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 6:11-12)

  • 잡초 잡초
  • 568
  • 0

첨부 1


지난 주 한주일 내내 우리 주일학교 여름 수련회 장을 다녀오고 함께 기도하며 이러 저러한 마음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로부터 그리고 일상의 분주함으로부터 탈피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또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데 전력을 하였습니다. 또 우리 선생님들은 분주한 직장 혹은 사업이나 가정의 여러가지 분주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것을 잠시 뒤로하고 모여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기도해주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데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또 배우는 학생들이나 모두가 한가지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만들어져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반 사람이 보면 별로 재미없을 그러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무더운 여름철에 앉아서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또 같이 나누는 것들이라야 그저 세상의 재미로 보면 별로 재미없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는 선생님들이나 더 즐거워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은혜는 세상에서 누리는 은혜와 기쁨과는 근본적으로 방향이 다르다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 데려다가 그 자리에 놓으면 기도하는 것도 지겨울 것이고 찬송하고 성경공부하는 것도 지겨울 것이고 믿음의 사람들 모여서 이러저러한 교제를 나누는 것도 매우 따분하게 여겨지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백성들이 모여서 같이 나누는 모든 시간들을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노라면 ‘정말 우리들에게 과연 기준이 무엇인가 그리고 또 방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면 기쁘고, 기도하면 마음에 즐거움이 있고,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 감격이 있고 또 하나님 앞에 우리를 헌신하고자 하면 우리 마음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쁨은 이런 것이야라고 우리 마음에 설정한 기준이 있고 또 우리는 이것이 기쁨이야 하는 삶의 방향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아주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그 일이 바른가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도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을 이루게 되면 더 큰 잘못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과연 바르고 옳은 일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보면 우리는 세상에서 헛된 욕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무더위와 휴가로 인해 각각 곳곳으로 떠나는 많은 인파 중에서 주일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성도들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잠시 잠깐 우리 마음을 위로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삶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셨고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보다 더 어떻게 우리의 삶의 이루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이 전 구절에서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 인간의 헛된 탐욕으로 말미암아 시험과 올무와 정욕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멸망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에서는 이와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그와 같은 헛된 탐욕을 피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믿음의 백성의 덕목인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을 위해서 싸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성도의 최고의 선인 영생을 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첫 번째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세상의 헛된 탐욕으로 인하여 의미 없는 다툼을 이루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삽니다. 좋은 일을 해도 좋지 않은 일을 해도 나름대로 열심을 가지고 그 일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11절 말씀대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곧 인간의 탐욕스러운 세상의 것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열심을 내기 전에 과연 이것이 옳은가하는 것을 꼭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헛된 탐욕에 빠지면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를 찌르는 것이 됩니다. 헛된 욕심은 우리들에게 정당성을 위장하여 우리에게 명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우리들에게 쉽게 판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헛된 탐욕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백성의 아름다운 덕목을 추구하는지는 간단합니다.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위한 것인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과연 내게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내 마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혼용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강력한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다보면 내 마음의 욕심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마치 내 마음의 의지의 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착각 속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전혀 어지러운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헛된 탐욕이라는 것은 보다 더 쉽게 말하면 헛된 집착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내 성취욕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인해서 우리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죄악의 마음을 집착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에 우리가 집착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보이지 않고 우리는 눈이 멀게 됩니다. 내가 집착하는 탐욕 가운데 그저 빠져버리게 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아무 것도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되니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끼치고 하나님의 일을 상해하고 또 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도 망가지는 줄 모르고 우리는 집착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벌써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면 이것은 큰 문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될 수 있어 그래도 나는 괜찮아’라는 마음의 여유정도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내 마음 속에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최소한의 여유는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욕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꼭 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우리가 내 마음을 거둘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오히려 선을 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꾸 다툼이 생기면 그것은 헛된 탐욕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선 우리의 마음을 넓히고 또 상대를 배려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가 못하는 이유를 상대에게 상황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돌립니다. 어떤 일을 왜 못하는가라고 핑계라도 대야 시원합니다. 못하면 그냥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깨닫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면서 너무 네가 옳고 내가 옳고라고 밝히는 것에 너무 지나칩니다. 