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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공동체 습관(3) 절제 (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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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 통제권을 벗어난 소유와 존재는 공동체 속에서의 행복을 빼앗아간다.

지난주에는 각 인터넷 포털 사이트마다 하나의 사건이 공통적인 톱뉴스로 올라갔습니다. 사건이 발생한지 일주일 동안 기사 제목이 좀처럼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처음 경험하는 대형 사고였습니다. 이 사고는 인명사고가 아닌 정신문화의 사고였습니다. 지난 7월 30일(토) 오후 4시 15분경에 MBC 음악캠프 생방송 도중에 일어난 사상초유의 방송사고입니다. 인디밴드 “카우치”그룹의 2명이 하의를 벗고 약 6초간 성기를 노출하고 춤을 추는 화면이 생방송으로 전국에 송출된 방송사고입니다.

이 사고로 MBC 방송국에 비난의 화살이 돌아갑니다. 음악캠프 프로그램은 폐지되었습니다. 인디음악가들은 공개적인 방송 매체로부터 기피 대상이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의 MC가 당황하고 상기된 표정으로 시청자들에게 사과를 했지만, 방송국의 통제권을 벗어난 행위는 결국 방송국을 곤경에 빠트렸습니다. 5인조 펑크그룹 “럭스”와 함께 무대에 오른 “카우치”의 멤버들은 처음부터 분장을 하고, 팬티도 입지 않고, 성기노출을 계획하였지만 방송국은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출연진, 사회자, 8대의 카메라맨, 방송 송출업무 등 모든 영역들이 MBC의 주관 아래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성기노출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MBC의 소유와 존재들이 MBC의 통제권을 벗어난 순간, MBC의 행복은 사라졌습니다. 전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 아래 놓여졌습니다.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향한 정신적인 살인이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 잠복해 있던 죄악이 마음껏 활개 치며 전 국민을 죄악에 대해 무감각한 영혼들로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하나의 기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서는 매 순간마다 나타나는 상습적인 문제입니다. MBC에서는 어쩌다 한 번 나타난 대형사건이지만, 인간의 삶 속에서는 매 순간마다 나타나는 고질적인 사건입니다. 한 개인의 소유와 존재가 그의 통제권을 벗어날 때마다 그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비난받으며, 행복을 빼앗깁니다.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난 소유와 존재는 공동체 속에서 그의 행복을 빼앗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몸을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정신을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다양한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열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관계나 각종 관계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한 개인이 자신의 소유와 존재를 자신의 통제권 내에 머물게 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로 하여금 공동체 속에서 함께 누려야 할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소유가 있는지가 최종적인 행복의 척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가 최종적인 행복의 척도 또한 아닙니다. 그 소유와 존재가 자신의 통제권 속에 놓여 있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은 그의 불행의 근원이 됩니다. 그의 스트레스와 고민의 원인이 될 뿐입니다. 자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소유와 존재는 공동체 속에서 그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불행의 연결고리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그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전 2:21에서,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수고할 수 있는 지혜, 지식, 재주뿐만 아니라 그 결과 또한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음을 아는 자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지식, 지혜, 물질, 사랑, 능력, 관계, 환경들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존재가 어떤 통제권 속에 있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수고의 연속입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한 수고의 연속입니다.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향한 수고의 연속입니다. 어떤 소유를 들고 어떤 존재로 하나님과 세상 앞에 설 것인지에 관심을 두며 소유와 존재를 향하여 수고하며 인생의 길을 달려갑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 소유와 존재의 바른 길을 안내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통제권 밖으로 벗어날 때마다 공동체 속에서 행복한 인생은 사라집니다.

2.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소유와 존재에 대한 절제가 행복을 보장한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여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였을지라도, 아무리 뛰어난 존재가 되었을지라도 그 소유와 존재가 자신의 통제권 속에 있지 않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그 소유와 존재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 모든 신앙적 열심, 모든 믿음의 행위, 모든 인생들이 그 소유와 존재를 향한 최선의 것이었다 해도 인간의 본질이 그 모든 소유와 존재를 통제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자기 통제 능력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복음으로 인간을 구원하셨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 통제 능력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만 그 모든 소유와 존재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 통제 능력이 성령의 열매로서 “절제”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도 최종적인 열매입니다. “사랑”으로 시작된 성령의 열매가 인간의 행복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마지막 열매인 “절제”에 의해 다스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롬 6:19에서는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라고 하십니다. 죄악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모든 소유와 존재를 통제하지 못하고 부정과 불법에 방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모든 소유와 존재를 자신의 통제권 속에서 의와 거룩함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절제”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절제”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중에서 갈 5:23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9번째 열매로 알려주시는 “절제”는 헬라어 “엥크라테이아”로서 동일한 형태로는 성경에 4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갈 5:23과 행 24:25에 한 번씩, 그리고 벧후 1:6에 두 번 나타납니다. 이 단어는 “자기통제, 절제, 자제”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형용사인 “엥크라테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엥크라테스”는 “일에 힘이 있는, 능란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인데,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접두어는 “엔”으로서 장소, 시간, 상태에서 지정된 “위치”를 나타냅니다. “정지상태”로서 “⋯안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어는 “크라토스”로서 “세력, 힘, 권력, 능력, 지배권”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라는 단어의 의미는 “지배권 안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에게 위임된 모든 소유와 존재를 자신의 지배권 안에 두는 것이 절제이며 자제이고 자기통제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이러한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와 존재가 우리의 욕심의 능력 안에 있을 때 불법과 불의와 타락에 이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 있을 때는 의와 거룩함에 이릅니다. 우리의 실질적인 싸움은 소유의 다소의 싸움이 아닙니다. 존재의 귀천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능력과 지배권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갈 5:17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 때, 우리의 모든 소유와 존재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지배권 밖으로 벗어납니다. 이것이 행복을 빼앗아 가며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하지만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소유와 존재를 성령의 지배권 안에 두시며, 우리의 원하는바 행복과 평강을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이처럼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소유와 존재에 대한 절제가 행복을 보장합니다.

