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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벼랑에서야 하늘을 보다니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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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교인들과 함께 제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제주에서 인천까지 배를 타고 왔습니다. 제주에서 저녁 7 시에 배를 타고 아침 8 시에 인천항에 도착하는 여정입니다.

배를 타고 제주항을 떠나니 곧바로 저녁노을이 졌습니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노을은 어두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금방 사방에 어두움이 깔렸습니다. 언제 아침이 올지 모르는 긴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실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입니다. 해 뜨는 광경을 보기위해 갑판으로 나갔습니다. 서해바다에서 바라보는 일출도 장관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노을이나 일출이나 그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해가 져도 잠시 후에 다시 떠오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어두움이 와도 조금만 기다리면 아침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주무시기 바랍니다. 아침이 오면 찬란한 태양이 떠오릅니다.

한 지혜로운 여인이 부엌에 상자 하나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 상자의 이름을 “근심 상자”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 힘들 때면 그 일을 종이에 써서 상자에 담아두곤 했습니다. 그녀는 그것들이 상자에 담겨 있는 한 그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걱정거리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걱정거리들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한 상태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종종 그녀는 상자에서 쪽지를 꺼내어 읽어보곤 했습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걱정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지난 걱정거리들은 추억일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인생에 걱정거리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걱정 없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어떤 걱정을 할까요?

J. 젤린스킨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원서의 이름은 ‘Don't Hurry, Be Happy’ ‘서두르지 말라. 행복해진다’입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 중에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 데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도 27 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한 자는 30 센티입니다. 만약 걱정한다고 키가 자란다면 저도 매일 걱정하겠습니다.

그런데 걱정하면 키가 더 안 자랍니다. 성장 호르몬이 밤에 잘 때 가장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편안하게 깊이 잠들어야 쑥쑥 키도 큽니다. 키가 작다고 밤에 잠도 못자고 고민하고 있으면 성장 호르몬이 말라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떤 걱정거리를 가지고 계십니까? 세상을 살면서 걱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걱정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거리는 있지만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메시지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염려는 염려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5>

먹는 것은 목숨을 위하는 것입니다. 의복은 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목숨을 위해서 몸을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합니다. 그런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다가 목숨과 몸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거꾸로 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께 좋은 카메라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필름 사는 것이 걱정되어 선물을 거절했다고 합시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비싼 카메라를 선물로 주셨는데 필름은 당연히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귀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 귀한 몸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귀한 몸과 생명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숨과 몸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귀한 생명과 몸을 주셨다면 당연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가지고 예를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새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새는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고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많은 새들을 먹이고 키우십니다.

새들이 철따라 이동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새들이 먹을 것을 찾아 떼를 지어 이동합니다. 그 수효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 어디서 그 많은 새들이 먹을 것이 나는지요? 새들은 염려 없이 그날의 먹을 것을 해결하면서 삽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방구석에 박혀 있는 사람들은 새들을 봐야 합니다.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제 먹을 것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들에 핀 백합화를 봅시다. 이스라엘에는 백합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백합화는 샤론평야에 주로 피는 붉은 꽃입니다. 양귀비 꽃과 비슷한데 아주 아름다운 꽃입니다. 예수님은 들에 핀 꽃 한 송이가 지닌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더 하다고 하셨습니다. 꽃은 이 아름다움을 위해서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길쌈도 하지 않았습니다. 꽃은 멀리서 봐도 아름답지만 가까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훨씬 아름답습니다. 어찌 그리 정교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꽃도 아낌없이 베어 아궁이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들풀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 들풀보다 못하게 입히시겠습니까?

날아가는 새와 한 송이 꽃이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배고플 때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새는 먹을 것을 찾아 주워 먹고 배불러 있습니다. 헐벗었을 때 들풀을 보라는 것입니다. 들꽃이 얼마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지.

그런데 배고프고 헐벗은 이야기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6.25 전쟁 이후에 통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그런 것으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걱정도 다양해졌습니다. 옛날에는 주로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했습니다. 요즘은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다른 것을 놓고 걱정합니다.

염려는 독이 됩니다. 염려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염려는 조급한 마음을 갖게 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염려를 하다보면 점점 깊어집니다. 결국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염려하는 그리스도인은 응급환자와 같습니다. 속히 염려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염려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영적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염려는 믿음의 적입니다. 이 염려를 마귀가 이용합니다. 염려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걱정에 싸여 있는 사람은 얼굴에 나타납니다. 환한 웃음이 사라집니다. 아주 슬픈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염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하게 됩니다. 벽에 부딪쳐 있는 문제입니다. 더 이상 어찌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가수 양희은씨에게 물었습니다. 살면서 인생의 절벽에 서 본적이 있는가? 그녀는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고 회고 했습니다. 그녀는 암 판정을 받고 투병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또 남편도 병이 들어 병간호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절벽에 선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 고비를 넘겼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절벽에 매달려 있다가 하늘을 보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고개가 젖혀질 정도가 되니까 그제야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람들은 아예 자빠져 누울 정도가 되어야 하늘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하늘을 보면 문제를 쉽게 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 하다가하다가 안되면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제야 하늘을 봅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아~ 하늘이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언제든 힘들고 지칠 때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주십니다. 그리고 얽히고 꼬인 문제들을 풀어주십니다.

하늘을 보세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 번도 어그러짐이 없이 그런 것들을 다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하는 줄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결혼 연령이 되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줄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공부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놓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 것을 붙들고 오래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놓고 매달립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31 절과 32 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31-32>

예수님은 아예 대놓고 그런 것은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30 절 마지막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따라서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33 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나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내 형편이 어려워도 먼저 감당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더 많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어려울 때는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걱정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안다면 무엇 때문에 염려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 34 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 구절에 대표적인 오역이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미래의 일을 앞당겨서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걱정하지 말고, 내일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구절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이 잘 번역했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미래의 걱정은 미래가 알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내일이 어떻게 내일 걱정을 해결합니까? 내일은 인격이 아니고 단지 시간일 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걱정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물론 내일 걱정도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이 하나님의 날이었으니, 내일도 하나님의 날입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걱정하면서 계획을 세워도 내일이 되면 달라집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하려는 욕심 때문에 내일 걱정을 하느라 오늘 일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철저하게 우리 삶 한 복판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일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계획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께 다시 맡겨야 합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미래는 내가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일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는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벼랑 끝에서야 하늘을 보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소에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삽시다. 믿음의 기도는 우리의 염려를 사라지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무슨 문제이든지 척척 해결해 주십니다. 내일 일을 몰라도 오늘 하루를 하나님 나라로 세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황 금 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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