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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8.15광복절 60주년] 옛날을 기억하라 (신 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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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에드워드 헬렛 카 (E. H. Carr)의 추상적 명제에 우리는 오랫동안 학습되어 왔습니다. 못내 아쉬운 것은 역사를 말할 때 무엇을 위한 대화냐가 분명해야 역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사란 무엇인가? 기독교 역사의 정의는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정의가 정치화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 자신이 고민한 끝에 얻은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적용되고 성취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성경)이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사건이 기독교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의 역사관은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필연이라는 데 기독교 역사 정의의 진정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8.15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한국 기독교회사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Ⅰ. 초기 미국 장로교회 형성의 이해입니다.

1)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의 형성 과정
1620년 순례자(Pilgrims)들이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플리머스의 바위(Plymouth Rock - 메사추세츠 州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청교도적이고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장로교보다는 조합교회적(Congregational)이었습니다. 그 후 유럽에서 이주민들이 계속해서 유입되었고 마침내 1623년 화란에서 칼빈주의적인 개혁파 교인들이 뉴욕(New York)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의 후손들이 미국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를 설립했습니다. 그 다음은 불란서에서 이주해온 위그노파(The Huguenots)들이 비록 그 숫자는 적을지라도 미국장로교회 형성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미국장로교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일랜드(Ireland)와 스코틀랜드(Scotland) 장로교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미국의 동부에 분포되었습니다. 미국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란시스 매케미(Francis
Makemie) 목사는 스코틀랜드(Scotland)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약관 25세였습니다. 그는 메릴랜드(Maryland) 주(州) 해안지대를 중심하고 많은 개척교회를 세운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마침내 매케미(Makemie) 목사의 노력으로 1706년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노회가 조직되었는데 이것이 미국에 있어서 장로교회의 출범이었습니다.
영국과 웨일스(Welsh)에서 온 목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Scotland)와 아일랜드(Ireland)에서 온 목사들의 주장에 따라 1729년 필라델피아 대회에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표준교리로 채택할 것을 정식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을 채용법령(The Adopting Act)이라고 부릅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1870년 구파(old-school) 측의 북부파와 신파(new-school)의 북부파가 합동하여 새 총회를 조직하여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때 북장로교회는 남부의 형제들도 초청했으나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한편 남부의 교회들도 총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861년에서 1865년까지는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Confederates States of America』라고 했으나 이것을 고쳐서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가 이른바 미국의 남장로교회입니다. 1864년에는 신파(new-school)에서 이탈하여 따로 United Synod of the South를 흡수했습니다. 1869년에는 구파(old-school)에 속해있던 Kentucky Synod와 1874년에는 구파(old-school)에 속해있던 Missouri Synod가 남장로교회 총회에 가담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미국의 장로교회는 크게 남과 북으로 양분되게 되었습니다.

2) 프린스톤(Princeton)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Westminster) 신학교
1812년 뉴저지 州에 프린스톤 신학교(Princeton Theology)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1929년 신학교가 좌경하여 교과 과정을 개편할 때까지 프린스톤(Princeton) 신학교는 명실공히 미국 보수주의 신학을 대변했습니다.
여기의 인물로는 프린스톤 신학교(Princeton Theology)의 설립자 아키볼드 알렉산더(Achibald Alexander, 1772-1851)와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와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가 있었습니다.
프린스톤 신학을 19세기의 미국신학으로 보편화시킨 인물은 아키볼드 알렉산더(Achibald Alexander)를 계승한 찰스 핫지(Charles Hodge)입니다. 핫지(Hodge)는 19세기 프린스톤 신학을 대변한 인물입니다. 그는 프린스톤에서 50년이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고 3,000명 이상의 제자들을 배출했습니다. 프린스톤(Princeton)의 또 하나의 인물은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입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는 현대주의(Modernists)와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논쟁이 전 미국을 강타하던 1929년에 구 프린스톤의 마지막 보루였던 죤 그래샴 매첸(J. Gresham Machen)에 의해서 설립되었습니다.
19세기말 미국의 북장로교 안에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온 성경학자들은 고등비평학을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시키고자 했습니다. 현대주의의 도전에 보수주의자들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대처했습니다. 북장로교 내에서는 기독교의 근본진리 다섯 가지를 총회차원에서 결의했습니다. 이른바 ① 성경의 무오 ② 처녀탄생 ③ 대속의 죽음 ④ 육체의 부활 ⑤ 예수의 기적의 역사성을 1910년에 이어 1916년, 1923년에도 이 결정을 재확인했습니다.