그렇게 밝혀봐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너무 빈한해질 뿐입니다. 내가 잘했건 그가 잘했건 하나님 앞에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결국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여유가 있다면 마음이 더 넓어진다면 내가 분명히 옳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위로를 위하여 상대편에 마음의 기쁨을 줄 수 있도록 나의 부족을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언제나 내가 옳아야하고 언제나 내가 이겨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힘이 없는 사람은 늘 이기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힘이 주어지면 이제는 상대를 생각해서 져 줄 수 있는 여유도 생기는 것입니다. 지식이 적을 때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아지면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틀린 지식을 흡수한 것일지 모른다는 이와 같은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자신 없고 확신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때로는 나를 낮출 수 있고 양보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과연 내가 헛된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사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분별할 기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내 만족 때문에 그 일을 추구하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만족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백성의 만족을 위해서 그 일을 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냉철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믿음의 백성에게는 이 냉철함과 뜨거운 열정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겸비되지 않으면 늘 실수하게 되어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냉철하게 생각해야하고 우리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만족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내 만족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원하던 일도 내 선에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함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싫어도 그 일을 이룰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시적인가 영속적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은 시간이 있습니다. 제한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할 수 있을까요? 시간 지나면 달라집니다. 시간 지나면 기호도 달라지고 또 거기에 대한 선호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그저 한시적인 것에 우리 마음걸고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것에 우리 마음걸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확대시켜주는 확장형임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 혼자만의 만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더욱더 유용한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헛된 탐욕대신 우리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헛된 탐욕 대신 무엇을 좇아야 결국 우리 마음의 헛된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까? 경건에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주의 성도님들은 경건의 기쁨을 누리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경건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우리의 삶 속에 근본적인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 내 마음에 한없는 감격이 있고, 내가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의 강같은 평화가 있으며,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내 마음의 뜨거운 열정으로 내 가슴이 하나님의 은혜로 달구어져서 그것 가운데 모든 죄악의 요소들이 녹아지고 모든 미움의 요소들이 녹아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내 마음속에 뜨겁게 불일듯 일어날 수 있는 경건의 기쁨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날마다 이 경건의 기쁨으로 하루의 눈을 뜨시고 경건의 기쁨으로 하루해를 마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좇는 사람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좇는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어야 합니다. 쟁기를 든 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백성으로 나섰다면 이제는 이전의 세상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좇는 것이 기쁨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많이 괴롭히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정말 자신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지조차도 깨닫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지 그것조차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고 매우 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에 흡족하고 내가 주장하고 내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내감정이 상하면 다른 사람에게 거침없이 공격하는 모든 미숙한 사람들의 모습들 중의 하나가 우리가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내 뜻과 상대의 뜻이 달랐을 때 내 뜻이 관철되는 것이 기뻐한다면 우리는 초보자의 수준입니다. 내 뜻이 관철될 때 상대방의 마음의 상태를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내 생각이 옳았었는가? 아니면 상대가 내 마음을 펴주기 위하여 그냥 내 마음에 양보해 준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우리는 파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때로는 이러한 것까지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음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경건의 기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다른 이들의 기쁨을 배려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의 탐욕을 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좇아 믿음의 덕목들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괴롭히고 넘어뜨려 일어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를 세워줌으로 더 큰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두 번째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어야 합니다.
엉뚱한데서 싸워서 상처받고 엉뚱한데서 싸워서 무너지고 엉뚱한데서 싸워서 기쁨을 얻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잘된다고 우리는 행복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행복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불행해 한다면 도대체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지내실 때 그렇게 성공적인 인생을 사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 행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켜도 사람들은 등 뒤에서 그 기적을 비난했습니다. 오히려 기적을 일으키고 능력을 행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어찌 생각해 보면 사람들에게 그 큰 능력을 행사하시면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러한 삶 속에 처하시게 되었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게 되셨던 것입니다. 내 모든 소원 내가 원하는 모든 일 그것이 다 이루어져야 내가 성공하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내 마음의 원함이 이루어지고 내 기쁨이 이루어져서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원하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가면서 그것을 피하시지 않고 오히려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만류하셨던 것을 봅니다.

