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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기만 (마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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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회를 이루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일 말씀을 그대로 하다 보니 하필이면 오늘 자기기만을 경고하는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 말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꼭 필요한 말씀인 줄 믿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당시 ‘주’라는 호칭은 단순히 존경은 나타내는 존칭어로서 노예의 주인이나 소유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 호칭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호칭이 예수님에게 적용했을 때는 단순한 존칭을 넘어서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뉘앙스를 가졌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여, 주여’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식한 사람이며, 그 호칭을 거듭 부른 것으로 보아 열정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뜨거운 열정이 있어도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참 좁은 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른 행함’이 공로가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삶을 역추적해보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행한 사람이더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처음으로 “내 아버지의 뜻”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그 뜻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짐작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열정적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노력과 열정은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주님 앞에 서게 된 날에 그들은 감격과 흥분에 들떠서 “주여, 주여”하며 입을 열고, 살아 있을 동안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았음을 간증합니다. 아마도 그동안의 수고를 보상하는 큰 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철퇴를 내리치듯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열심히 선지자 노릇했고, 하나님의 뜻이 확신 있게 예언해주었습니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누구보다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의 많은 활동들이 예수님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선언입니다. 또 ‘불법을 행한 자’로 정죄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주님의 뜻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판결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좋아서 선지자 노릇하고, 자기가 신이 나서 귀신을 쫓아내고, 자기가 재미있어서 권능도 행하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보다, 종교적 활동 자체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활동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주님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열심히 행하며 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날’에 그 모든 것이 자기기만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자기들이 바로 양 가죽을 쓴 이리이며, 거짓 선지자이고, 나쁜 나무였고, 좁은 길 대신 넓은 길을 걸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시종일관 자신들에게 속았던 것입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 날에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스스로 기만당한 사람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민수기 22장에 등장하는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당나귀와도 대화하고, 천사도 볼 수 있는 신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앞날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불의의 삯을 좇아 살다가 멸망했습니다(수 13:22; 유 1:11; 벧후 2:15-16). 버림받았던 사울왕도 선지자들의 무리에 섞여서 함께 예언한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삼상 10:10). 예수께서 12제자를 전도여행 보내실 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은(눅 9:1), 가룟 유다도 그러한 능력과 권세를 받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뛰어난 종교적인 삶을 살고서도 ‘그 날에’ 천국 밖에 있을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공적인 삶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훌륭한 신앙인이며, 스스로도 참된 제자라 생각하지만,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는 판결을 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지금 나의 신앙적 말과 행위들이 참으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자기 점검을 요청합니다. 자기기만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성경은 한 번 구원을 확신한 사람은 자기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점검을 명령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자기기만을 예방하는 한 가지 방법이 내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고 있는지, 무엇을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행하는데 관심 두고 있습니까? 참으로 그 분의 뜻을 알고 순종하려고 성경을 펼칩니까? 화려한 신앙생활보다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 뜻대로 바르게 행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낍니까? 드러나는 공적인 삶보다 감추어진 하나님 앞에서 삶이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습니까?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관심과 보람을 예수님께 두지 않습니다. 단지 종교적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안심하며 자기를 점검에 힘쓰지 않습니다.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회개하기보다, 여러 가지 종교적 활동을 통해 상쇄시켜버립니다.

자기를 점검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결과보다 과정을 살피는 것입니다. 똑 같이 성경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지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읽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읽을 수 있습니다. 한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두렵고 떨림으로 접근하지만 다른 사람은 역사소설 읽듯이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었다는 결과는 같지만 그 과정의 태도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어떤 결과에 만족하기보다 그 과정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있어서는 예전보다 예배를 비롯한 종교적 활동에도 더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장했습니까? 1년 전보다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그 분의 뜻을 더 잘 알게 되었으며, 그분의 뜻을 내 삶속에 바르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참으로 더 하나님 백성다워지고 하나님 자녀다워졌습니까? 참으로 성령의 열매가, 팔복의 열매가 더욱 충만해졌습니까?

오히려 구원받은 초창기보다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열정을 상실하지는 않았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보다 여러 가지 삶의 활동들에서 보람과 만족을 찾으면서도, 오히려 성숙해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의 내면을 점검해보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기만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드러나는 겉모습만 보고 성장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종교적인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면, 3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그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의 분명한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해 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주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나이다’라고 기도할지라도, 그 뜻을 헤아려보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냥 ‘주여, 주여’하는 사람입니다. 굳이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여 행하기보다는 자기 취향대로 신앙생활하려는 마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종교가 형식화 되는 것은 전혀 몰라서가 아니라 단편적으로만 알고, 전체적인 의의는 파악하지 못한 채 무조건 다른 사람 하는 대로 따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르고 정확하게 아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 취향에 맞게 취사선택해서 부분적으로만 순종하지 않고, 전 삶의 방향이 주의 뜻에 순종하는 쪽으로 잡게 됩니다. 그리고 큰일을 순종해 내기 위해 작은 일부터 순종하는 연습을 통해 자기를 연단해 나갑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연습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그날’에 주님 앞에서 공로로 내세워 자랑할 것이 결코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오직 허물과 죄악 속에서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왔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부단히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던 사도 바울은 그의 신앙이 가장 성숙하였던 때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했습니다. ‘괴수였다’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괴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지라도 그것은 그가 세운 공로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간혹 내가 이것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조차, 온전하게 순결하지 않고 죄와 허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큼 성결하지 않습니다. 다만 은혜로 허물은 가려주시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자기점검에 게으르지 않게 하시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며 바르게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
(최 동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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