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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이 아닌 시작으로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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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문제 사역자이신 정태기 목사님이 소록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은 뒷사람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주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큰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대유?"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여 돌아보았더니, 눈 한 쪽이 없고 두 손은 없어져 팔뚝만 남았고 입도 정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대유" 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정 목사님은 그의 기도 모습에 가슴이 북받쳐 그 사람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울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예배 후에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그런 기도를 드립니까?". "문둥병이 들자 처자식도 형제도 다 나를 버렸는데 오직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이처럼 감사한 일이 어디 있느냐" 고 대답합니다. 다시 말해 문둥병으로 자신의 삶이 끝이 났다고 생각하였는데 주님을 통하여 시작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인' 이란 동네에 아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여인이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일찍 죽었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마지막 희망이자 삶의 전부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나인' 이라는 말은 본래 '즐거움' 이라는 뜻인데, 즐거운 동네가 통곡의 동네로 바뀌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시신을 메고 무덤으로 갑니다. 이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렬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끝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이 있다면 다시 시작되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되어도 시작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끝이라고 생각되는 삶 속에서,

첫째로 슬픔을 기쁨으로 만드십니다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 총재 김 준곤 목사님은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 점에서' 라는 음반을 만들어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음반에는 29세의 나이로 암에 걸린 딸의 투병 167일을 지켜보는 아버지, 엄마 잃은 두 손녀를 5년 간 키우며 가슴을 저미는 할아버지, 딸의 죽음으로 신앙을 다지는 목회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둘째 딸 신희가 위암으로 처절한 고통 속에 죽었을 때, 저는 존재의 제로 점에 서있었습니다. 제 생애에 가장 애절한 기도가 무참히 거절당한 직후였지요." 체중이 26㎏까지 내려간 신희는 온몸에 바늘을 꽂은 채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그 순간 딸의 죽음을 대신하고 싶었습니다. 병실 창문 너머로 개나리꽃이 만발한 어느 날, 딸은 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 "아빠, 나 살고 싶어요. 살 길이 없을까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해 더욱 마음이 슬펐다고 합니다. 그러나 딸은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며 영감에 찬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만약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면 제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잔을 주시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제 고통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주십시오". 세상 떠나기 전 날 딸은 평화로운 눈동자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시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은 꿈에 자주 딸을 보았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신희는 밝은 목소리로 "아빠 이젠 걱정 마, 다 나았어요" 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어찌나 허전하고 슬픈지 날이 밝을 때까지 잠 못 들고 베갯잇을 적신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깊고 깊은 존재의 밑바닥에서 가늘고 작은 목소리로 찬송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내 속의 성령이 나를 대신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 날 이후 김 목사님은 모든 슬픔을 버리고 한없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땅 위의 아버지인 자신보다 딸을 더 사랑해서, 필요하시기에 더 좋은 곳으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데려가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기쁨의 찬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께서 오셔서 슬픔을 기쁨의 시작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관속에 넣고 그 뒤를 따르는 여인의 슬픔과 눈물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히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한탄스럽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을 보고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로만 위로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위로한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청년아! 일어나라" 하십니다. 그 때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과부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이 시간 무슨 슬픔의 사연을 가지고 왔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으로부터 '울지 말라' 는 위로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시며 인생의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과부의 흐르는 슬픔의 눈물을 멈추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기쁨의 띠를 둘러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십니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생만큼 우울하고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도 없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해되어 고아처럼 자랐습니다. 청년기에는 혁명당에 가담한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사형집행 전에 천재적인 문학성 때문에 황제 특사로 사면이 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그 후 결혼하여 자식이 하나 있었지만 추위와 배고픔으로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질병인 간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일평생을 인생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과 같이 읽을수록 인생의 깊이와 고뇌,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되는 작품들을 쓸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인생의 고통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를 좌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영혼의 돛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 주신 희망으로 고통스런 인생을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라도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절망의 행렬을 누구라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절망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하는 행렬을 멈추시고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일어나라' 고 선포합니다. 희망의 말씀입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씀은 부정과거 수동태로써 자기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을 부여해 주심으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즉 청년은 죽었기에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절망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니 절망한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다시 만나 일어났습니다. 도망간 모세도 하나님을 다시 만나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을 주십니다. 또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희망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소설 '빙점' 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의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여류작가인 그는 13년 이상 폐결핵과 다가오는 죽음의 세력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교회에 나가 예배하면서 신앙을 통해 삶의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를 다시 넘어뜨리려고 암이 침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암을 이길 수 있는 신앙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폐결핵도 암도 그녀를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죽음도 그녀를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믿음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소생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어도 예수님 만나면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바뀌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 역시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장사 지내면 영원히 만나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다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며 힘없이 죽음의 행렬을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마지막 죽음 앞에 서있던 강도도 예수님을 만나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질병으로 인하여 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자, 죽음의 고통으로 불안하여 절망하는 자, 인생의 실패로 인해 죽음만을 생각하는 자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실 나인 성의 성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관이 나가는 슬픈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생명의 문이 되었습니다. '즐거움' 이란 뜻의 나인성 이름처럼 아름다운 성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도 '나인' 의 즐거움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질병으로 죽어갈 때, 실패로 좌절할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죽음의 행렬에 끼어 허덕이며 살아갈 때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부디 생명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끝이라고 여기지는 상황과 문제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통하여 다시 시작되는 은혜를 통하여 슬픔이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변화되어 나인의 즐거움을 얻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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