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도의 성공적인 삶의 자세 (히 8:10-13)

  • 잡초 잡초
  • 479
  • 0

첨부 1


< 믿음이 최대의 성공 조건입니다 >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믿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가 실패하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도 실패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꾀죄죄하게 살면 하나님도 꾀죄죄하게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얼굴, 복장, 마음까지 잘 관리해서 하나님을 잘 나타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적당히 생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평생을 이류로 살아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공하기 전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성공을 못해도 과정에서는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면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해도 우리는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는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대로 살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구절에서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보다 정확한 번역은 “너 자신이 너의 길을 형통케 만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이 우리의 최대 생존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어떤 문제를 이기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최대의 생존 조건이고, 성공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년 365일을 항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성도의 성공적인 삶의 자세 >

히브리서 8장은 율법의 옛 언약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언약을 비교하고 새 언약이 얼마나 소중한 언약인가를 논증한 장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새 언약을 받은 신약 성도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가지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도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생각과 마음이 커야 합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은 신약 성도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새로운 법을 기록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새로운 법의 주제는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약 성도는 항상 마음과 생각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하고 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대개 보면 생각과 마음이 큰 사람이 성공도 하고, 무엇보다 행복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링컨 대통령과 참모총장 사이에 의견대립이 생겼습니다. 결국 링컨이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끝내 일이 실패로 끝나자 링컨은 비서를 통해 참모총장에게 사과문을 보냈습니다. 그 사과문을 읽어보더니 참모총장은 소리쳤습니다. “멍청한 자식!”

비서가 돌아오자 대통령이 물었습니다. “뭐라 합니까?” 비서가 우물쭈물하자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괜찮으니까 말해 보세요.” 할 수 없이 비서가 말했습니다. “‘멍청한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링컨은 “참모총장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네”라고 하며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이 정도의 배포는 있어야 큰 인물이 됩니다. 링컨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어떤 비난을 들어도 그 말에 상처를 받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은 멍청한 자식이다!”라는 말입니다. 그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면 마음에 평안이 생기고 용기도 생깁니다. 왜 사람이 소심하게 됩니까? 자신의 멍청한 모습이 드러날까 봐 소심하게 되고,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고, 외적인 조건에 따라 열등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행의 원인은 외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지 못한 생각과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문제의 원인도 사람들은 생각의 차이나 성격 차이 때문이라고 하지만 진짜 원인은 개인의 마음과 생각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모든 인간관계의 갈등은 “자신은 멍청하지 않은데 남은 멍청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자신이 멍청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나는 부족하고 잘못이 많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이다.”라고 인정할 때 부부간의 문제는 말끔히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해력(理解力)’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정력(認定力’)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력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이해력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사랑과 용서로 품는 것입니다.

어느 날, 폴 뚜르니에라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친구의 임종을 맞아 그를 찾았습니다. 친구가 힘들게 말했습니다. “폴! 나는 아직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그러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뚜르니에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자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인정하는 것이네.” 그 말을 듣고 친구가 행복한 미소를 띠면서 “맞아! 인정하는 것이지.”라는 말과 함께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 사람의 다름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인정할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남을 인정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남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똑같습니다.

사람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미국은 한 나라이지만 각 주마다 법들이 다 다릅니다. 그 법 중에는 이해가 안 가는 법들도 많이 있습니다. 알라스카(Alaska) 주에서는 곰을 총으로 쏠 수 있지만 사진을 찍으려고 잠자는 곰을 깨우면 불법입니다. 애리조나(Arizona) 주에서는 선인장을 자르면 징역 25년형에 처하게 됩니다. 클린턴이 주지사로 있던 아칸소(Arkansas) 주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때려도 되지만 한 달에 한번이상 때리면 불법입니다.

하와이(Hawaii) 주에서는 동전을 귀에 꼽으면 불법이고, 미시간(Michigan) 주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허락 없이 머리를 자르면 불법입니다. 몬타나(Montana) 주에서는 처녀가 혼자 낚시질을 하면 불법이고, 뉴저지(New Jersey) 주에서는 경찰에게 얼굴을 찌푸리면 불법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에서는 음정에 맞지 않게 노래하면 불법이고, 오하이오(Ohio) 주에서는 다섯 명 이상의 여자가 한집에 살면 불법입니다. 오클라호마(Oklahoma) 주에서는 남의 햄버거를 베어 먹으면 불법이고, 워싱턴(Washington) 주에서는 부모가 부자인 것처럼 허풍을 떨면 불법입니다.

그처럼 사람마다, 문화마다 얼마나 차이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왜 그럴까?”하고 다 이해하겠다고 하면 항상 의심과 회의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도 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정을 받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부부는 서로를 인정해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인정을 받고 “나는 커서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할래요!”라고 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자녀도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아이가 조금 공부를 못해도 “너희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행복하다!”라고 할 때 자녀들은 행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행복을 배운 자녀가 나중에 행복하게 잘 살게 될 것입니다.

