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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신앙 생활은 행복하십니까? (요일 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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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화상으로 모두가 끝이라고 말하던 순간에 고통을 딛고 일어나 고난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를 세상에 전하고 있는 희망과 용기의 메신저, 이지선 양이 얼마 전에 '지선아 사랑해' 두 번째 이야기 '오늘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덤으로 사는 삶에 그 시작은 꿈도 희망도 없어 보였지만 하나님은 제게 희망을 주셨고 꿈꾸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작고 사소한 나의 마음 속 생각까지 아시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마음들을 회복시켜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오늘을 정말 감사해야 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희망입니다. 우리 자신이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꿈꿀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이 희망입니다. 정말 큰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는 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디이든 오늘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하나님께서 무너진 우리의 마음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꿈을 꾸게 하십니다. 희망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시기를 축복합니다. 희망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아십니까?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저와 여러분은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질투할 정도로 말입니다. 사단이 배가 아파서 뒤틀릴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재벌 100명과 박사학위를 가진 지식인 100명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87%가 "아니오.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에 만족하십니까?"라는 질문에도 "아니오. 만족도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높은 명예가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 이래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까?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힐티는 [행복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어느 갤럽 조사에 의하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산다고 했습니다. 몸도 더 건강하다고 했습니다. 가정 생활도 안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가지고 산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제대로 믿으십시오. 똑바로 믿으십시오. 그래야 예수 믿는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는 성도들은 신앙생활이 행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정말로 행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행복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정말로 예수 믿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예. 그렇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비함을 느낄 정도로 행복에 빠져 살아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술, 담배를 안하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

그러나 여러분, 솔직히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믿기 때문에 행복하기 보다 오히려 예수 믿는 것을 큰짐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믿자니 불안하고 믿자니 힘들어하는, 그래서 갈등 아닌 갈등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믿음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구원의 확신도 있습니다. 성경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예수 믿는 참된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저 형식에만 치우쳐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은 신앙생활이 행복해야 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 믿는 것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너무 힘들어합니다. 예배 시간도 지루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릴 때에 눈을 감는 것만 해도 답답해서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듭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다는 것도 정말로 부담스러운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뭔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그렇게 재미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행복해야 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정말 행복해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처럼 넉넉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작으면 신앙생활에 행복을 못 느낄 때도 있습니다. 믿음이 병들어 있으면 문제도 생깁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볼 때 믿음에는 전혀 하자가 없는데도 신앙생활에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지 안 믿는지 따져보면 다 믿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이 행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 정말 행복하십니까? 예수 믿는 재미가 없이 세상에 무슨 살 맛이 있느냐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이 시간 자기를 한 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이 정확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될 사람이 세상도 동시에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갈라졌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말은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절대로 신앙생활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연인에게는 둘만 있으면 됩니다. 초가삼간이어도 괜찮습니다.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어떤 때는 고생을 하고 남들에게 욕을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두 여자를 한꺼번에 사랑하는 남자치고 행복한 사람을 보셨습니까?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치고 행복한 사람을 보셨나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두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도 둘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사랑은 한 쪽에게만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쪽을 다 가슴에 품고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해 보십시오. 갈등 밖에 더 있겠습니까? 고통 밖에 더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는 항상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이 되실 때에는 언제나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세상에 주기 시작하면 그 마음에는 갈등과 고통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을 보아도 그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왜요?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완전하고 무궁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진지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우리가 어디 보통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과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러분, 기가 막히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재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보면 더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말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네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너는 나하고 관계없어." 그것은 좀 가능할지 모릅니다. 요즘 아버지,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말입니다. 세상이 하도 사나워서 부모에 대한 사랑은 이미 끝장났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답답하게 만듭니까? 자녀들은 엄청나게 사랑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처럼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기면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만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배도 버리고, 잡은 고기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예수님을 평생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울처럼 장가도 가지 않고 평생 동안 매 맞고 감옥에 가서 고생하며 이리 저리 쫓겨다니면서 주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확장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아들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이삭 와츠가 노래한 것처럼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들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진짜 그렇게 해야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드릴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순수한 사랑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이것은 될까 말까 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세상적으로 슬그머니 돌려서 세상에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고 정을 주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이 두 곳으로 나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15절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보십시오.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서 떠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라는 뜻도 되고, 또 하나는 나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기 시작하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 사랑이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순한 마음에는 거하시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둘을 다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을 조금 준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됩니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조금, 아주 조금 주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세상에 마음을 주면 내 사랑이 네 마음에 거할 공간이 없어져.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 둘 다 네 마음에 담을 수 없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잘 알듯이 이 세상은 대단히 매력적인 대상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체험하고 즐기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매력이 많습니까? 세상의 매력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세상의 쾌락, 세상의 즐거움, 세상이 주는 육체적인 황홀함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은 솔직히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16절을 보면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해서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둘째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먼저,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은 소유욕을 의미합니다. 소유욕이란 무엇이든지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갖고 싶어하는 무서운 욕망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이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솔로몬이 직접 체험하고 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물렸다 하면 끝까지 끌려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파산하는 것이 소유욕입니다.