우리는 어찌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음대로 지는 법을 배울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대로 져주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른뺨을 때릴 때 왼뺨까지 대주는 이와 같이 지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승리를 구가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백성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취하여야 할지 내가 어디서 이기고 어디서 져야할지 나는 무엇을 추구해야할지 구별해야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싸워야 합니까? 하나님과 그에 대한 믿음을 취하고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성도로서 내가 정말 빈곤하게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와 같은 세상의 탐욕으로 인해서 지금도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인 아닌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영적 빈곤감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무너져 내려가고 있는 중은 아닙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곧 영생을 취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도 그 힘듦이 우리의 영생과 관련이 없는 거라면 우리는 빈곤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내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투자 없이 성취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영적인 기쁨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를 이루어야하고 투자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기쁨을 위해서 살아갈 때 우리 마음속에 평안이 있으되 정말 이 세상에서 성취만을 위해서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슬픔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선을 향한 전투지를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피곤하여 낙심치 아니하면 반드시 그 선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다 보면 우리는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선을 향한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거나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향한 분명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낙심할 때 피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나 내게 주어진 상황이나 결과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을 향한 전투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전투의 이유라면 그 방법도 믿음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세워가고 그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이 즐거운 것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이 내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기뻐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힘에 지나치게 의지하다 보면 스스로 자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동산 수풀에 숨었습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 했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될텐데 그만 숨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질 수 없고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죄악의 심성을 품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늘 실망하게 되고 낙심하게 됩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신이 기준이 되면 우리는 결단코 강하게 지낼 수 없음을 봅니다.

우리가 세번째 생각을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데 있어서 우리의 준비와 각오가 필요합니다.
믿음을 짐으로 여기지 말고 힘으로 여길 수 있는 신앙의 기초가 든든히 서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기초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든든하게 될 때 우리는 믿음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힘으로 여깁니다.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싸움의 승리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진정한 힘은 욕심에서 나오지 않고 정의에서 나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욕심을 부려서 그 일을 이루는 것 같지만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정의에서 힘이 나오게 됨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우리 믿음에 대한 정당성을 소유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이 일을 이루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합당하다는 마음의 정당성을 소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작은 흔들림에 쉽게 회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꿋꿋하게 그 일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상황에 쉽게 흔들립니다. 너무나 작은 어려움에 쉽게 흔들립니다. 좀 어려워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좀 힘든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믿음이 도대체 내게 어떤 힘을 주는가? 회의하고 또 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게 되면 도대체 ‘나에게 뭐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과가 시원치 않을 때 ‘나는 뭐야?’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그야말로 순간에 달라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한걸음 잘못되면 저기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여러분 한 번 두 번 열 번, 99번 잘했는데 100번째 잘 못하면 그 한번으로 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인생은 언제든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볼 때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내 길을 인도하셨고, 지금도 내 길을 인도하시는 마음에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이제는 보다 넓은 문제로, 큰 문제로 눈을 돌려야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라서 그럴 수밖에 없지만 저는 우리 성도들 보면 매우 매우 불쌍한 것 같습니다. 저도 물론 불쌍하고요. 정말 너무너무 안된 것 같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모르겠어요. 여러가지 이러저러한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고 또 눈물이 있고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다 슬픔과 눈물이 있는 것 같아요. 