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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루스드라의 기적 (행1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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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지금 나라가 어려우니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방안을 내놓습니다.
정치가는 정치로, 기업인은 경제로,
과학자는 생명공학 우주공학 첨단산업 등
과학기술의 힘으로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은 오직 복음을 살리는 데 달려있다고 단언합니다. 복음을 살리는 민족은 흥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민족은 망합니다.
세계역사가 이것을 증거합니다.
복음을 받아 그 정신으로 살아간 민족과 그 공동체는 흥하였으며,
복음을 배척하거나 외면한 집단은 망하였습니다.<함석헌> 선생의 그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 우리 민족이 오늘에 이른 것은 복음의 힘이었다.
기독교는 이 민족이 어려운 때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고난의 종이 됨으로
민족을 구원한 복음이 되었다.
누가 한국 교회를 어떻게 비판하든 이 민족역사는
복음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해왔고 민족을 살려 왔다.
복음은 이 민족을 우매한 미신에서 구해냈다.
일제하에서 교회는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해왔다.
해방 후에는 혼란한 사회주의 사상에서 이 민족의 역사를 지켜냈다.오늘날 똑같은 땅 한반도 위의 한 민족이지만,
남한은 잘 살고 북한은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가뭄과 홍수가 와도 피해를 입는 쪽은 북한이요 남한은 그 피해를 비껴갔다. 그 원인을 영적으로 살펴 볼 때 이유가 있다.
남쪽에서 복음이 인정되고 교회가 부흥할 때
북에서는 교회가 폐쇄되고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한이 경제적으로 성장할 때
북한은 헐벗고 굶주리는 황무한 땅이 되었다 ] 그렇습니다. 누가 한국교회 역사를 비판하든지
오늘까지 이 나라 이 민족이 이 만큼이라도 발전을 이루고 평화를 지켜온 것은 누가 정치를 잘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눈물을 적시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피맺힌 부르짖음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을 방문한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카나다에서 숲 속의 새소리에 잠을 깼다.
일본에 와서는 자동차 엔진소리에 잠을 깼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는 새벽기도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에 기도하는 나라, 한국은 분명 미래 세계의 희망이다. ] 이 민족이 살고 우리가 사는 길은 다른 길 없습니다. <2>
우리가 사는 길은 복음을 듣고 복음의 정신대로 살며
그 복음을 전할 때 이 민족이 흥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은
바울과 바나바는 첫 선교여행지인 구브로 섬을 거쳐
두 번째 선교지 밤빌리아 지역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많이 복음을 듣고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지마는 반대로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결국 그 지경에서 쫓겨나서 이고니온 지방으로 떠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전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스드라에서 나타난 기적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그 성에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핍박케 하여 좇아내니
발에 티끌을 떨쳐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들어갑니다.
바울의 이고니온 전도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을 먼저 살펴보면

1) 바울과 바나바는 어느 곳에 가서 전도하던지
자기규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17:2절에 데살로니가에 들어갔을 때도 회당에 먼저 들어가
[ 바울이 자기규례대로 저희에게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회당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회당에 들어가면 동족들을 만납니다.
이것은 먼저 관계전도를 말합니다.
그래도 관계가 있는 사람부터 먼저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규례가 무엇인가 하면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꼭 전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
원문에는 [ 회당에 들어가 그렇게 말하니 ]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전에도 말했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 가더라도 꼭, 반드시 전하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다. <3>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는 복음인 것입니다.
내일의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
어디를 가더라도 먼저 교회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귀담아 듣고 흥하는 가문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흥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복음과 고난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결국 그 지경에서 쫓겨나서 이고니온으로 옵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남쪽으로
약 160km(400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현재는 코냐(konya)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 곳 유대인의 회당에서 오랜 기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들은 이고니온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히 좋았습니다.
1절에 [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 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곳에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여 배척하게 합니다.

2절 [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
우리는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곳에 반드시 그 복음으로 말미암은
정반대의 세력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후2:16절에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당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군대가
개선문을 들어올 때 말을 탄 개선장군이 앞서 들어오면
바로 뒤에 향로를 머리에 이고 들어오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향로에서 나는 향기가 온 도시에 퍼지면
성안 사람들이 그 향기를 맡고는 우리가 승리했구나
이 때 향기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그러나 승전군대 뒤에는 전리품과 함께 끌려오는 포로들에게는
이 향기야 말로 사망에 이르는 냄새인 것입니다.
이 향기가 승전한 나라의 사람들은 생명에 이르는 냄새지만 <4>
이 향기가 포로들에게는 죽기보다 더 싫은 사망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마찬가지로 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딱 싫은 것입니다.

