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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7대표적(4) : 오병이어의 기적 (요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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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의 호미곶에 가면 「해맞이 광장」이 있는데, 거기에 대형 가마솥이 있습니다. 작년엔가 새해맞이 행사 때 2만명분의 떡국을 끓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굉장하죠. 최근에는 충북 괴산군에서 더 큰 가마솥을 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다 둘레 15m의 세계 최대의 가마솥을 만들었는데, 쌀 50 가마로 4만명분의 밥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밥을 지으면 아마 장관일 겁니다.

그런데 본문 성경을 보니까,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욱 놀라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 부르는 것인데, 예수님의 7대 표적 중 네 번째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간단히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어떻게 하셨나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손에 들고 축사(감사기도)하신 후 나눠 주셨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많은 무리가 배가 부르도록 먹었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의 수효가 얼마나 됐을까요? 남자만 5천명(10절)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 이상이 됩니다. 병행 구절인 마14:21을 보면 이 숫자는 성인 남자만 해당됩니다. 그 외에 여자와 아이들 숫자까지 합치면 아마 1만 명, 아니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은 것도 대단한데,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13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힘으로 수만 명을 먹이려면, 그것도 배불리 먹기보다 이벤트를 위해 조금씩 먹는 것임에도 얼마나 많은 힘과 노력이 요구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면 결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함께 살펴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찾아 피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 기적의 동기 : 긍휼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 함부로 남발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꼭 필요할 때만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마음 속에 긍휼이 발동할 때입니다.

여러분, ‘긍휼’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민망히 여긴다’는 말로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깨끗이 고쳐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막1:41~42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여기서 ‘민망히 여긴다’는 말이 곧 긍휼입니다. 영어성경(NIV)을 보면, ‘민망히’ 라는 말이 with compassion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compassion은 연민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분석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com-’은 ‘함께’ ‘더불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passion’은 ‘고난’ ‘고통’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긍휼, 연면의 정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방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고,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그런 느낌이 가득 찰 때 기적을 행해서라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마9:35~36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소개됩니다. 그 모든 것의 동기가 ‘긍휼’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본문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셨다는 것은 그냥 쳐다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무리를 보시는 예수님의 느낌까지 암시합니다. 연민의 정이요, 긍휼입니다. 병행 구절을 보면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6:34~35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때가 저물어 가매 ... ” 예수님은 그 무리가 불쌍해서 말씀을 늦도록 가르쳤고, 또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자 그들이 끼니를 거를 것을 염려하시면서 기적을 행하신 겁니다.

반면에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귀찮아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이 늦도록 설교하시자 지루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을 빨리 보내야 쉬기도 하고, 먹을 것도 자기들은 적은 숫자니까 해결하기 쉬우리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기적을 바랍니까? 그러면 주님께 불쌍히 보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불쌍한 척 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실체를 알면 겸손히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인생이요,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늘 넘어지고 쓰러지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고백하면,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왕이었지만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마지막 갈 준비를 하라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죽는 것 자체도 큰일이지만 그때 상황은 아주 심각했습니다. 아직 그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외침의 위기로 불안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죽음이 닥쳐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히스기야는 모든 것을 단절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사38:2~3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 ”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수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긍휼이 생겼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 앞에 겸손함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큰 은혜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 자녀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불쌍합니다. 그들이 먹을 게 없고 입을 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보면 연약한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들, 그리고 이 민족과 세계만방의 영혼들도 마찬가지 주님의 마음을 품고 바라보면 정말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 여름 사역이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잘들 하고 계십니다만,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긍휼의 마음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농어촌 선교와 해외 선교를 할 때나 한낱 이벤트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보다 우리 마음속에 긍휼의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우리 교회에 얼마 전에 방문했던 로수길(Sukrit Roy) 선교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인도인이고, 사모님 변상이 선교사님은 한국인입니다. 그분이 십수년 전 한국에 와서 유학 할 때, 한국이 너무 부러웠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그렇지만, 곳곳에 교회당이 있고 십자가가 있는 게 너무 부러웠습니다. 가난한 조국, 영적으로 죽어가는 동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후 그는 인도에 돌아가서 신학교를 세웠고, 거기서 배출된 신학생들이 사역자가 되어 각지에 흩어져 개척교회를 100여개 이상 세웠습니다. 기적입니다. 안식년에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귀환하는데, 앞으로 일반 학교,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세운다고 합니다. 소요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사역도 큰데 어떻게 하려나 인간적인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마음속에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대화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느끼는 게 바로 그겁니다. 그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 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이분에게 긍휼이 있구나. 이게 기적의 비결이구나.”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주님께 기적의 동기를 많이 제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이웃들에게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의 역사가 많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신앙 훈련 : 믿음을 키워주심

예수님은 무리들이 불쌍해서 먹여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만 위해서라면 당장 기적을 행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상황을 제자들을 위한 신앙 훈련의 기회로 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신앙을 키워주셨습니다.