절제는 행복한 공동체 습관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의 행복한 마음의 습관들도 절제와 함께할 때만 공동체 속에서 그 행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절제되지 않는 사랑, 희락, 화평은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트리고, 애통하는 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며, 하나님의 거룩을 무시하게 합니다.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의 행복한 행동 습관들도 절제와 함께할 때만 공동체 속에서 그 행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절제 되지 않는 행동 습관은 공동체의 다른 영혼들을 교만과 오만에 빠지게 합니다.

내가 어떤 소유를 내세우든지, 어떤 존재나 상태를 내세울지라도 절제가 없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현저한 죄악과 부패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기의 통제 능력 안에 있을 경우에만 죄악과 부패로부터 자신의 소유와 존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자신의 육체적 능력이 아닙니다. 육체의 소욕에 따른 정욕의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능력 안에 머무는 소유와 존재는 더욱 심각한 육체의 일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만 절제되어야 합니다.

3. 개인의 소유와 존재가 성령께서 주시는 힘 안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체적인 능력은 우리 마음에 담기는 생각조차도 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이 우리의 육체적인 능력 밖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능력으로 생각나는 것을 생각하며 결정하고 선택하며 세상 가운데 말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사단이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그 생각을 지배할 때 병적인 증세가 나타나며 비정상적인 행위들이 나타납니다. 내가 나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하고, 나의 통제권을 벗어난 그 생각에 따라 살아갈 때 공동체로부터 행복을 상실당합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능력은 우리 마음에 담기는 감정조차도 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그 대상이 질식되어도 사랑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분노의 감정으로 인해 그 대상의 마음이 피 흘리며 고통을 당해도 분노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의 겉모습이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뛰어난 육체의 능력 안에 그 생각과 감정이 절제된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육체의 능력까지 파괴되어 갑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육체의 능력으로 그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절제할 능력이 없는 육체의 능력은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출발하여 표현되는 모든 일, 모든 역사, 모든 문화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절제는 성경적인 절제가 아닌 억눌림이며 억압입니다. 육체의 능력 안에 가두는 작업은 분노와 상한 감정의 축적입니다. 행복을 상실한 자들의 자기제어일 뿐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통제가 절제입니다.

성경에서는 특별히 “절제”해야 할 영역을 언급할 때는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고전 7:9에서는 절제를 “엥크라튜오마이”로 나타내며, “음식물과 성적인 욕구에 대한 절제”를 의미합니다. 딤전 3:2,11, 딛 2:2에서는 절제를 “넵할레오스”로 나타내며, “술에 취하지 않고 술을 삼가는 절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대표적인 절제의 영역 세 가지는 “음식과 성과 술”입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특별히 “절제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제할 영역이 음식과 성과 술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해당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중에서 절제는 그 두 단어가 아닌 “엥크라테이아”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엥크라테이아”라는 절제는 음식, 성, 술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것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며 인생의 모든 영역, 모든 일 가운데 절제를 통해 행복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롬 8:13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며 영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절제가 영으로 사는 것이며 옛사람의 타락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는 “아크라테스”입니다. 부정 접두어 “아(알파)”와 지배권을 뜻하는 “크라토스”의 합성어입니다. 즉, 절제는 지배권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그 지배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영역이 성령의 지배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절제이며 공동체 안에서의 그 마음과 그 행동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엥크라테스”와 “아크라테스”에 의해서 갈라집니다. 성령의 능력과 지배권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엥크라테스”의 절제는 공동체 가운데 성도의 온전함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아크라테스”의 절제의 실패는 부족과 지나침을 통해 성도의 온전함을 파괴합니다. 사랑의 지나침과 부족, 교제의 지나침과 부족 등 모두 인생 행복의 실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율법이 아닌 사랑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은 성도들의 모든 삶의 시작입니다. 고전 13:1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하십니다. 또한 마지막 열매인 “절제”는 그 모든 삶을 온전케 합니다. 고전 9:25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절제로 끝나는 하나의 열매입니다. 사랑에서 시작하고 절제로 끝나는 성령의 열매는 세상에서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절제가 없는 사랑은 공포의 대상입니다. 절제가 없는 희락은 현실도피입니다. 절제가 없는 화평은 타협입니다. 절제가 없는 오래참음은 분노의 시작입니다. 절제가 없는 자비는 경멸과 모욕입니다. 절제가 없는 양선은 무능력한 현실안주입니다. 절제가 없는 충성은 맹신입니다. 절제가 없는 온유는 굴종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지배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절제를 통한 인생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참된 자유함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우리의 모든 삶이 성령의 능력과 지배권 안에 머물도록 절제해야 합니다.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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