자유주의의 물결이 프린스톤(Princeton) 신학교라고 해서 비켜갈 리 없었습니다. 마침내 프린스톤 신학교에도 자유주의의 물결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첸(Machen)은 현대주의자들로부터 북장로교와 프린스톤 신학교를 지키기 위하여 『기독교와 자유』(Christianity and Liberalism)라는 책을 1923년에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보수주의 결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23년 그 해 총회는 다섯 가지 근본윤리를 재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진보주의 성향을 띤 목사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굽히지 아니하고 총회의 결정에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총회가 근본적인 진리를 결정하던 다음 해인 1924년 1월에 150명의 목사들이 뉴욕 州에 있는 오번 신학교(Auburn Theological Seminary)에 모여서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무려 1,293명이 서명했습니다. 이 오번 선언문은 총회에서 결의한 다섯 가지 근본진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므로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번 선언을 서명한 서명자들이 프린스톤 신학교의 이사로 기용되면서 프린스톤은 결정적으로 변화의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구체적으로 가속화시킨 사람이 바로 스티븐슨(J. Ross. Stevenson) 학장이었습니다.
오번 선언이 있은 지 만 6년 만에 보수주의 교수들은 프린스톤에서 더 이상 보수주의 사상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에 뜻을 같이한 사람들은 매첸, 앨리스, 윌슨, 반틸, 스톤하우스 등 교수 6명과 학생 52명이었습니다. 이들은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와서 1929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필라델피아에 세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프린스톤 신학교와 관련하여 같은 프린스톤신학교 출신인데도 각각 다르게 보는데는 1929년을 기점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구 프린스톤(old Princeton)에서 공부한 사람은 남궁혁, 백남준, 김상락, 박형룡,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 목사 등입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에 유학한 목사는 김치선, 강태국, 박윤선, 명신홍, 김진흥, 황성수 목사 등입니다.

그런데 1929년 이전의 구 프린스톤(old Princeton) 출신이라도 좌경 전과 좌경 후의 졸업생들의 신학관점은 차이가 있습니다. 1923년에서부터 1924년 1월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과 함께 프린스톤(Princeton) 신학교는 이미 이른바 좌경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1923년 이후에 입학한 학생들과 그 이전에 공부한 학생들과는 같은 프린스톤(Princeton) 동문이지만 신학적으로 신학 동문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북장로교에서 중국에 파송한 소설가 펄벅(Pearl Buck)이 자유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교본부가 펄벅을 지원하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출신들은 그의 선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독립선교부가 생겼습니다. 여기에 북장로교는 독립선교부를 해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여기에 불복하고 북장로교에서는 독립선교부에 가담한 자들을 출교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매첸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징계 후에 이들은 새로운 장로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후에 정통장로교회(OPC)로 개명한 미장로교회(PCA)입니다. PCA는 1936년에 조직되었습니다. 매첸은 애석하게도 심한 혹한으로 폐렴에 걸려 1937년 1월 1일에 서거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를 설립한 매첸(Machen)이 독립선교본부로 말미암아 논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인 1934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생들에게 한 연설은 그의 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 어떤 다른 권위로부터 메시지를 얻는다면 만일 당신의 노회 또는 총회의 선언들로부터 그것을 얻는다면 당신은 목사가운을 입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목회자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현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순종한다면 당신이 이전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다."
매첸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리주의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화합하지 못하고 불평을 정의로 포장하는 값싼 분열주의자는 아닙니다. 매첸이 프린스톤을 떠난 것은 프린스톤 전체가 근본적으로 개혁주의 입장을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여 옛 프린스톤을 계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Ⅱ. 한국교회 교단분열의 원인

