아니지만,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는 신앙적 열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길이 없지만 하나님께 길이 있음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기대가 주효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의 유익을 깨닫게 됩니다. 만일 나아만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소년의 전도가 귀에 들어 왔을까요? 오히려 호통을 치며 야단했을 겁니다. 그런데 고난이 있으니까 귀가 열린 것입니다. 고난은 영적인 귀를 열어 줍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고난은 하나님의 전보입니다. "어서 오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삐삐치는 겁니다. "8282(빨리빨리)" 그 신호를 알아듣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분께 부르짖고 간구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고난을 넘어 영광과 축복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대개의 사람들은 고난이 닥쳐오면 답답함을 느낍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기회를 놓치고 주저앉아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답답할 때, 막막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으면 길이 열립니다.

고난과 고통 문제만 보지말고 문제를 동원하신 이유와 동원하신 분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사또가 죄인에게 곤장을 치라고 말했습니다. 매 맞는 사람이 아프니까 그만 때려 달라고 사정할 때 매를 때리고, 있는 포졸에게 아무리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또를 보고 사정을 해야 매가 멈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 정글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초행이라 원주민의 안내를 받기로 했습니다. 정글이 얼마나 울창한지 길이 없었습니다. 근심이 되어서 안내원에게 묻습니다. "길이 없잖아요. 잘못 왔나 봐요." 그랬더니 안내원이 웃으며 하는 말. "정글에 무슨 길이 있나요? 제가 길이죠. 저를 따라 오세요." 그렇습니다. 정글 같이 막막한 우리 인생길, 자주 고난이 가로 막아 답답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만 나아가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없는 길도 만들어 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이 말씀대로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 나아가 승리의 길을 열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아만이 이스라엘에 가서 왕을 만납니다. 아람 왕의 친서를 본 이스라엘 왕이 당황합니다. 자기더러 불치병을 고쳐 주라니! 혹시 생트집을 잡아 또 침략하려는 것은 아닌지 겁이 덜컥 났습니다(6-7절). 그 소문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사람을 왕에게 보내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말합니다(8절).

그래서 나아만은 또 엘리사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9절). 그런데 엘리사가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 몇 마디 툭 던집니다(10절).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러자 나아만이 화를 벌컥 내고 맙니다. "불원천리하고 왔는데, 이래 뵈도 강국 아람의 군대장관이 왔는데, 버선발로 뛰어 나와도 시원찮은데... 이런 괘씸한지고..." 라고 투덜거립니다(11-12절). "환대하며 안수라도 해 줄 줄 알았는데, 요단강에 가서 벌거벗고 목욕하라고? 그 똥물에? 우리나라 다메섹의 아마나, 바르발 강은 더 깨끗한데! 에이, 차라리 가자, 가."

다행히 지혜로운 부하들이 충고했기에 망정이지(13절), 그렇지 않았으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 됐을 겁니다. 그래서 좋은 이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위의 부하들이 충고합니다. "장군님, 더 심한 일도 하라면 해야 될 텐데 목욕도 못하십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맞습니다. 불원천리하고 왔는데 화내고 가버리면 무슨 꼴입니까? 자기만 손해지. 그래서 엘리사가 전해 준 말씀대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급니다. 그러자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생겼습니다.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과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14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모든 고난에 대한 '해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혹은 이해도 하고 고개도 끄덕이지만 그대로 따르고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항상 고난의 문턱을 뛰어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 나아만을 보면 문제점을 알게 됩니다. "내 생각에는"(11절). 그는 교만과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존심, 계급, 체면, 지식, 경험 등. 그것을 다 떼 버릴 떄 비로소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자존심이나 따지고, 지식이나 경험을 앞세우며 불순종했다면 하나님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치유와 구원도 받지 못했을 겁니다.

고난의 때 일수록 시급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냉정하게 살펴보고 결단해야 됩니다. 개인 경건 생활(기도, 말씀 묵상 등)은 잘 하고 있는지, 교회 생활(예배, 봉사, 헌금 등)은 잘 하고 있는지, 가정 생활(부부 가족 관계 등)은 잘 하고 있는지, 직장 생활이나 사업 관계 등에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색출해서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미루지 말고, 오히려 어려우니까 기본으로, 원칙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도와주십니다. 기적도 나타납니다. 자꾸 인간적인 계산이나 하고 불순종의 삶을 사니까 고난을 다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기적을 만듭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고난 자체는 결코 불행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다루는 지혜를 갖지 못한 게 불행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는 것이 고난을 다루는 참 지혜인지 깊이 묵상하고 마음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나아만 장군처럼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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