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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사람들 (대하 35:20~21, 행 26: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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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말에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순리대로 살면 흥하고, 하늘을 거슬리며 살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이치를 순하게 하는 사람은 흥하고, 하늘이치를 거슬르는 사람은 망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이치대로 순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겨울에는 좀 춥게 살아야 하고, 여름에는 좀 덥게 살아야 합니다. 너무 겨울에 난방을 덮게 하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너무 세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옛 사람들은 자연을 하나님과 일치시켰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이치란 하나님의 이치입니다. 그리고 하늘도 하나님을 지칭했습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이란 자연친화적 삶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웰빙입니다. 최근에는 웰빙을 ‘참살이’라고 합디다. 좀 익숙해지려고 하면 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꿔서 오히려 혼돈이 오는 것 같습니다. 네티즌도 익숙해졌는데 요즘에는 네티즌을 순 우리말로 ‘누리꾼’이라고 합니다. 참살이의 삶이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입니다.

  로마서 1:26-27에는 여자들도 순리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 남자들도 순리로 쓰지 아니하고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순리가 아닌 역리로 쓸 때에 인간의 질서가 파괴됩니다. 하늘을 거슬리게 될 때 질서가 파괴되고 알 수 없는 혼란과 질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이즈라는 것입니다.

  환경대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거슬린 결과가 환경파괴요 오염입니다. 지구온난화를 그냥 두면 10년 뒤에는 전 세계에 대재앙 온다고 합니다. 이산화탄소의 과다 배출이 생태계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여 가뭄과 질병이 만연하게 됩니다. 이런 지구의 온난화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을 거슬리면 이런 재앙이 몰아오게 됩니다.

  사람이 사는 모습은 물 흐르듯 해야 합니다. 미국과 비교해서 미안합니다만 미국의 운전은 큰 강물이 흐르듯 합니다. 넓은 고속도로에 차들이 물이 흘러가듯 갑니다. 교통법 가운데도 차가 다 빨리 갈 때는 물줄기를 따라가듯 함께 가라는 조항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운전은 계곡 물 흐르듯 합니다. 이리저리 끼어들고 차선을 바꿉니다. 차선을 바꾸지 않고 끼어들지 않고 고요히 가면 전체적인 교통 흐름이 10% 이상 빨라진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몇 사람이 10% 느려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체의 리듬대로 살면 120세는 거뜬히 산다고 합니다. 생체 리듬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지어진 원래의 순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하고, 우리의 몸이 생겨진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체 리듬을 벗어나니까 약해지고 병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관념에서 하늘은 복수입니다. 히브리어에서도 하늘은 ‘샤마임’이란 복수를 쓰고, 헬라어에서도 ‘우라누스’라는 복수를 씁니다. 성경적 관념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바울이 삼층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적 시인 ‘서시’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늘은 신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부끄럼이 없는 삶이기를 그는 바랐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빌립보서 3:20에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하늘에 순응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하늘을 거슬리지 아니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질은 대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줄 아는 민감성입니다. 하늘의 소리에 민감하고, 하늘이 보이시는 것에 민감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은 하늘이 보이신 것을 거슬리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보고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땅의 일보다 하늘의 일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가 거슬리지 않은 것은 하늘의 것이었습니다. 땅의 일보다 하늘의 일을 소중히 여겨씁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일을 마치셨습니다. 하늘이 준 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는 충성을 다 했습니다’란 말입니다. 하늘의 일을 다 끝내고 하늘에 충성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슬리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늘이 준 비전을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그에게 준 비전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땅을 거슬립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사람을 거슬립니다. 이것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3:22 이하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인 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니 사람들이 그리로 갑니다라고 시기하여 말했습니다. 3:27에는 이 말을 듣고 요한이 말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 다음에는 더 기막힌 말이 나옵니다. 30절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하늘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땅의 생각으로 보면 시기가 납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하늘의 생각으로 보니 예수님을 높입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은 예수님을 극진히 높일 수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땅의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도무지 전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은 당당하게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으려고 사람을 거슬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7-48에는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고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소리에 민감합니다. 땅보다 하늘에 관심을 가집니다. 지금의 이 하늘과 이 땅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 땅이 아니라 새 땅입니다. 새 땅은 이 땅과 같은 땅이 아닙니다.