두 번째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안목의 정욕이 무엇입니까?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일종의 쾌락욕입니다. 이 쾌락욕도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한 번 즐겼다고 만족합니까? 즐기면 즐길수록 더 큰 것을 즐기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마약이 갖는 위험성입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처음에는 작은 쾌락을 위해서 마약을 찾습니다. 그 다음에는 조금 더 큰 쾌락을 찾고, 그러다가 마약에 중독되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목의 정욕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장 8절에서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솔로몬이 누구입니까? 세상에 해 보지 않는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솔로몬이 자기 주변에 아름다운 미녀를 몇 명이나 두었는지 아십니까? 아가서 6장 8절에 보면,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눈에 아름답고 좋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자기 옆에 데리고 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즐긴 사람입니다. 온갖 부귀 영화를 다 즐겨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눈은 아무리 보아도 만족이 없더라. 귀는 아무리 들어도 차지 않더라." 이것이 안목의 자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이생의 자랑은 과시욕입니다. 자기가 얻은 명성을 자랑합니다. 자기가 쌓은 재물을 자랑합니다. 자기의 어떤 잘난 것들을 사람 앞에 자랑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기를 죽이는 것이 과시욕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과시욕이 있습니다.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자랑이라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모두가 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누구에겐가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소유욕이라든지 과시욕이라든지 쾌락욕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굉장히 아름다운 매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금방 그 쪽으로 마음이 돌아갑니다.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사고가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쓰다가 언젠가는 완전히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틀림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가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자꾸 갑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알고 가면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자꾸 빠져들어 가니까 어떻게 해 보지도 못하고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이 먼저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먼저 가고 그 다음에 행동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행동은 교회로 오지만 마음은 세상으로 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마치 이민을 간 사람이 처음에는 한국인으로서의 고유한 전통이나 언어를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5년 살고 10년, 20년을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본토 사람들의 언행을 닮아가 버립니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겉으로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기도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조금만 놓고 긴장이 풀려 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닮아 가고 동화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이 살기가 어려워서 정말 만정이 다 떨어지면 괜찮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날마다 피를 보고 죽음을 보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정이 떨어져 세상을 사랑하라고 해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릎 꿇고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자연히 하나님 앞에 마음을 줍니다. 그러나 전쟁도 없이 평안하면 달라집니다. 먹을 것이 수두룩하게 많고, 입고 즐길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 오래 계속 되 면 너나 할 것 없이 자기도 모르게 세상 쪽으로 마음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실 때에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축복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몹시 염려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네가 그 땅에 들어가 먹어 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잊어버린다는 말은 무신론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신론자가 된 적은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에도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닙니다.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징계를 당했습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빼앗겼기 때문에 징계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너무나 평안하고, 너무나 잘 살고, 너무나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에 세상으로 끌려 들어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롯을 보십시오. 롯의 아내를 보십시오. 삼손을 보십시오. 솔로몬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데마를 보십시오. 모두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마음을 세상에 주다가 끌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스스로 불행한 종말을 자초한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것이 어디 옛날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 주변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사실들이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 세상에 마음을 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 교회는 회색 지대가 되어 버립니다. 