1) 미국교회의 교파중심적인 선교에 있습니다.
교파(Denomination)라는 말은 종교개혁 이후 특히 18세기부터 사용된 용어입니다. 미국교회는 교파중심의 교회로 발전해 온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따라서 미국선교는 처음부터 불가불 교파중심적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1884년 알렌이 입국했습니다.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북감리회의 아펜셀러와 스코랜톤이 입국했습니다. 그 후 계속된 미국교회의 한국에 대한 선교운동의 결과는 이 땅에 교회운동을 가능케 했습니다.
미국은 다국적 다인종 국가로 형성된 나라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종교개혁 이후에 미국 땅으로 이주해 온 저마다의 신앙공동체에 의한 교파 형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다양한 교파에 의해서 복음을 받은 한국교회는 한국 땅에 하나의 교회를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좁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정책은 1890년대부터 구체화되어갔습니다. 1893년 1월 28일 북장로교 선교사 빈톤(Dr. C. C. Vinton) 의사 집에서 한국에 주재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회집하여 장로교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 를 조직했습니다. 이 선교공의회가 중심이 되어 선교지 분할안을 채택했는데 이것을 보통 예양 협정(Comity Arrangement)이라고 합니다.
해방 후에 장로교 분열을 보면 선교사들의 선교분할지역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공교롭습니다. 즉 고려파는 경남지역으로 호주 선교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고려파는 해방이후 호주선교사들의 선교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조선신학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장로회로 분리되었는데 이 교단은 캐나다 선교부에 의해 선교활동을 했던 지역입니다. 이들은 보수보다는 진보적 성향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를 전후해서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남, 북 장로교 선교부의 선교지역과 각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통합측은 북장로교 선교지역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합동측은 남장로교 선교지역과 관련되어 교단이 형성되었습니다.

2)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잠재되어 있는 의식구조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성은 역사적으로 당파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것이 오랜 세월동안 우리 국민들의 의식으로 구조화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당파와 계파, 혈연에 따른 결속, 가문에 따른 결속, 지역에 따른 결속, 학연에 따른 결속은 객관적 가치가 무시당할 만큼 가히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인 것만을 가지고는 홀로서기가 잘 되지 않는 국민성입니다. 어디엔가 소속이 되지 아니하면 불안한 국민성입니다.

3)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정치적 성향에 있습니다.
신앙과 신학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신학의 배경이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고, 신앙의 배경이 없는 신학은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신학의 발전은 신학논쟁과 정비례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신학 연구에는 열심이 있는지 모르지만 신학논쟁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신학적으로 재충전을 받을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그것만큼이 말하자면 바탕 신학지식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자신 있게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자연히 성경말씀 그 자체에 비중을 두지 아니하고 설교하는 자와 현재의 환경에 비중을 두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자연히 교회 안에서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정치적 기회가 목회자들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목회를 하지 아니하고 정치를 가지고 목회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게는 계파와 지파로 크게는 교파로 갈라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기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의 거의 대부분이 칼빈주의 신앙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구 프린스톤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을 이어 받아 한국장로교회는 보수주의적이었습니다. 프린스톤(Princeton)에서 나온 사람들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를 세울 무렵 1930년대에 와서 선교사 중심의 신학에서 한국인에 의한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성경관에 있어서 분명한 견해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 한국교회 신학적 환경은 어지러웠습니다.

① 캐나다 연합 장로교 선교부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② 미국 북장로 교회의 신학적 좌경에서 오는 자유주의 신학이 유입되었습니다.
③ 일제의 조선통치기간 중의 일본을 통한 바르트, 부르너 등의 자유주의 사상이 유입되었습니다.
④ 한국인의 일본유학을 통한 자유주의 신학이 여과 없이 유입되었습니다.
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일부지역이 자유주의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⑥ 일본에 유학하여 철학을 연구하고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채필근 목사와 1933년 미국에서 귀국한 송창근, 김재준 목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1930년대 자유주의 신학의 실질적인 인물은 김재준 목사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를 통해 입신한 김재준은 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후일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3년간(1925-1928) 유학했습니다. 그는 다시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Westen) 신학교에서 3년간(1929-1932)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후에 1933년에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남궁억 목사가 그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천거했으나 1930년부터 평양 신학교 전임교수로 있던 박형룡 박사의 반대로 거부되었습니다.

그 후 김재준은 신학지남을 통해 자신의 신학입장을 펴나갔고 당연히 박형룡과 김재준은 신학적 논쟁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1915년 5월 이후 김재준은 신학지남에 글을 게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과 발전은 일제하의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일제는 1935년 이후 신사참배를 가지고 한국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38년 장로교 제 27회 총회(총회장 홍택기)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고 신학지남이 폐간되는가 하면 선교사들은 모두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자유주의 신학은 날개를 단 듯 했습니다. 마침내 1940년 4월에 송창근, 김재준, 윤인규 등에 의해 서울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가 개교되었습니다. 그 후 조선신학교들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한 것은 신사참배가결에 못지않은 과오라는 것이 우리의 역사관입니다.

교단 설립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객관성 있는 명분이 있어야만 합니다. 명분만 있으면 그 교파가 대소에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금에 한국 교회에서 그 교단의 크기와 조직력을 가지고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크기에 따라 소위 군소교단(群小敎團)으로 분류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아 멘 -
(강 구 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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