  옛날 러시아는 미국에 알라스카를 사라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 값이 고작 720만 달러였습니다. 의회의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을 때 재무장관 윌리엄 시워드는 의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바라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결국알라스카를 사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땅을 산 것이 아니라 비전을 샀습니다. 미래를 샀습니다. 다음 세대를 산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땅만 바라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소리에 민감했습니다.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하늘만 믿고 자기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조카와 갈등이 생겼을 때에 그는 조카 롯에게 “네 앞 온 땅 있지 않느냐?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가 왼쪽으로 갈 것이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땅을 포기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동서남북 바라보아라. 밟는 땅을 네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민감하고 땅을 포기하니 땅을 주셨습니다. 이런 자가 땅을 관리할 자격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둘째, 하늘에서 보이신 것에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슬리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확실한 것을 거슬리지 않고 충실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은 구체적으로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게 말씀하신 사건은 그의 삶을 지배하고, 그의 소명을 지배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아무 것도 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20에는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단호했습니다. 관원들의 공갈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절대 전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하늘에서 보이신 것에 충실해야 했습니다.
  하늘이 주신 것, 하늘이 보이신 것, 하늘이 들려주신 것에 충실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늘의 소리에 충실한 삶이어야 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서 들려진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설교란 하늘에서 주신 말씀을 배달사고만 내지 않으면 좋은 설교입니다. 하늘에서 주지 않은 것을 전하고, 준 것을 안 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단이 무엇입니까? 하늘보다 자기욕심, 자기주장, 자기논리를 앞세우는 것이 이단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아 고넬료에게 이중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이 먹지 못하게 한 더러운 짐승들을 가득담은 보자기를 보여주시며 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더러운 것을 먹지 못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넬료에게는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하십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고넬료는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자신의 집에 청하였습니다. 고넬료도 베드로도 하늘에서 보이신 것에 충실했습니다.

  사도요한의 밧모섬의 환상을 보세요.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계시를 보고 그는 자세하게 계시록을 씁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이신 것들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책이 지금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합니까?

  존 오트버그의 책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암이란 판정을 받고 석 달밖에 못 살거라는 소식을 들은 한 여인이 목사에게 자신이 좋아하던 성경과 함께 묻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한 가지 더 함께 넣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제 오른 손에 포크를 쥔 채 묻어주세요. 제 평생에 음식이 나오는 교회 행사에 가장 좋았던 순간이 언제인지 아세요? 접시를 치우는 사람이 하는 말이 ‘쓰시던 포크를 들고 계세요. 아직 더 좋은 음식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포크를 들고 계세요’라고 할 때입니다. 이 여인이 죽었을 때에 여인의 관에는 포크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 날은 축제의 날이며 진짜 파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하늘의 삶을 삽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늘의 것들을 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합니다.

  믿음이란 땅을 바라보지 않고 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땅의 소리가 아닌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땅의 논리나 세상의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늘의 생각, 성경의 생각, 하나님의 원리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23절에는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입니다. 왠지 아세요? 하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거슬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은 하늘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도 하늘을 거슬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일도 하늘을 거슬리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9:27에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늘을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가 본 것을 전했습니다. 그가 들은 것을 전했습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유신론자와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플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유신론자입니다. 어머니가 아플 때에 기도하면서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신론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몸으로 이 땅 위에 임재하여 사람 속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거슬리지 않고 있습니까? 하늘을 거슬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까? 전하지 않고 있습니까? 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추고 있습니까?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입니다. 베드로후서 3:9에는 “주의 약속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이며 바라시는 바입니다.

결론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신 목사님께 몹시 추운 겨울날 강사 숙소에 한 할머니가 오셔서 정성껏 시중을 들었습니다. 찬 것을 마시면 감기에 걸린다고 콜라까지 보글보글 끓여주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성경을 열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 읽지 않고 사람 이름만 열심히 외우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왜 사람 이름만 읽으세요?” 할머니는 “곧 하나님 앞에 갈텐데 성경을 다 읽어서 무엇 합니까? 이 사람들이 다 천당에 있을 거니까 이름이나 외워 가야지요”라고 하더랍니다. 이 할머니는 구원의 확신과 하늘의 소망이 넘쳐납니다.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이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입니다.

  하늘을 사모하는 새벽의 무리들을 보셨나요? 땅에 것 같으면 그렇게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심야 영화 프로도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 5시에 새벽프로 영화보자고 하면 보겠습니까? 새벽에 영화 보겠다고 본당 차겠습니까? 하늘의 뜻을 거슬리지 않는 무리를 보시려면 특별새벽기도회에 와보세요.

  영화 ‘갈매기의 꿈’을 보시면 갈매기들이 날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로 다 처리하겠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실제 끈으로 묶어놓은 상태로 찍었다고 합니다. 갈매기가 날고 싶지만 어느 정도 밖에 못 날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영적 자유를 누리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땅의 것에 매여 있습니다. 이 땅에 묶여 있는 삶은 하늘을 거슬리며 사는 삶입니다. 땅에 묶여 있는 끈을 풀고 그리스도에게 묶이세요. 이 삶이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삶입니다.
  하늘에 매여 있으면 있어 땅의 원리, 인간의 원리, 세상의 원리로 살지 않고 하늘의 원리, 하늘의 방법으로 삽니다.

  하늘을 거슬리지 않고 하늘에 매여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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