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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 내가 사는 것은...(갈 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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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카돌릭 문학가 엔도 슈사꾸의 명작소설 <침묵>이 잇습니다. 이 책은 포르투갈, 로마, 일본의 사료를 정확히 조사한 실화 역사소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 가 있는 크리스토퍼 페레라 신부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보고가 포르투갈에 들려옵니다. 페레라 신부는 신앙면에서, 또 신학자로서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배교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일본 도쿠가와 정권의 고문이 심했다고 해도 페레라 신부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빅뉴스가 되었습니다.
격분한 그의 제자인 세 명의 청년 신부들이 그 뉴스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자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그 세 명의 청년 신부 중 하나, 제바스티안 로드리고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데, 그도 역시 체포되어 후미에 앞으로 끌려갑니다. 후미에란, 예수님의 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 판에 붙인 것으로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여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나카사키의 영주 이노우에가 고안한 것으로 실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살려주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검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짧은 시간 동안 슬쩍 예수님의 상을 밟고 지나가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해가 가장 심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 시대에도 이토록 쉬운 형식도 거부하고 사형당한 순교자가 수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그 당시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았고, 진실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도 후미에 앞에 섰습니다. 후이메, 그 예수님의 상을 밟고 지나가면 살고, 거절하면 그는 죽임을 당합니다.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내려다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갔기에 동판에 새겨진 예수님의 상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이 울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 몹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같이도 보였습니다. 적어도, 유럽 그들의 땅에서 보던 왕관을 쓴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백인들이 편안하게 믿는 승리자 예수님도 아니었습니다. 함께 고통 받는 예수 함께 울고 함께 괴로워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후미에의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너의 마음은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 신부,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 하십니다.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가 예수님 상을 밟은 순간 새벽닭이 웁니다. 그 옛날, 가야바의 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할 때, 베드로의 괴로움을 예수님께서 이해하시고 용서 하시며, 괴로워하신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그리스도의 눈동자에는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 용서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생기고, 그 이해와 자비가 있었기에 우리는 구원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예수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그것이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참된 메시지가 과연 어떤 것입니까? 기독교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복음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로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위하여 심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거둡니까? 과연 우리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동요되지 않고, 죽음의 면전에서 웃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아무 두려움 없이 담대히 설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를 전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파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 메시지의 진수 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장애물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사도들이 맨 처음 설교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이며 그 사건의 의미였습니다.

바울의 설교핵심은 뭔 줄 아십니까?
고린도전서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 입니까?
그것은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흘렸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 그렇기에 십자가가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스스로 구원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기 위하여 뭔가 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는 이미 다 이루었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이미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 일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분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지금 십자가를 그려 보십시오. 예루살렘 밖 갈보리라 불리우는 언덕 위에 놓여진 세 개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달려서 죽어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누구입니까?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있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사렛 사람 예수입니다. 지금, 그 양 옆에 달려 있는 강도와 같이 예수도 한 인간이셨습니다. 30세가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자요, 비상한 선지자였습니다. 기적을 일으켜 주목 받는 인물이고, 보기 드문 뛰어난 종교적 천재였습니다. 어쩌면 정치, 사회적 선동자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분, 나사렛 예수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 곧 주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16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래요. 육신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시면 그 분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바로 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십자가 위에 달리게 되셨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한 평화주의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잘못 죽음으로 인도된 착한 사람의 죽음도 아닙니다. 너무도 미약하고 힘이 없고 맥이 없어 자신을 변명하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한 나약한 인간의 죽음도 아닙니다.
그분은, 마태복음 20:28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고, 십자가는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죽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결국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한번도 당신의 죽음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면 두 가지 반응 합니다
하나, “어차피 죽을 건데” 되는 데로 살자는 삶이었고, 또 하나는 늘 죽음 앞의 자신을 생각하며 좀 경건하고 좀 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있다.
예수님은 늘 당신의 사명을 생각하셨고 그 사명을 감당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분명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살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음에도 그분은 죽으신 것이다.

보세요. 여러분을 살리려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로 하고 지금 그 모습을 보고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아프시겠어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는 주님의 절규 그리고 그 절규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고통당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살리시려고 스스로 그의 생명을 내던지신 것입니다.

사람은 다 누구나 다 같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분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성인군자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에서 최고로 존경 받는 사람일지라도 버림 받은 자의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는 죄인일 뿐입니다. 아무리 성인군자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눈에는 영원히 멸망할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음도 하나님 앞에는 하등의 가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루살렘에 이 땅에 오신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루살렘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죄로 죽을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과 저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노니”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 입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고난 주간 때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웃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무슨 재간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착하게 살겠다고, 선하게 살겠다고 그리 다짐한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를 만들어 사람이 매달렸다고 해서 그런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지고 교대로 걸었습니다.” 역시 그런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사도행전 13:38-3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결코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님을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
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분을 믿으면 죄가 용서되고 그러면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외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과거, 어제, 아니 조금 전까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분인지 다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여러분과 저는 모두가 지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것, 그리고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죽으신 분임을 믿는 바로 그 순간 여러분과 저가 저지른 모든 것으로부터 전적으로 완전히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는 사실 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 하십시오.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셨다면 여러분과 저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곧 나의 죽음이요, 나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이 죽으셨을 때 나도 죽었습니다.
그분이 살아나실 때 나도 비로소 살아났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20절,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예수 홀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저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저 위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요, 또한 내가 저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시는 것입니다. 이 몸이 이젠 내 몸이 아닙니다. 이 생명이 이젠 내 생명이 아닙니다. 이 산다고 하는 것이 이젠 내 삶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대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이 설교 하실 때 빈 새장을 들고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그 새장은 2파운드, 지금 가치로는 약 1백 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3만원 정도 주고 산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거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소년은 참새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새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난폭한 이 아이는 가금 새장을 흔들어 참새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스펄젼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너. 그 새를 어떻게 할 셈이냐?”
소년은 “조금만 더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릴 거예요.”
스펄젼 목사님은 “그렇다면 나에게 팔지 않겠니?”
소년은 스펄젼 목사님을 훑어보더니 웃으며 농담으로 말했습니다. “2파운드 주면 팔죠.”
스펄젼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2파운드를 주고 새장을 사서 문을 열어 새를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이튿날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대성전 강단에서 스펄젼 목사님이 하신 새장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인간들을 어떻게 할 셈이냐?"
그러자 죄가 말했습니다.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가르쳐 잠시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리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고 싶은데 값을 얼마나 주면되겠느냐?”
그러자 악마는 웃어 버렸습니다.
“이것들을 사서 뭐하게요?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침 뱉고,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그래도 사겠다면 당신의 눈물과 피를 내놓으시오.”
스펄젼 목사님은 이 새장 설교를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감정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여러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피 값으로 사시고, 그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생명으로 그분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을 사시도록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내가 돈을 셀 때 하나님은 내가 졌던 십자가를 세십니다.
내가 소득을 셀 때 하나님은 내가 희생한 손실을 세십니다.
내가 세상의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셀 때 하나님은 내가 주님을 위하여 받은 상처를 세십니다.
내가 소위 성공 했다고 생각하는 열매들을 셀 때 하나님은 내가 주님께 바친 순종이 몇 번이나 되었는지를 세십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아주 단순합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불신앙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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