이고니온에 허다한 무리가 복음을 받고 믿었지마는
그러나 반대로 복음에 대해 악감을 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시간에 똑 같은 말씀을 듣고도 이렇게 반응이 다릅니다.
복음에 대해 악감을 품는 사람들, 이 사람들 어떤 사람들입니까?
2절에 [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 ] 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 전에 불순종의 영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엡2:2절의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를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불순종의 영이 누구입니까? 바로 마귀의 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마음이 삐뚤어져 있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반항하려고 하고 거역하려고 하고 비판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꼭 말할 때 보면 비비꼬아서 하고
다른 사람 잘된 이야기 하면 그냥 받아 드리지 못하고 비아냥 그립니다.
저도 이것을 깨닫고는
꼭 401반 공부할 때, 통과하는 마음, 착한 마음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한번 보세요.[ 제가 메고 있는 넥타이 명품이다 ] 라고 하면
참 멋있다, 어울린다고 한 마디 해 주면 어디 덧나요
그런데 꼭 [ 그것 이태원에 가면 5000원만 주면 살 수 있는데 ]
마음이 삐뚤어져 있으니 명품이 짝퉁으로 보이는거예요.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마음에 틈타려고 하는
불순종의 영, 거역의 영은 물러갈찌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잘 생겼느냐? 못생겼느냐? 공부 잘하느냐? 못하느냐? 유능한냐? 무능한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순종의 영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순종 잘 하는 자식, 희망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럼 불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도들은 어떻게 대합니까?
복음에 대해,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에 대해 악감을 가졌다고
두려워하거나 기죽지 아니하고
3절에 보니
[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니 ] 두 전도인은 이고니온에서 주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5>
핍박하는 악한 무리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인내로 오래 머무르면서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 주를 힘입어 ] 했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주를 힘입을 수 있습니까?우리가 주님을 의뢰할 때 주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12:2절에
[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고 합니다.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백그라운드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주를 힘입어 라는 말은 주님으로 빽을 삼으니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그리고 주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종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십니다.
초대교회에는 표적과 기사가 복음에 뒤따랐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그 표적과 기사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나타나는 표적과 기적이 더 많습니다.
앞에서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기적들
성전 미문에 38년 된 앉은뱅이가 걷게되고
룻다에서 8년된 중풍병자 애니아가 일어나고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기적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기적이 있습니다.

근간에 대구 통합교단 소속의 교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간호사로 근무하는 여집사 한분이 급성간염으로 사경을 헤매다
간 이식 수술을 받지 아니하면 생명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교구 담담 부목사님이 자신의 간을 제공하여
10시간이나 걸려 간이식 수술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여기에 대해 본 교회 장로님이 이렇게 댓글을 달아놓았습니다.
[ 요즘 같은 세상에~ 자식 같은 젊은 부목사님들에게 존경은 커녕, 변변찮은 대우를 하면서도 여러가지 주문만 늘어놨던 못 난 장로의 지난 못 난 행실들이 한없이 부끄럽게 여겨진다. 오늘따라 권목사님의 모습이 참 위대하게 보인다. 어쩌면 예수님을 닮은 진정한 크리스천인 것만 같다. <6> 이제야 누가 주님의 참 제자인지를 깨닫게 만든다 ]
저는 이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표적보다 더 큰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들어간다고 해서 다 받아드리고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4절 [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좋는 자도 있는지라 ]
그리고 5-7절까지 보면
유대인을 좇는 자들이 두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는 루스드라로 피해간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 [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고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고 복음을 전하다 보면
바울이 욕을 먹고 돌로 맞으며 도망을 갔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바울도 별수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7절 보세요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거기가 어디입니까? 피해서 도망간 곳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은혜 받아 복음 위해 살려고 하면
실직할 수도 있고,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이사를 가야할 형편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방황하면 안됩니다.
거기서도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전하며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저는 그저께 주암산 산상집회 백동조 목사님 설교 중 마지막 말씀
좀 각색해서 제가 받은 은혜대로 말씀드릴께요.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입니다.
자연의 원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것같이
수리의 원리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수학자가 아니지만 아~! 수리에 나타나신 하나님이시구나 싶어요.
사람들이 수학에 있어서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할 줄 알지만
삶에 있어서는 이 원리를 적용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불러서 복의 근원 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당장 축복, 축복 합니까?
아니에요, 빼기를 합니다. 고난 대학에 다 집어넣습니다. <7> 그리고는 불순물 다 제거해 버리고는 곱하기를 하십니다.
곱빼기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도망가야 하고 이사 가야 하고 낭패 당하고 실패했다 할지라도
당황하지 마시고 내려간 그 자리에서도
복음 위해 살고 복음 전하며 사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이민 교회 가보면 이런 현상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을 봅니다.

