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34)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신 예수님” (요 14..

  • 잡초 잡초
  • 301
  • 0

첨부 1


  성가대가 부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저는 1993년 2월 14일 주일 로마니아 오라디아 침례교회에서 200여명의 성가대원들이 부른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고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감명 깊게 들은 다음부터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변교회 성가대는 8.15 광복 기념 주일을 맞을 때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릅니다. 성가대원들에게 항상 감사를 드립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비록 애굽에서 나중에는 바벨론에서 노예의 신세로 살았지만 애굽이나 바벨론 땅을 바라보지 않고 요단강 저편의 잃어버린 고향의 땅과 고향의 하늘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슬픔과 희망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요단강 저편의 잃어버린 고향 땅으로, 오 지금은 잃어버린 아름다운 땅. 하나님의 예언자가 울리는 황금의 수금이 영원하고 즐거운 위안을 선포하리라. 비탈과 언덕에서 날개를 접어라, 그곳은 부드럽고 온화한 공기, 조국의 공기가 향긋한 곳 맞이하라. 요단 강둑과 무너진 탑, 오 내 조국 빼앗긴 내 조국, 유대 나라가 원수들의 멍에를 벗어나리라!"

  히브리 노예들은 애굽과 바벨론에서 노예의 신세로 살았지만 애굽과 바벨론 땅을 바라보지 않고 요단강 저편의 잃어버린 고향의 땅과 고향의 하늘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저들은 애굽과 바벨론을 떠나 고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단을 건너 고향에 이르러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땅을 바라보고 살면 땅의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면 하늘의 사람이 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돔성을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다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며칠 전에 어느 신문사에서 저에게 광복 60주년의 의미가 무엇이고,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며, 광복 6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보내온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답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좀 길지만 오늘이 광복기념 주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분들이 담임 목사의 생각을 아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여기 그대로 옮깁니다.

  “8.15 해방과 광복은 한국 교회와 한국 민족에게는 ‘출애굽’과 같은 감격스러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고통소리와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손들을 통해서 이 민족과 교회를 구원하신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기도 소리 중에는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 소리도 손양원 목사님의 기도 소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함이 영원함이로다’(시139:10).

  “저는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는 정치적 위기도 경제적 위기도 군사적 위기도 아니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성도들에게는 오직 영적인 위기와 도덕적인 위기가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는 지나치게 정치, 경제, 군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진보적인 교회가 그러더니 지금은 보수적인 교회가 그러합니다. 결국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인 영성과 도덕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사회의 불신과 비판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심각한 사고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의 생애의 초기에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입장에 서서 교회의 정치 사회 참여를 비판적으로 보았고, 74년 로잔 이후에는 손봉호 교수등과 함께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정치 사회 참여의 필요를 강조해왔는데, 최근에는 다시 교회의 본래의 모습은 역시 길선주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이 강조한 영성과 도덕성을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와 문창교회와 산정현교회에서 민족주의적인 정치적 요소를 제거했다는 대목에서 저는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전쟁도 정치도 나라의 운명도 결국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성과 도덕성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 ‘우울한 실재론자’ 였던 어거스틴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한국교회가 최우선적으로 되 찾아야 할 것은 회개와 기도와 예배와 사랑과 희생에 기초한 영성과 도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 120주년, 광복 6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과제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민족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기리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길선주, 이기풍, 최권능,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본 받아 그대로 살고 그대로 죽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중요한 일들 중의 하나는 세상과 땅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들에게 손을 높이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세상과 땅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치 경제에 관심을 쏟고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얼마나 열심히 손을 높이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출애굽과 출 바벨론의 종착역은 가나안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나라도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과 출 바벨론의 종착역은 하늘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선배들의 사적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저희가 이제는 더 낳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3,16). 사실 8.15 광복의 종착역도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과 같이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이라면 8.15 광복의 종착역도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최고의 역사가인 어거스틴이 개인과 민족과 교회와 세계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그 역사의 종착역은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이라고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참회록」과 「신국론」은 모두 천국에 대한 묘사로 마무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정치, 경제, 군사, 민족 문제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가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하지만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목회자들이 그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초기부터 사역의 말기까지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세례를 받을 실 때도, 복음을 선포하실 때도, 산상설교를 하실 때도, 기도하실 때도, 최후의 만찬을 베푸실 때도, 승천하실 때도,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승천하신 다음에도 계속해서 땅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기 때문이고,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본향이기 때문이고, 생명과 기쁨과 빛이 충만한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신 말씀들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설교의 중점과 초점을 하늘에 두셨습니다.