그저 목사의 심정이니까 그렇게 느끼고 또 그러니까 기도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 인생은 정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흡족하게 이룰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화려하게 웃는 그 웃음 뒤에 돌아서는 그 쓸쓸한 미소를 우리는 늘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밝은 면 이면에 있는 그늘진 모습을 우리는 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따지다 보면 아무리 기쁜 일이 많아도 늘 슬픈 일이 가슴 한부분에 있는 것입니다. 10가지 일 중에 10가지가 다 잘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 반드시 몇 가지 잘되고 몇 가지 잘못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슬픔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생의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슬픔에 집착하다보면 우리는 영원히 기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내 자신의 집착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혜의 사건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혜의 영역이 우리에게 관심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큰일에 우리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처리하다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넓어지는 거예요. 이전에 내가 괴로워하던 문제를 보니까 ‘야, 내가 저런 문제 때문에 저렇게 괴로워하다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커져 버려 그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커지니까 그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삶에서 모든 일을 생각할 때마다 서로 힘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일을 하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니까 힘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일을 생각하니까 지금 일 때문에 그 문제가 용기있고 자신 있고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요즘 일주일에 한번씩 등산을 하는데 제가 등산을 하면서 꼭 생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러닝머신과 등산이라는 것 두가지를 생각합니다. 저는 등산을 갈 수 있는 날은 등산을 가고 그렇지 못한 날은 러닝머신에서 걷든지 뛰든지 시간을 가집니다. 이 러닝머신에서 뛰는 것도 참 게으른 사람한테는 그렇게 편한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야 되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럴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냐하면, ‘아이, 나는 등산을 가는데 다리 끌어올리는 것이 상당히 힘들어. 그렇지만 지금은 평지에서 걷거나 뛰는 것이니까 별로 힘은 안들어.’라고 생각하면 러닝머신에서 뛰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등산가면 또 이렇게 생각해요. ‘야, 러닝머신에서 뛰는 것은 쉴새없이 발을 움직여야 되는데 등산을 하다보면 조금 천천히 갈 수도 있고 조절도 할 수 있으니까 너무 편해.’ 그냥 그렇게 생각해서 등산을 해도 기쁘고 러닝머신을 해도 기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지요? 등산가도 괴롭고 러닝머신을 해도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행복하게 살려고 생각하면 한없이 행복한데 괴롭게 살려면 한없이 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배에 가니 은혜도 안되고 집에 있자니 마음이 괴롭고,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집에 있으니 감사하고 즐겁고 예배드리니 더 감사하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만나니 괴롭고 저 사람 만나니 고통스럽고가 아니라 이 사람 만나도 감사하고 저 사람 만나니 더 기쁘고 우리의 삶에 뭐든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쁨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지나친 집착은 우리를 축소시켜요. 지나친 집착은 우리를 축소시킨다 이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고 ‘그게 별것 아니었구나.’라고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문제 한참 생각하다 보면 그 문제의 해결은 결국 잠시 생각을 돌려 바깥 경치 한번 보는 순간 해결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인한 싸움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동참하고 그 일에 순종하고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뿐이라 생각됩니다. 자꾸 내 능력이나 처지를 생각하면 실패하고 우리는 마음이 슬퍼집니다. 이제까지 내 능력이 돼서 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잠시 뒤에 그냥 쫓아가는 일 뿐이다. 잠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뿐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능력을 보고 실망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사실 좇아가는 삶은 굉장히 편안한 것 같습니다. 그저 하나님 따라가면 되는데 우리 스스로 이리저리 좌충우돌 하니까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낯선 곳에 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혹시 외국에 나가서 운전을 할 때도 요즘은 주소를 치면 방향이 나오니까 별로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심지 같은 곳은 잘 찾아가다 보면 빙빙 돌아도 잘 못 찾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빙빙 돌고 잘 못 찾는 것 같은데 방법이 없잖아요. 저는 그런 경우 많지는 않지만 간혹 닥칠 때마다 그냥 차를 세웁니다. 괜히 여기서 내가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대부분 그 지점에 다 가서 못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를 세우고 택시를 세워서 택시기사에게 주소를 주고 여기로 가면 택시요금 드리겠다고 하면서 택시기사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거기서 5분,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입니다. 대부분 그 주변에 가서 빙빙 돌면서 길을 못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택시기사를 따라가는 순간부터 굉장히 편안해집니다. 내가 저 택시만 따라가면 금방 도착하겠지. 그런데 그 주소보고 못 찾아서 빙빙 돌때는 한없이 왔던 자리 또 오고 왔던 자리 또 가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첫째는 정확한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다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 뒤를 그저 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뒤만 따라가면 마음이 편해요. 일단 인도자가 있다는 것은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하고 내 스스로 좌충우돌하며 살아가니까 늘 불안하고 괴롭고 어렵고 힘들다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모든 내 삶의 일을 내 일로 만들지 말고 주님의 일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따라가는 삶은 기쁨과 은혜의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한 싸움은 어느 순간만이 아니라 삶의 전 범위에서 끝까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지막에 결승점에 도착하는 사람이 우승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살다보면 가끔 이제 여기서 모든 일 좀 그만하자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야, 그저 좀 쉬고 싶다. 이제는 그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그만 했으면 좋겠다.’ 하는 때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물 밖에서 유유히 유영하는 것 같지만 그 물밑에서 발을 부지런히 동동거리며 움직여야 그 몸을 물 위에서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유연하게 보여도 얼마나 많은 내적인 마음의 갈등과 어려움과 수고와 애씀이 있습니까? 정말 성경말씀 이 구절을 보면 정말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 같아요.