2. 약자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이 말씀은 신약 성도에게는 작은 자와 큰 자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확대해서 보면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높은 사람, 있는 사람, 가진 사람은 높이고 없는 사람, 비천한 사람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라면 우리는 작은 자, 비천한 자,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막 9:42). 이 말씀은 요새 성도들에게 더욱 필요한 말씀입니다.

요즘은 많은 것들이 대형화되면서 작은 것들은 점차 설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도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리 중에 휩쓸리다보면 소자들을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목자가 자기 양의 얼굴조차 모르는 교회도 있습니다. 스타를 우러러보는 때일수록 우리가 작은 자를 더 살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더 기쁘게 보실 것입니다.

요즘 휴가철입니다. 금주에는 새벽기도 식구가 눈에 띌 정도로 줄었습니다. 길거리가 한산하고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분들이 우리 권사님들이었습니다. “우리 권사님들 중에 지금 혹시 외롭게 지내는 분은 없을까?” 그렇게 휴가도 못 가고 혼자 외롭게 지내는 권사님들이 생각하면서 내년부터는 봄가을만 효도관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도 효도관광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더욱 힘써 살피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힘이 정의가 되고 선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힘을 정의로 따르지 말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을 품어주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힘없는 사람과 친구가 되어주면 세상적으로는 보상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크려면 큰 자에게 아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크려면 작은 자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행한 대로 받고, 심은 대로 거둡니다. 우리가 작은 자를 향해 베푸는 친절과 사랑은 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의식하지 못해도 어디선가 축복의 나무가 되어 쑥쑥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3. 지나친 죄책감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저지른 어떤 큰 죄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는 큽니다. 그 죄를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지우개를 들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우는 일에 참 인색합니다. 가끔 죄책감을 가지는 것을 좋은 신앙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영혼의 암과 같습니다. 나중에 그 암은 마음과 육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죄책감이 내포하는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죄를 크게 보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죄도 덮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더 이상 죄 문제로 신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죄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살려고 애쓰는 모습은 가장 하나님이 기쁘게 생각하실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에 중고등부 수련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무엘상 9장을 통해 사울의 젊었을 때 얘기를 해주면서 우리 학생들에게 도전했습니다. “이제 남을 생각하며 살라! 친구의 입장을 조금 더 생각하고, 부모의 입장을 조금 더 생각하고, 전도사님의 입장을 조금 더 생각하라!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조금 더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철이 들었다고 말한다. 이제 그리스도의 계절이 여러분들에게 들기를 바란다. 전도사님에게 피자 얻어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피자를 사 드릴 생각을 하라. 받으려고 하면 결국 모든 것이 죽지만 주려고 하면 결국 모든 것이 산다....”

그때 우리 아이들도 그 말씀을 같이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날 둘째 한나가 갑자기 진지해졌습니다. 특히 저녁에 바닷가에 갔다 와서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때 제가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몸이 아주 힘들어서가 아니라 돌아올 때 운전할 일과 새벽 말씀 준비할 것 때문에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한나에게는 아빠가 아주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비친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제 품에 안기더니 여러 가지 말로 얼마나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말뿐만 아니라 손도 주물러주고 발도 주물러주었습니다. 그처럼 말도 뚝 끊고 언니들과 어울려 놀지도 않고 얼마나 진지하게 저를 섬겨주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엄마에게 이런 얘기까지 했습니다. “엄마! 제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저의 추측에 자신이 아빠를 너무 생각하지 않고 까불며 살았다는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지나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추측이 됩니다. 초등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렇게 센치멘탈하게 되고, 까부는 행동이 없어지고 너무 진지해지니까 그 모습을 보고 “이제야 얘가 철이 들었구나!”하면서 대견한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평소처럼 밝은 표정으로 까불면서 지내는 것이 훨씬 좋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원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고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살자!”는 다짐을 하며 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살았다니... 나는 순전히 엉터리였다!”라고 하면서 웃음도 잃어버리고, 완벽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자학하면서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진지한 모습은 필요하지만 밝은 웃음을 잃어버릴 정도로 지나치게 진지해서는 안 됩니다. 헌신은 필요하지만 헌신하지 못하는 자기를 학대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려는 모습은 좋지만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지나치게 들볶으며 사는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며 밝게 사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임병철 선교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말씀 전하고 집으로 가실 때 광명까지 차로 태워드렸습니다. 차가 막히지 않고 광명에 일찍 도착해서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근처의 카페를 들렸습니다. 카페 안에서는 옛날 6-70년대 팝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임병철 선교사님이 20년 만에 이런 곳에 처음 왔다고 음악을 음미하면서 한참 분위기에 젖어 사모님에게 말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이런 것도 필요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송명희 사모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갑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5분 만에 나왔습니다.

