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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케 되는 믿음 (약 2: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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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신비로운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7:20).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며(막 9:23), 불가능이 없는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신비로운 믿음은 언제나 행함을 동반하고 나오는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22절에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고 초대교회 당시 기둥 같은 인물로 불리운 사람입니다(갈 2:9). 그는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약 1:1), 믿음은 있다하면서도 아무런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을 질책하였습니다.
그들은 저희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과 율법의 전통에 따르는 경건을 자랑하였으나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므로써 사실상 죽은 믿음에 불과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하고(26절) 경고하였습니다. 온전한 믿음이라야 생명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것은 믿고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I. 허탄한 믿음

20절에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믿는 다는 것으로 최고의 믿음을 가진 것처럼 내세운다면 이는 허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유일성과 주권성, 전능성을 믿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정도의 믿음으로는 능력이 행사되지 않습니다. 귀신들도 인정하는 일이며 사실 불신자들도 그런 정도는 상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타성에 젖은 신앙만 가지고는 기독교 복음의 신비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1)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흔히 교회생활을 오래했거나 성경을 많이 읽었던 사람들 중에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으로써 그것이 신앙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교리나 신학의 체계를 정리하여 학문적 지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영적이고 신비적인 사실에 접하지 못한 채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에 따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성령이 역사하는 신령한 은사와 능력의 체험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과 토론을 벌이던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학파의 철학자들처럼(행 17:18), 끝없는 논리는 있어도 그 속에 생명적인 능력은 전혀 행사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2) 이적에 의존하는 믿음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신비를 주장하면서 불건전한 이적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성경은 신앙세계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사건들을 현실적이고 통상적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행하신 각종 이적들을 비롯하여 사도들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능력과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계시해 주는 신령한 사건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이적을 시인하는 것이나 예수로 말미암는 이적을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믿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으로 온전한 신앙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정도는 귀신들도 믿고 떠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9절).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희가 나가서 전도할 때 귀신들이 항복하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자랑했는데 이에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눅 10:20).

(3) 말은 하고 실천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적 지식과 경륜을 자랑하면서도 그것이 실천적인 행위로 이어지지 못하는 사람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19-20에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가르치기는 잘하면서 실천하지 못하는 외식을 책망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2-4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실천 없는 믿음 곧 말과 행동이 다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II. 온전한 믿음

지식은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나 반대로 열심과 행동은 있으나 기초가 없는 믿음은 다 영혼 없는 몸과 같이 죽은 믿음이요 허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 야고보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을 지적하였습니다. 23절에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1)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것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임을 뜻하기도 하지만 신약적인 의미에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3:7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가운데 야고보서와 갈라디아서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서로 상반된 입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본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하며 행위를 강조한 반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갈 3:2). 아이러니 하게도 이 두 성경이 다 같이 아브라함을 그 실례로 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6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 15:6에 있는 말씀을 여기서 인용하였는데 거기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께서 늙은 아브람의 부부가 자식이 없어 쓸쓸해 하는데 장차 그들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이 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람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제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여 그대로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증한 것입니다.

(2)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11:8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무조건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는데(창 12:1), 그 때 아브라함은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자기의 장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나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하였습니다. 그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였습니다(창 22:1-14).
본문 말씀 21절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아무리 독실한 믿음이라도 순종하는 행위가 따르지 못한다면 믿음이 있다고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8절에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구하는 강조점도 역시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3) 온전한 믿음의 증거

흔히 “믿음은 나무의 뿌리요 행함은 그 열매”라고 비유합니다. 이 말은 믿음과 행함이 별개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6:44).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양질의 믿음은 거기에 걸맞는 건전한 행동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행위의 뿌리가 되는 믿음이 진리에 기초하지 못한 경우라면 결코 건전한 생활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거기 따르는 결과도 축복의 열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영혼 없는 몸을 죽은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영혼 없는 몸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여 온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며(창 2:7), 만약 이 두 가지가 분리된다면 사람으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도 순종하는 행위와 결합하여 조화 있고 온전케 되는 믿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역대의 선진들은 이와 같이 온전한 믿음의 증거자로 그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히 11:4-40).

III. 능력을 행하는 믿음

예수님께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운데 사데 교회에는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고 하였습니다(계 3:1). 본문 말씀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외모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 안에 호흡이 끊어지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였습니다(창 2:7). 사람에게 생명의 바람을 불어 넣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거두시면 영혼 없는 몸만 남게 되어 죽은 시체로 전락합니다(전 3:20-21).
야고보는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경우를 여기에 비유하였습니다. 곧 생명이 없는 육체가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행동이 없는 믿음은 그 안에 생명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성령으로 호흡하는 믿음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포로시대의 선지자 에스겔은 골짜기를 가득채운 마른 뼈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죽어있는 해골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들어가 그 마른 뼈들이 살아서 일어나는 환상이었습니다(겔 37:1-10). 주님께서는 지금도 능력 잃은 교회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호흡하는 신앙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2) 그침 없이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이사야 선지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의 새 힘을 공급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0:31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침 없이 숨 쉬고 영양을 섭취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재생산 하는 일을 거듭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 역시 말씀과 성령의 은사를 공급받아 계속적인 재생산의 사역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힘을 쓰고 전도하며 영혼 구원하는 일에 투신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역량을 쏟아 붓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보람을 가지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침 없는 사역을 통하여 계속적인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공급받게 되고 그 힘으로 더 큰 역사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4:12).

(3) 신비로운 축복의 증거자가 됩니다.

야고보가 온전한 믿음의 증거자로 제시하는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의 표본이며 동시에 자손대대로 신령한 축복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본문 23절에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25절에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으로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 땅에 진입할 때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도와주어 그 믿음이 인정된 사람입니다. 본래 이방인이요 천한 기생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므로써 그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마 1:5). 또한 그는 후세 사람들에게 온전한 믿음과 축복의 증거자로 기록에 나았습니다. 히브리서 11:31에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손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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