  우리들은 설교를 할 때 아무래도 우리들의 삶의 형편과 처지에 그 중점과 초점을 둡니다. 잘 살기 위한 설교를 하기도 하고, 잘 되기 위한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나라가 잘 되기 위한 설교를 하기도 하고,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받아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설교를 한번도 하신 일이 없습니다. 잘 살고 잘 되기 위한 설교를 한 번도 하신 일이 없고, 나라가 잘 되기 위한 애국적인 설교를 한 번도 하신 일이 없으며, 은사들을 많이 받아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라는 설교를 한번도 하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중점과 초점은 항상 하늘과 하나님 나라에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설교하신 설교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간단한 말씀이었습니다(마4:17). 지금 여기 있는 이스라엘 나라가 너희들이 들어갈 나라가 아니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이 들어갈 나라 라고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하시면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하신 단어는 ‘하늘’이었고 ‘하늘의 아버지’ 였고 ‘하늘 나라’ 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도 복이 있고 핍박을 받는 자도 복이 있는데 그 복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착한 일을 할 때에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산상 설교를 마무리하면서도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7:21).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제자들에게 하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에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둘째,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마다 그의 시선과 관심을 하늘에 두셨습니다.

  우리들은 기도를 할 때도 우리들의 시선과 관심을 우리들의 삶의 형편과 처지에 두는 때가 많습니다. 청담동에 있을 때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제일 앞 자리에 안아서 열심히 기도하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거의 매일 처음부터 마지막가지 손자를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손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 하고, 집에 돌아왔다가 학원에 가서 공부를 잘 하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잘 자고 그래서 일류대학에 합격하게 헤 달라는 기도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도를 한번도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마다 그의 시선과 관심을 오직 하늘과 하늘의 아버지에 두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소리를 내어 아버지를 부르면서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영광에, 관심을 쏟으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기도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시면서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마14:19). 나사로 죽었을 때도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아버지여’라고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 아버지의 영광이 기도의 초점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서 ‘아버지여!’ 라고 소리를 내어 아버지의 뜻에 항복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눅22:41,42). 아버지의 뜻이 기도의 초점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셋째, 예수님은 승천하신 다음에도 땅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도록 계속해서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스데반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늘을 바라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7:55,56). 사울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늘을 바라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9:3,4). 베드로를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늘을 바라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행10:11).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을 통해서 땅에 사는 모든 성도들이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도록 계속해서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4장 이후부터 계속해서 “내가 보니, 내가 들으니” 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요한이 하늘을 보고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몇 곳만 인용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계4:1,2).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8:1)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듣고 하늘로 올라가니”(11:12).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11:19).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14:1)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14:13).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9: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22:1).

  예수님께서 사역의 초기부터 사역의 말기까지 아니 하늘에 가서까지 이렇게 열심히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하늘은 우리의 아버지가 계신 곳이기 때문이고, 하늘은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본향이기 때문이고, 하늘에는 생명과 기쁨과 빛이 충만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세상에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들을 지옥에 떨어지도록 내 버려두시지 않기 위해서 였습니니다. 이 세상은 잠간 지나가는 나그네의 길과 같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나라도 잠간 지나가면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식주를 위해서 구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마6:33).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31). 저는 지금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도피주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청교도들의 신앙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를 든든하게 세우는 길이기도 합니다. 몰트만이라는 독일 신학자는 하늘 의식과 종말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현실을 가장 책임 있게 산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땅에 집착하려는 성향과 하늘에 오르려는 성향입니다. 육체와 세상 일에 집착하려는 성향과 영혼과 하늘 일에 집착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저는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한 평생 꾸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데 이제는 나무 판자가 없어도 종이 판자가 없어도 그저 손 만 움직여도 잘도 납니다. 저는 또한 산을 좋아하는 데 산에 오르면 언제나 날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땅에서 살지만 땅을 바라보면서 땅에 집착해서 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사모하면서 살라고 하늘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십시다.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천국이 그리워지고 천국이 가까워집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들의 좁은 마음이 넓어집니다.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답답한 마음이 시원해 집니다. 조급한 마음이 여유로워집니다. 어두운 마음이 밝아집니다. 더러운 마음이 깨끗해 집니다. 욕심과 탐욕의 마음이 변해서 너그러워집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늘처럼 아름다워지고 신비로워집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패니 크로스비처럼, 손양원 목사님처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십시다!
(김 명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