옛날이 저도 신앙이 뜨거웠을 때는 무드 깨뜨리는 선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무드를 잘 깨는 것이 신앙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항상 인고의 세월에서 고생하며 사는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뛰놀며 사는 건강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4. 과거에 너무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이 말씀도 조금 확대해서 적용하면 과거의 것에 너무 매여 살지 말라는 말씀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과거의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과거의 좋은 전통은 살리고 계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좋지 못한 것이나 기억들은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교회 열심히 나갔다가 안 나가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과거에 교회생활에서 큰 상처를 경험했던 분들입니다. 그 사연을 들어보면 대개 “누군가 자기를 실족시켰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 상처에 대한 기억을 하루 빨리 잊는 것이 복된 길입니다. 누가 실족시켜도 내가 실족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분은 믿음이 약해서 너무 실족을 잘합니다. 어떤 목사님 얘기입니다. 하루는 한 성도가 와서 따지더랍니다. “왜 새벽에 기도할 때 사모님이 나보고 교회를 나가라고 기도합니까?” 너무 기가 막히는 얘기를 듣고 집에 와서 사모에게 “정말 그렇게 기도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모님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래도 그때 어떻게 기도했는지 자세히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해외 취업을 원하는 성도가 있는데 비자가 안 나와서 못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오해하고 들은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에는 실족하기 위해서 5분 대기조처럼 대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끔 보면 기도뿐만 아니라 설교에 실족해서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도는 말씀을 들을 때 기분 좋기 위해서 듣지 말고 변화되기 위해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변화되기 위해서 들으면 실족하지 않지만 기분 좋기 위해서 들으면 결국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칭찬만 있는 것은 잠시 기분이 좋고 나중에 영혼이 망하는 길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처럼 책망에 민감하게 반응합니까? 대개 보면 과거의 상처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현재를 창조적으로 살려면 주님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잘 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과거에 힘든 일을 겪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마음 관리가 중요합니다 >

오늘 신약 성도의 성공적인 삶을 위한 자세를 살펴볼 때 역시 무엇보다 마음 관리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은 가장 확실한 실패 요소입니다. 반면에 말씀 중심적인 마음은 가장 확실한 성공 요소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고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죄를 지어도 “오냐? 오냐?”하고 그 죄를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철학, 교육학, 상담학, 심리학 등의 모든 교육이 사람의 죄를 합리화하는데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런 풍조가 만연하다 보니까 세상이 다 남 탓만 하는 세상이 되었고 도덕적 해이 현상이 아주 심각하게 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남의 돈 떼어먹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 신용 불량자들이 수백만 명이나 됩니다. 남의 돈을 갖다 쓰고 끝납니다. 그것이 사회 문제가 되니까 세상 여론은 “왜 정부에서 돈을 막 빌려주는 카드정책을 썼느냐?”고 야단입니다. 안 갚은 사람이 나쁘다고 하지 않고 빌려준 사람이 나쁘다고 하는 이상한 논리를 폅니다.

옛날에는 그런 행위들이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을 어긴 것으로 사형 죄에 속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도덕이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십계명이 제정된 3500년 전보다 도덕심이 더 나쁘게 후퇴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문제입니다.

그런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현상이 너무 심각합니다. 지하철에 불 지른 사람을 놓고 “왜 장애인을 푸대접해서 그런 일이 생기게 했느냐?”고 합니다. 그것은 장애인을 생각해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장애인은 장애가 있어도 열심히 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죄를 사회 구조적인 악을 내세우며 합리화하려는 태도는 도덕적 해이를 낳고, 사람을 무책임하게 만듭니다.

죄를 지었으면 야단맞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지적당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불쾌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영혼은 망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이런 죄인이었구나! 내게 이런 이기주의가 있었구나!”라는 애통한 심령을 가질 때 우리에게 진정한 속죄와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고통을 실족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고통을 회개와 변화의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실족케 하는 사람만 큰 죄인인 줄 아닙니다. 그러나 잘 실족하는 사람도 큰 죄인입니다. 실족케 하는 사람의 문제는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기적 태도’가 문제입니다. 반대로 잘 실족하는 사람의 문제는 ‘남 탓을 잘하는 부정적 태도’가 문제입니다.

가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환경 탓, 사회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책임한 변명입니다. 배고픈 환경은 도둑도 만들지만 똑같은 환경이 성인을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는 환경 탓, 남 탓을 최대한 절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그는 지옥에서도 또 탓합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실족해 지옥에 왔습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변명은 없습니다. 나의 신앙을 팔아먹은 것은 내 탓이지 남 탓이 아닙니다. 나의 불행은 내 탓이지 부모 탓이나 자녀 탓이 아닙니다. 부모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자녀는 격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탓하는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소망 중에 전진하면 반드시 성공적인 삶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들은 대로 마음과 생각을 건강하게 만들고, 남을 인정하고 특히 약자를 살피며,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크게 보고, 미래의 소망을 향해 열심히 뛰어 달림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 한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