이제 루스드라로 피해간 바울과 바나바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만났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 이런 교훈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나는구나.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기적이 일어나는구나.
이런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나면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걷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시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1) 바울이 주목하여 보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중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병자의 눈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주목한 것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바울을 주목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강단에 서 보면
그 눈을 보면 지금 은혜 받는 사람인지 딴 생각하는 사람인지 표가 나요
베드로도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하는 말이
[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 ] 고 합니다.
교회 나오시거든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안 보이시거든 예수님이 대신 세우신 설교자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도 여러분 !
무슨 일이든지 꼭 해야 할 일이거든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집중할 때 뭔가 보이기 시작하고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를 가지고 나오신 분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해답이 보이고 역사가 나타납니다.
2)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 사람 안에 있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8>
이건 무얼 말하는가 하면
설교를 듣는 중에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다왔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에 부딪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그 말씀에 부딪히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역사가 나타납니다.
앉은뱅이가 말씀을 듣는 중에 그 말씀에 빨려 들어가니
복음의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심기어진 것입니다.
믿음이 어떻게 생깁니까? 롬10:17절에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씨가 뿌려지고 감동을 받을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청종하고 말씀에 부딪혀서
말씀의 능력을 덧입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앉은뱅이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큰 소리로 [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 고 명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뛰어 걸었습니다.
이렇게 명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바울은 굉장히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하나님은 결코 바울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말합니다.
바울을 통해 나타나는 손길이
오늘 우리 가운데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바울의 이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막16:17-18절에
[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
여기에 믿는 자는 바로 성령 받은 자를 말합니다.
우리도 성령 받은 교회라면 믿는 자의 표적이 따르도록
더 기도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그라진 손이 펴지고 구부러진 허리가 힘을 얻고
누웠던 사람이 벌떡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가 되도록
믿음으로 더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본 루스드라의 사람들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 어떻게 대합니까?

11-12절에 보면 [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가로되 <9>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
[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
사도행전에 나오는 지명 가운데 지명 중에 뒤에 '아'가 있으면
우리의 개념으로 도(道)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크기는 우리나라 도의 2배가 넘는 크기입니다.
예로 비시디아, 밤빌리아, 갈라디아, 루가오니아 등입니다.
이고니온이나 루스드라는 바로 루가오니아 지방에 있는 도시입니다.
당시 루스드라 사람들은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앞에 희얀한 일이 벌어지니 사투리가 툭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계속해서 사투리로 하는 말이
[ 저 사람은 쓰스다 ] 제우스신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다.
즉 제우스신의 대변자 헤르메스라는 말입니다.
당시 헬레니즘 사회에서 신화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대해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이런 기적이 나타는가?
이건 틀림없이 제우스신이 한 것이다. 아니 헤르메스 신이 한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 신당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와서
바울과 바나바 앞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긍정적인측면에서 보면
교회나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 권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신격화 하려고 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이 무어라고 말합니까?

14-15절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는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 말하기를
[ 여러분들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
하면서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를 선언합니다.
1) 우리는 신이 아니다
너희들과 똑 같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여기서 바나바와 바울이 옷을 찢은 것은
유대인들은 보통 4-5인치 정도 옷을 찢는다고 하는데
옷을 찢는 행동은 신성모독에 대한 강한 의분을 가질 때 하는 행동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10>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이 옷을 찢으며 [ 참람하도다 ] 외치며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바나바와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려는 그 순간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참람한 죄인이 된 것처럼
자신들의 옷을 찢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보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신이 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나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다 자신을 슈퍼맨
아니면 신격화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아무리 은혜를 받고 남들보다 나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신이 아니다. 당신과 똑 같은 인간이다.
이렇 때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2)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은
이 같은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7-18절에서 지나간 날에는 이같은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묵인하셨으나
그 때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인생들에게 나타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난날에는 묵인하셨다고 하는 말은
용서해 주셨다거나 용서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상태대로 놔두심으로
그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직 은혜의 복음이 전파될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로 말미암은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강퍅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놔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사
인생들로 음식과 기쁨을 갖게 하셔서
인생들로 만족한 생애를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였으며 감사할 줄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계시 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말씀을 통한 예수님을 믿을 때만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에게 절하지 말고
복음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의 능력을 덧입되
우리의 모든 사역의 초점을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있으며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 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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