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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나를 건져 주소서 (마 14:22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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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이태리 로마로 가는 중이었다. 이륙하여 한참 가는 도중에 음료수를 나누어 주고, 잠시 후에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기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이 들렸다. 잠시 20-30분 후에는 비행기가 몹시 떨릴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반드시 안전벨트를 메고, 승무원들도 즉시 자리로 돌아와서 벨트를 매라는 기장의 떨리는 음성이 나왔다. 모두가 긴장했다. 밥을 나눠주는데 밥 맛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다 먹었다.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몇 시간이 지나도 비행기가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었다. 기장의 말 한마디가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두렵게 만들었다. 밥맛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로마에 도착해서 시내를 다니는데 “이곳에는 좀도둑이 많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계한다. 늘 가방에 신경쓰고, 주머니에 신경을 쓰라고 한다.” 정말로 신경을 바싹 쓰면서 다녔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위하여 비행기를 탔는데 “강원도에 군인들이 총을 빼앗겨서 총을 든 사람들이 어디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기사를 읽었다.
하늘에 올라가 가도, 로마에 가도, 서울에 가도 어디에든지 두려움과 불안의 요소들이 우리에게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볼 때에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른다. 어느 현직 대학교수는 “6.25 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 내전이었고, 미국이 개입해서 이렇게 파괴의 비극이 있었고, 미국은 민족의 원수이고, 맥아더는 전쟁 영웅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불안을 느낀다. 두려움을 느낀다. 어떻게 이렇게 까지 말할 수 있을까? 국제관계를 보라.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11만 866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그해 연말까지 4만 5천명이 죽었다.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이렇게 무서운 핵폭탄이 수만개에 이른다.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현실이다.

이같이 우리의 현실에 두렵고 불안한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수님께서 따로 떨어져 기도하고 계셨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육지에서 조금 떨어져 가는 도중에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는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는 중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고 계셨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 유령이라 생각하고 더욱 불안에 떨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나에게 명하사 물 위를 걷게 하옵소서.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와 물 위를 걷는 도중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간다.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겠는가?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외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해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 것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말씀 듣고 주님을 바라보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듣고 주님을 바라보자.”

본문의 말씀을 보라.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바라 보았다. 물 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유령이라 생각했다. 더욱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예수를 바라보되 말씀이 없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해결해 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되 예수님의 얼굴을 마치 부적 처럼 걸어 놓고 사는 사람이 있다. 물론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말씀없이 주님을 바라본다고 근본적인 두려움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제자들이 유령이 나타났다고 더욱 두려워 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너무나도 기뻐서 나에게 물 위로 걸어오도록 하세요. 정말로 베드로는 물 위를 걷게 되었다. 그 중에 바다의 물결을 바라보니 다시 물 속에 빠져 들어가서 두려움 속에 다시 잠기게 되었다.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한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불안을 이기려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주변의 바람을 바라보면 마음에 의심이 생긴다.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어 있다. 성전에서 말씀을 듣는다. 마음에 확신이 생긴다. 이제는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살겠다고 결심한다. 다른 것을 의지 하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을 새롭게 다짐한다. 그리고 예배당을 나서자마자 우리의 눈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가지를 바라본다.

당장 집에 가자 마자 아이들을 손을 벌리며 “아빠 엄마 학원비 주세요. 아빠 엄마 예쁜 옷을 사 주세요.” 내가 말씀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겠다고 약속해 놓고 주어진 현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쪽으로 우리의 관심이 쏠려 버린다.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예수가 밥을 먹여 준단 말인가? 예수가 나의 성공을 보장해 준단 말인가? 예수가 나의 인생을 책임져 준단 말인가? 이러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 속은 의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의심으로 가득 차게 되니 내 마음은 더욱 불안하고, 두렵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이 살아간다.
불안을 극복하려면, 두려움을 이기려면 예수의 말씀 듣고, 우리의 눈을 바른 곳에 두어야 극복할 수 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을 물리쳤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엘리야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소원하였다. 엘리야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지금 홀로 남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가운데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눈을 열어 주셨다. 나 홀로 남아 두려운 마음으로, 불안한 마음으로, 죽고 싶은 엘리야에게 눈을 열어 주셨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 천명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셨다.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 가게 된다.

엘리사 때의 일이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의 엘리사를 쳐들어왔다. 사환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큰 일이 났다.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가득히 에워 쌌다. 두려워할 때에 엘리사가 이 사환에게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눈이 열렸다. 불말과 불경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섰다. 이 사환은 두려움이 사라졌다. 불안함이 사라졌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불안을 극복하는가? 어떻게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가? 말씀 듣고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활짝 열려 있기를 바란다. 주변의 바람과 물결을 바라볼 때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 있을 때에 엘리야를 잡으러 온 수 많은 군인들을 바라보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엘리사의 사환이 성읍에 가득한 군인들을 바라볼 때에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엘리야를 보라.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셔서 남은 칠천 명을 바라보게 하셨다. 엘리사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셔서 불말과 불수레로 둘러싼 것을 보았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불안이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말씀 듣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베드로를 보라. 주님을 바라보고 가다가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 물에 빠져가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제부터 말씀 듣고, 주님바라보고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현실에서 주변을 바라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 때마다 우리는 다시 깊은 불안의 늪에 빠진다. 두려움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 있을 때에 베드로는 “주여! 우리를 건져주소서. 주여!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여기에 바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깨닫게 된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예수의 얼굴을 보아도 유령처럼 본다. 오히려 말씀없이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면 더 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말씀을 듣고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두려움을 극복한다. 불안을 이긴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바라보기 보다 세상의 주변을 계속해서 바라볼 때에 우리의 마음에 의심이 일어난다. 정말로 예수가 계신가? 정말로 예수가 부활했는가?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정말로 성령님이 지금 계시단 말인가? 정말로 역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행되고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단 말인가? 이러한 마음의 의심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든다.

말씀 듣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 때로는 우리가 한 눈을 팔아서 두려움과 불안의 늪 속으로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소리 질러 “주님! 나를 건져 주옵소서.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외치라. 주님께서 구해 주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최춘선 할아버지라는 분이 계시다. 이 분은 지하철 전도사라고 불리 우기도 한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다. 엄청난 부자이었고, 동경 유학까지한 지식인이다. 이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우리 나라의 분단된 상황을 너무 가슴 아파하였다. 그래서 30년 동안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면서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통일이 되어야 신을 신겠다고 하였다. 전철에서 복음을 전하는 맨발의 전도사이었다. 이러한 삶을 살게된 기회가 있었다. 교회에서 충성하는 도중에 심한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거의 죽게 되었다. 이러는 중에 “빛난 하늘 그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없는 영광 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이 찬송을 부르는 중에 치유되었고, 맨발의 전도사가 되었다.

나는 이 동영상을 보면서 그 할아버지의 영혼이 얼마나 맑은지 모른다. 죽음의 위협이 있어도 “빛난 하늘 그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없는 영광 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주님의 얼굴 뵈옵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한 영화 감독에게 발견되어 최춘선 할아버지의 30년간 맨발로 살아온 모습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나는 우리 교회의 온 성도들에게 이 복음의 메시지가 마음에 자리 잡기를 소원한다. 말씀 듣지 않고 예수를 바라볼 때에 예수님은 무서운 유령처럼 될 수 있다.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만 바라보며 살면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다. 불안과 두려움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성도여! 말씀듣고, 주님을 바라보자.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빛난 하늘 그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없는 영광 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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