① 빌립의 신앙 :

예수님은 먼저 빌립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5절. “ ...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 ” 사실 말도 안 되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의도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 테스트입니다. 6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마음 속에 이미 기적을 행하시려고 작정하셨지만, 제자들의 신앙을 훈련하려고 그러신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빌립은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7절. “ ...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금세 계산을 해보고 200데나리온 어치 떡을 사서 먹여도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라는 말이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입씩만 먹기에도(for each one to have a bite) 부족하다는 겁니다. 또 200데나리온이란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200데나리온이면, 노동자의 8개월 치 봉급에 해당합니다. 꽤 큰 돈이죠. 그런 돈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있다고 해도 어디 가서 그 많은 양의 떡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절대 불가능하니까 해산하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일지 모르지만 신앙은 빵점입니다. 그는 믿음의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잣대가 전부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 역량만큼, 자기 조건 만큼만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기 주먹만한 하나님, 지식만한 하나님, 저금통장만한 하나님으로 제한됩니다.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초월하는 겁니다. 나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비과학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신앙은 비(非)이성이 아니라 초(超)이성, 비(非)과학이 아니라 초(超)과학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입니다. 그분이 우주만물이 질서 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연법칙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연구해서 체계화시킨 게 과학입니다.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자연 법칙이 엄청 많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자연법칙을 총괄하십니다. 그러다가 이따금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게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 사항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인정하는 게 우리의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이런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은 그런 모습을 가리켜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런 사람은 ‘무식한 박사’라는 겁니다. 자기는 똑똑한 척 하지만, 사실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또 이런 사람을 우리말로 ‘겉똑똑이’라 합니다.

② 안드레의 신앙 :

예수님은 다음으로 안드레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안드레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역시 자기 이성적 판단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좀 달랐습니다.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이성의 판단으로 을 단정 짓지 않고, 혹시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나 모색해 봅니다. 9절에 기록된 그의 대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일단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존중합니다. 따르는 시늉이라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든 수가 없나 알아보니까 한 소년이 오병이어 도시락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걸 얻어 갖고 주님께 가져옵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데, 혹시 주님께 무슨 방법이 있나 여쭙니다. 그것은 정말 적은 믿음입니다. 비유하자면 ‘겨자씨 같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같은 믿음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마 17:20에서 주님이 무라고 말씀하십니까? “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안드레를 귀히 보십니다. 아주 적은 믿음이지만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감사함으로 축사하십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기적도 체험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점점 커지는 겁니다. 아무쪼록 이런 과정으로 큰 믿음을 키우시고 날마다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의 거부 : 십자가가 빠진 기복주의 신앙

본문 14절~15절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기적을 본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 열렬히 환호합니다. 급기야 구약 시대에 예언되었던 바로 ‘그 선지자’(신18:18 참조) 즉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생각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으므로
메시아(왕, 구세주)의 출현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합니까?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고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나요? “ ...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도망치듯 가버렸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한참 인기가 치솟고, 왕이 되려고 하는 그때 도망가다니! 그것은 일종의 ‘거부’였습니다. 무리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메시아’입니다. 무리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 육신적 문제만을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관(觀)의 착오입니다. 2절 보면, 지금 몰려든 것도 병을 고쳐주시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곧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축복을 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2차, 3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중요한 핵심은 영적인 축복, 즉 구원과 영생입니다. 문제는 핵심적인 것을 빼놓고 2차 3차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예수님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 결국은 찾아냅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매정하리만치 그들을 거부합니다. 요6: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 그러면서 당신을 스스로 소개합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육신을 위한 떡은 먹어도 결국 죽게 되지만,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떡은 예수님의 살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음료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요6:54~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결국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왔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사형 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육신적 축복에만 관심을 둡니다. 영적인 것이나 구원의 문제에는 무관심했던 그들은 결국 등을 돌립니다. 요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씁쓸하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요6:67 “ ...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히트를 칩니다. 요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영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물질적, 육신적 축복이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빠지면 참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를 도외시한 채 물질적, 육신적 축복만 구하는 것은 ‘기복주의 신앙’이요 ‘신앙의 수단화’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유대인 2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난파를 당해서 간신히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합니다. 그 중 한 명이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구해 주시면 재산 절반을 바치겠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풍랑이 더 심해집니다. 다시 기도합니다. “ 그러면 3분지 2를 드리죠.” 그래도 응답이 없습니다. 밤새 기도했는데 그대로입니다. 아침이 되어서 다시 기도합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제 재산 ... ” 전부를 드린다고 말할 찰나였습니다. 그때 다른 한 명이 외칩니다. “이 봐! 저기 섬이 보인다, 보여! 그만 해!” 여러분, 이런 건 뭡니까? 일종의 ‘거래’입니다. ‘흥정’입니다. 이해타산이 맞으면 하고, 안 맞으면 그만 두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행태가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짧은 연극이 있다고 합니다. 「단 15분 남은 인생」이란 제목의 연극입니다. 주인공은 20대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입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학위수여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 검진을 받다가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제 목숨이 15분 남았다는 겁니다. 그는 고민합니다. 병상에 누워있는데 전보가 한 통 옵니다. 억만장자 삼촌이 죽었는데, 유일한 상속자이므로 수속을 밟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두 번째 전보가 왔습니다. 학교에서 온 것인데, 개교 이래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었는데 큰 상을 주겠다는 겁니다. 평소 같았으면 너무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3분 남았는데, 세 번째 전보가 옵니다. 오랫동안 결혼해 달라고 졸라도 계속 거절하던 여인에게서 결혼 승낙 전보가 온 겁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그 젊은이는 세 통의 전보를 손에 쥔 채 운명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생명’ 아닙니까?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육신의 생명’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생명보다 ‘영생’은 더욱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 신앙인이 됩시다.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기적을 체험합시다. 고난이 닥쳐와도 십자가 신앙만은 고수합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풍성한 삶으로 승리하고, 이 세상 떠날 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 문 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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