세상인지 교회인지, 교회인지 세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장소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서는 영적 의미가 애매모호한 이중구조를 가진 언어가 난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가치와 판단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과거에 우리 나라의 교회는 세계가 놀랄 정도로 굉장히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체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수가 격감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교회 성장학자들은 이렇게 진단을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못 살 때에는 예수를 잘 믿으면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가 굉장히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에 구름 떼와 같이 그 말씀을 듣고 예수 믿으려고 모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다 잘 삽니다. 잘 사는데 그렇게 열심히 교회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진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마음을 주면 우리의 행복을 잃어버립니다. 예수 믿는 자만이 알고 있는 행복을 우리는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의 교훈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하옵소서. 내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주의 말씀을 따라서 생명을 얻게 해 주옵소서"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독교가 말하는 변화는 소유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쾌락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과시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변화를 받았습니까? 설교를 듣다가 은혜를 받았습니까? 내가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다고 한다면 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십니까? 물질욕에서 자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바늘귀를 뚫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부자처럼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변화가 안된 사람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라도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삭개오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물질을 흩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변화는 받았다고 합니다. 은혜는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돈 이야기만 하면 얼굴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돈에 붙은 그 마음에서 자유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놓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재물을 영원히 남겨두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마음껏 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더 많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기독교의 변화는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 같은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서양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은 분뇨와 퇴비와 같아서 그것을 쌓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그것을 흩어버리면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똥은 악취가 납니다. 그러나 소똥, 개똥, 말똥, 세상의 똥이라는 똥을 다 끌어 모아 가지고 그것을 썩힌 후에 논에 뿌리면 땅이 비옥해져서 많은 추수를 하게 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흩어버리면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돈에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이 깃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가 그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짜 변화를 받은 사람입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마지막으로 본문 17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러분, 무엇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며, 무엇이 영원한가를 우리는 똑바로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소유욕이든 과시욕이든 쾌락욕이든 모든 것은 다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안개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놓고 생명을 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것에 내 마음을 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금방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내 한평생을 바친다고 한다면 그 사람만큼 바보스러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20세기 초반에 세계적인 기업이 100여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70년도 지나기 전에 그 100여개 중에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0여개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 많은 부자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이 지은 고대광실 같은 집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지나가서 없어지는 것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팔면 자기도 불행해 지고 하나님 앞에서도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돈은 열심히 버십시오. 힘껏 버십시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경쟁 사회에서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밤낮 없이 씨름하고 노력하십시오. 게으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지도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써야 될 것이지 거기에 마음을 주어야 될 대상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게 되면 우리 가슴속에 있는 행복은 깨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눈을 감을 때에 사랑하는 주님이 내 마음에 와서 조용히 내 마음을 터치하는 이 행복을 아십니까? 스쳐 지나가는 바람 결에도 주님이 주시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시나요? "세상 사람들은 믿을 것이 못 돼. 잘해 주려다가 다 원수가 되는 세상, 누구 하나 믿을 사람이 없어." 이런 생각이 들 때에 하나님 말씀을 펴놓고 마음에 묵상하면서 "하나님, 하나님만이 내가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라고 고백하면 우리 하나님은 조용히 다가 오셔서 내 영혼을 쓰다듬어 주시고 내 안에 새 힘을 주십니다. 그 감미로운 행복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눈앞이 캄캄하지만 기도하고 일어났더니 "하나님이 인도하셔. 분명히 해결해주셔"라는 확신이 가슴속에서 뜨겁게 일어나는 행복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런 행복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는 정상적인 크리스천입니다
(오 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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