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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평화의 언약 (겔 37:15-28, 고후 5:16-21, 마 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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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여 년 전에 내가 어줍잖게도 『생명의 선한 청지기』라는 제목의 칼럼집을 낸 바 있었습니다. 그때 용감하게도(?) 그런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전혀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출판사 측의 집요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책에「8월과 한국교회」라는 제목으로 된 글이 있습니다. 거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기뻐하고 원했던 대로 전개되지를 못했습니다. 해방의 감격에 들떠 있는 동안 이미 이 땅은 전혀 타의에 의해서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소위 '단일 민족'의 긍지를 가진 우리는 '분단 민족'의 한을 안게 되었으며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경제적 이데올로기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역사의 와중에서 한국 교회는 어떠하였습니까? 일제 때 그들의 우상숭배와 맞서 온갖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 신앙의 정절을 지켜왔던 한국교회는 해방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주신 '출애굽'의 역사(役事)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단 이후의 한국 교회는 분단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분단신학',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종속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제의 우상숭배에 피 흘리며 싸워왔던 한국교회는 광명한 천사 같은 '이데올로기 우상' '신 제국주의 우상'에 비판 없이 무릎꿇고 절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상이 그 글의 내용 일부입니다.

우리는 금년으로 60회 째 광복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해방둥이가 회갑을 맞게 될 만큼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앞에서 내가 인용한대로 해방당시 우리 민족이 겪은 일제 36년간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었던 그 감격은 실로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깨닫고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해방의 기쁨에 흥분하고 들떠있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민족은 둘로 분단되고, 국토는 미군의 남한 진주와 소련군의 북한 진주로 인하여 분할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당시 미군을 우리의 "해방의 천사"로 알고 열열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서울에 입성한 미군이 맨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중앙청 뜰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를 하강시키고 거기에 우리의 태극기가 아니라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를 게양했습니다. 이 일이 비록 단순한 것 같으나 사실은 이것이 8.15이후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를 규정짓게 되는 매우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비록 일본으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미국이라고 하는 새로운 세력에 종속된 것과 그리고 민족이 분단되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당시 미군정 장관이었던 하지가 낸 성명서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38도 이남의 조선 땅에는 미국 정부만이 있을 뿐이며 그 외의 다른 정부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하느라고 이런 현실은 그 기쁨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뿌리도 알 수 없는 이런 말이 떠돌았습니다.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마라. 일본이 일어난다 조선아 조심하라" 그런데 그후의 역사를 보면 이 말이 적중하여 왔습니다. 일종의 예언이었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6.25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갖다 바친 군사 작전권은 아직도 그대로이며, 남북교류니 6자 회담이니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결정적인 키(key)는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지 않습니까? 소위 "당국자 회담"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북한과 미국간의 회담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는 완전히 엑스트라가 아닙니까? 중앙청에 우리의 태극기가 게양되지 못했던 그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2. 우리는 그 해방의 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을 3천년 전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 사건과 방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애굽의 제국주의 지배아래서 신음하던 히브리 민족이 해방자 모세의 인도로 노예의 땅 애굽을 탈출하여 자유와 자주의 새 역사를 시작했던 것이 출애굽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살펴보면 8.15와 출애굽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출애굽은 노예민으로 억압당하던 히브리 민족이 벌인 해방운동의 결과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8.15는 비록 우리 민족의 해방운동과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던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배함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출애굽으로 애굽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하는 민족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으나 우리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으나 새로운 외세인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지배를 받게 됨으로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출애굽은 통일된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이루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8.15는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정정치를 채택했으나 우리 민족은 8.15후 자주도 통일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늘 구약 에스겔서 본문을 보면 2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즉 통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즉 자주하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광복절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온전한 광복을 이루지 못한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바로 이 두 가지 인줄 믿습니다. 즉 민족의 통일과 민족의 자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하고 힘써야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의 통일과 민족의 자주를 위하여 힘써야 하는지 살펴보십시다.

(1) 오늘 우리의 비극인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남북으로 분단된 이래 서로 적대시하고 싸워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분단되어 서로 대적하는 남북왕조를 하나로 통일시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에는 북 왕국의 지파 이름을 쓰고, 다른 하나에는 남 왕국의 지파 이름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이 둘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으로 여기 두 막대기는 두말할 것 없이 당시 분열되어 있던 남북왕국을 말합니다. 원래부터 분열되고 분단하는 것은 인간들이 저질러 온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하나가 되고 통일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분단된 이스라엘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되고...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고 하신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원하시고 또 명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의 지상과제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동시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는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평화의 복음이 우리에게 화해와 통일을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저 유명한 산상 보훈에서 우리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조건을 명시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한 화해 없이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4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화해의 상징입니다. 아니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골1:20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를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하나님은 민주주의자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에 수많은 다른 사상을 가지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남쪽에 있는 우리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북쪽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평화의 복음을 믿는 이상 민족의 평화와 통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본질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민족의 평화와 통일은 우리 신앙의 주변적인 일이 아니라 중심적인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에 단지 비판자나 방관자의 입장이 아니라 신앙으로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그러므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화해"로 표현했습니다. 고후5:19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5:18에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최근까지 기독교 독서계에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책을 보면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는 중국에서도 복음이 들어가기만 하면 정말 돌 같은 그 마음들이 마치 봄날 눈 녹듯 녹아 내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민주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예속하거나 단지 그 사상을 지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도 복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도 역시 복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에스겔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을 모든 우상숭배로부터 건지고 더 이상 우상숭배에 더러움에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한 이 말씀을 우리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복음이 어떤 주의나 사상에 예속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우상입니다. 민주주의도 그렇고 공산주의도 그렇고 주체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사람, 모든 사상을 다 초월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사상과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 이 복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지상과제로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할  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아까 말씀드린 내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함으로 끝내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기면 그 말씀만을 절대로 순종하는 '여호와만'의 신앙을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에 입각해서 민족의 통일을 지향하는 '통일 신학'을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 민족이 더 이상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명실상부한 '해방'과 '독립'의 민족자주를 성취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이 때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셨고 오늘까지 부흥시켜 온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현실도피가 아닌 역사와 민족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는 사명자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김 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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