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니 우리는 일찍 일어나며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쉽지 않죠. 어느 순간 괜히 그냥 다 내려놓고 싶다. 그냥 다 편하게 지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다 그만둔다면 우리 삶을 어떻게 마지막까지 영유해 갈 수 있겠습니까? 또다시 힘을 내서 우리는 살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기사를 보니 이 세상에서 소위 성공한 사람들 정치가, 경제인, 학자, 성직자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나도 저 사람같이 되겠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 가운데 다발적으로 나타나는 증후군이 하나 있는데 ‘사기꾼 증후군’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데 ‘내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은 나를 존경해, 나는 인기가 있어, 다른 사람은 나같이 되기를 원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 매우 정말 표상으로 삼고 나를 사모하는데 내가 나를 볼 때 나는 무엇이냐?’라고 생각하며 내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나는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도 아니고 나는 다른 사람이 흠모할 만한 인격을 갖춘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나를 보면 훌륭하게 생각하고 나같이 되고 싶어하고 사람들은 내 위치에 서고 싶어하고, 그런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순전히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이 괴롭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스스로 성찰할 때 누가 자신이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비춰볼 때 우리는 모두 더러운 사람들입니다. 내가 성공한 것도 남을 밟고 일어섰기에 내가 일어선 적도 있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정말 어려움을 끼쳤기에 내가 즐거울 수도 있었던 수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볼 때 내가 흡족하게 다른 사람이 나같이 되면 좋겠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나 그 순간마다 또다시 딛고 일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함을 받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로운 은혜로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힘과 은혜를 부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힘을 주고 서로에게 힘을 받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우리 마지막 날까지 우리 자신을 유지조차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힘과 은혜와 능력이 없다면 우리 자신을 이 모습 이대로 유지조차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한번 얘기해 봅시다. ‘내가 당신에게 힘이 되나요?’ 우리 다시 한번 얘기합시다. ‘당신은 늘 내게 힘이 되고 있어요.’ 자, 다시 한번 ‘내가 어려울 때 당신은 늘 힘이 되어 왔어요.’

우리는 어려울 때 상대방을 공격해서 완전히 KO 시키는 사람들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려워서 그냥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것을 더 공격해서 욥의 친구처럼 그냥 상대방을 더 어렵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 불쌍해요. 사람들은 다 불쌍합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내면적인 세계를 자기가 다 알고 있으니 얼마나 어렵게 사는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날마다 새 힘을 얻고 주변의 도움을 얻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우리는 또 새롭게 되고 또 새롭게 되고 또 힘을 내서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마지막 경주를 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승은 출발이 빠른 사람이 아니라 결승선에 먼저 도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전의 우리의 믿음, 헌신, 봉사, 여건이 달라지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내 위치에서 그리고 변함없이 나아가 더 주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전투 의지를 유지하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 삶의 새로운 헌신과 봉사와 사역의 길을 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마지막 넘어야 될 관문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다 이루어도 내가 그렇게 애썼던 일을 다 이루어도 우리 인생이 마지막 넘어야 될 관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여기에서 다 넘어집니다. 바로 권태입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어도 조금 지나면 권태로워집니다. 그것이 내게 기쁨을 더 이상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되죠? 늘 무엇인가 마음속에 흡족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봉사, 끊임없는 헌신, 끊임없는 새로운 사역의 길을 끊임없이 개발하여 하나님 앞에 날마다 새로운 헌신과 수준 높은 은혜의 지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살다보니 이제는 한계가 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젠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다 보면 이제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사명이 생기고 이제 확장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우리 눈앞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내게 집착하다 보면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 자신을 위주로 무엇을 하다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책임도 내게 없고 나는 할 수도 없으니까 다만 하나님의 손에 잠시 들려 쓰였다는 것만 해도 감사할 것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꿈과 새로운 일과 새로운 기쁨을 개발하여 진행하는 사람들이 될 때 우리 삶은 더욱더 푸르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즘 마음속에 깊이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평생 같이 살아도 옆에 있는 사람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세요? 수십년 동안 직장에서 같이 생활을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또 눈물을 주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살아온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삶의 미숙함으로 늘 실패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고 늘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은혜의 지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늘 진보를 위한 새로운 각오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려는 의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로 연연하면 우리는 해결되지도 않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관심으로 돌려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관심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로 돌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더욱더 큰사람이 되어 그렇게 풀지 못해 애달파 하던 우리의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이제는 세상의 탐욕 속에 이리저리 휘말리던 것에서 그것을 피하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